김수영의 시에 나타난 다원적 세계시민주의 연구

개별적 가족 생활 추구

by 이건주

김수영은 1950년대 시에서부터 세계시민주의 논의 가운데 하나인 개별적 가족과 보편적 인간 사이의 긴장과 충돌을 개인적 차원의 핵심 문제로 제기하였다. 그는 한편으로 세계시민으로서 자유와 사랑, 인류 복지와 세계평화 등 보편적 인간 정신을 추구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가장으로서 개별적 가족의 생활난을 해결하려는 의지도 분명하게 드러냈던 것이다.


먼저, 「나의 가족」(1954)에서 개별적 가족 생활을 추구하려는 의지가 직접적으로 나타난다. 화자는 “고색(古色)”이 창연한 “우리 집”에도 변화의 “물결과 바람”이 “신선한 기운”을 가지고 쏟아져 들어왔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이유가 이렇게 많은 “식구들”이 “아침”에 나가서 일하다 “저녁”에 들어올 때마다 “먼지”처럼 작지만 그래도 돈을 벌어오기 때문임을 암시한다.

古色이 蒼然한 우리집에도

어느덧 물결과 바람이

新鮮한 氣運을 가지고 쏟아져 들어왔다

이렇게 많은 식구들이

아침이면 눈을 부비고 나가서

저녁에 들어올 때마다

먼지처럼 인색하게 묻혀가지고 들어온 것

얼마나 長久한 歲月이 흘러갔던가

波濤처럼 옆으로

혹은 世代를 가리키는 地層의 斷面처럼 억세고도 아름다운 색깔―

- 「나의 家族」 부분(초판:47)

그는 가족을 “장구한 세월” 동안 “파도”처럼 옆으로 흘러가고, “세대” 간에 이어지는 오랜 역사를 지닌 “억세고도 아름다운 색깔”이라며 대단히 긍정한다. 심지어 “가족의 입김”이 합치어진 것 즉, 가족적 사랑이 “겨울바람”보다 더 자신의 눈을 밝게 한다고 하면서, 가족들이 떠드는 소리도 귀에 거슬리지 않을 정도로 가장으로서 그들에게 자신의 “전령(全靈)”을 맡겼다고 고백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세계시민으로서 추구해야 하는 보편적 인간 정신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지금도 “위대한 고대조각의 사진”을 “온 마음”을 다하여 즐긴다고 하면서, 민족적인 “성스러운 향수(鄕愁)”와 세계시민적인 “우주의 위대감”도 “가족들”의 기미 많은 얼굴에 비교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제각각 “자기 생각”에 빠져 있으면서 “부자연한 곳”이 없는 가족의 “조화와 통일”을 긍정하면서, “유순(柔順)한 가족”들이 모여서 “죄 없는 말”을 주고받는 현실 공간인 “방”에서 차라리 “위대한 것”, “위대의 소재”를 생각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란다. 전쟁 직후의 폐허 속에서는 개별적 가족 생활을 부정하고 위대한 보편적 인간 정신만 추구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제각각 자기 생각에 빠져있으면서

그래도 조금이나 不自然한 곳이 없는

이 家族의 調和와 統一을

나는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냐

차라리 偉大한 것을 바라지 말았으면

柔順한 家族들이 모여서

罪 없는 말을 주고받는

좁아도 좋고 넓어도 좋은 房 안에서

나의 偉大의 所在를 생각하고 더듬어보고 짚어보지 않았으면

거칠기 짝이 없는 우리 집안의

한없이 순하고 아득한 바람과 물결―

이것이 사랑이냐

낡아도 좋은 것은 사랑뿐이냐 - 「나의 家族」 부분(초판:48)

마지막 연에서는 거칠기 짝이 없는 “우리 집안”의 한없이 순하고 아득한 “바람과 물결”이 “사랑”인지, “낡아도 좋은 것”은 사랑뿐인지 묻는다. 그리고 가족에 대한 사랑이 “장구한 세월” 동안 흘러왔으므로 “낡은 것”이지만 그래도 “좋은 것”이라고 강조한다. 세계시민으로서 인간적 사랑을 추구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지금은 가장으로서 가족의 생활난을 해결하는 가족적 사랑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후 「영롱한 목표」(1955)에서도 개별적 가족 생활을 추구하려는 의지를 찾아볼 수 있다. 화자는 “새로운 목표”가 “귀고리”보다 더 가까운 곳에서 “죽음”보다 엄숙하고, “종소리”보다도 더 영롱하게 나타나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가 제시하는 새로운 목표는 가까운 현실 세계에 있지만, 초월적인 “죽음”이나 종교적인 “종소리”보다 더 엄숙하고 영롱한 것으로서 가족의 생활난의 해결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죽음”은 그가 산문 「로터리의 꽃의 노이로제-시인과 현실」(1967)에서 “진정한 시는 자기를 죽이고 타자가 되는 사랑의 작업이며 자세인 것”(3판:280)이라고 했듯이 개별적 생활을 추구하는 “자기”를 죽이고, 시인이자 세계시민으로서 보편적 정신의 핵심인 “사랑”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죽음”보다 엄숙하다는 말은 가족의 생활난을 해결하는 것이 보편적 사랑보다 더 엄숙한 목표라는 의미로 이해된다. 그동안 세계시민으로서 “죽음”처럼 엄숙하고 영롱한 보편적 인간 정신만 추구해 왔는데, 이제부터는 가장으로서 그보다 더 엄숙하고 영롱한 개별적 가족 생활을 추구하겠다는 것이다.

새로운 目標는 이미 나타나고 있었다

죽음보다 嚴肅하게

귀고리보다도 더 가까운 곳에

종소리보다도 더 玲瓏하게

나는 오늘부터 地理敎師모양으로 壁을 보고 있을 필요가 없고

老衰한 宣敎師모양으로 낮잠을 자지 않고도 견딜만한 强靭性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目標는 劇場 議會 機械의 齒車

船舶의 索具 등을 呪詛하지 않는다

사람이 지나간 자죽 우에 서서 부르짖는 것은

개와 都會의 詐欺師뿐이 아니겠느냐

모든 觀念의 末端에 서서 생활하는 사람만이 이기는 법이다

새로운 目標는 이미 作業을 시작하고 있었다

驛을 떠난 汽車 속에서

능금을 먹는 아이들의 머리 우에서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喜悅 위에서

四十年間의 組版經驗이 있는 近視眼의 老職工의 가슴속에서

가장 深刻한 나의 愚鈍 속에서

새로운 目標는 이미 나타나고 있었다

죽음보다 嚴肅하게

귀고리보다도 더 가까운 곳에

종소리보다도 더 玲瓏하게 - 「玲瓏한 目標」 전문(초판:101)

그가 “오늘”부터 “지리교사”처럼 “벽”만 보고 있거나, 노쇠한 “선교사”처럼 “낮잠”을 자지 않고도 견딜 수 있는 “강인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도 이제는 개별적 가족 생활을 추구해도 타락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그는 새로운 목표가 “극장”, “의회”, “기계의 치차(齒車)”, “선박의 삭구(索具)” 등 생활난을 해결해 주는 보편적 세계 문명을 “저주”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더 나가서 “사람”이 지나간 과거의 “자국” 위에서 부르짖는 것은 “개”와 도회의 “사기사(詐欺士)”뿐이라고 하면서, “관념”의 말단에서 “생활”하는 사람이 이기는 법이라고 강조한다. 당장 시급히 해결해야 하는 가족의 생활난을 부정하면서 인간적 “관념”과 정신만 주장하는 것은 “사기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어서 그는 가족의 생활난을 해결하겠다는 새로운 목표가 이미 “역을 떠난 기차”처럼 물질문명 시대에는 되돌릴 수 없는 흐름이며, 풍요로운 생활을 상징하는 “능금”을 먹는 아이들이 느끼는 “희열” 외에 다른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당연한 변화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이제는 지리교사나 선교사처럼 “관념”만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40년간”의 조판 경험이 있는 “노직공”처럼 가난을 해결할 수 있는 생활 능력을 갖추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가 자신의 가장 심각한 “우둔(愚鈍)” 속에서 새로운 목표가 이미 나타나고 있었다고 말하는 것도 이제는 개별적 가족 생활을 부정하고 보편적 인간 정신만 추구했던 “우둔”에서 벗어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지금까지는 세계시민으로서 보편적 인간 정신을 목표로 삼아 왔으니, 이제부터는 가장으로서 가족의 생활난 해결을 새로운 목표로 추구하겠다는 것이다.


한편, 김수영은 후기 1960년대 시에서도 세계시민주의 논의 가운데 하나인 개별적 가족과 보편적 인간 사이의 긴장과 충돌을 개인적 차원의 핵심 문제로 제기하였다. 그는 한편으로 세계시민으로서 보편적 자유와 사랑, 인류 복지와 세계평화 등 보편적 인간 정신을 추구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가장으로서 개별적인 가족의 생활난을 해결하려는 의지도 분명하게 드러냈던 것이다.


먼저, 「돈」(1963)에서 개별적 가족 생활을 추구하려는 의지가 나타난다. 화자는 “30원”이 “여유”가 생겼다는 것, “돈”을 만질 수 있다는 것이 대견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동안 무수히 만진 돈은 그대로 나갔기 때문에 “헛만진 것”인데, 쓸 필요가 없어서 “삼사일”을 자신과 “침식”을 같이한 “돈”, 즉 여유 있게 남아 있는 돈이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대견하고 흐뭇하다고 덧붙인다. 그는 “돈”을 자본주의 시대에 필수적인 것으로 긍정하면서 오랜만에 생긴 경제적 “여유”를 즐기고 있는 것이다.

나에게 三十원이 여유가 생겼다는 것이 대견하다

나도 돈을 만질 수 있다는 것이 대견하다

무수한 돈을 만졌지만 결국은 헛 만진 것

쓸 필요도 없이 한 三, 四일을 나하고 침식을 같이한 돈

- 어린 놈을 아귀라고 하지

그 아귀란 놈이 들어오고 나갈 때마다 집어갈 돈

풀방구리를 드나드는 쥐의 돈

하여간 바쁨과 閑暇와 失意와 焦燥를 나하고 같이한 돈

바쁜 돈 -

아무도 正視하지 못한 돈 - 돈의 비밀이 여기 있다 - 「돈」 전문(초판:219)

그가 생활의 “여유”를 추구하는 이유는 특히 “아귀(餓鬼)” 같은 “어린놈” 때문이다. 집안의 가장으로서 어린놈이 “들어오고 나갈” 때마다 집어갈 돈, 즉 자식을 키우는 데 필수적인 돈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쁨과 한가와 실의와 초조”를 같이한 돈이 아무도 “정시(正視)”하지 못한 “돈의 비밀”이라고 결론짓는다.


여기서 “돈의 비밀”은 도스토옙스키가 소설 『죽음의 집의 기록』에서 “돈은 주조된 자유”라고 규정했듯이 자본주의 물질문명 시대에는 돈이 감옥 같은 가난의 굴레로부터 자유를 가져다준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가 이미 「헬리콥터」(1955)에서 물질문명을 “자유의 원형”으로 인식했듯이 여기서도 자본주의 시대에는 “돈”이 생활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를 선사해 주는 것이라며 대단히 긍정하고 있다. 자본주의 시대에는 가장으로서 가족의 생활난을 해결하기 위해 돈을 버는 일이 세계시민으로서 보편적 인간 정신을 추구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비밀”을 “정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같은 해의 「죄와 벌」(1963)에서도 개별적 가족 생활을 추구하려는 의지를 찾아볼 수 있다. 화자는 남에게 “희생”을 당할 만한 충분한 각오를 가진 사람만이 “살인”을 한다는 무서운 말을 던진다. 이것은 타인을 살해하는 죄를 저지르려면 자신도 그로 인한 “벌”로서 “남”에게 “희생”을 당할 수 있다고 각오해야 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그가「파밭 가에서」(1960)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라고 했듯이 어떤 목적을 얻기 위해 “죄”를 저지르려면 이로 인한 “벌”로서 어떤 것을 잃는 “희생”을 각오해야 한다는 것이다.

남에게 犧牲을 당할 만한

충분한 각오를 가진 사람만이

殺人을 한다

그러나 우산대로

여편네를 때려눕혔을 때

우리들의 옆에서는

어린 놈이 울었고

비 오는 거리에는

四十명 가량의 醉客들이

모여들었고

집에 돌아와서

제일 마음에 꺼리는 것이

아는 사람이

이 캄캄함 犯行의 現場을

보았는가 하는 일이었다

- 아니 그보다도 먼저

아까운 것이

지우산을 現場에 버리고 온 일이었다 - 「罪와 罰」 전문(초판:222)

그는 살인의 대상으로 어처구니없게도 자신의 아내인 “여편네”를 선택한다. 그리고 아내를 때려눕혔을 때 “어린놈”이 울었고, “취객”들이 모여들었는데, “아는 사람”이 “범행의 현장”을 보았는지가 제일 마음에 꺼리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심지어 “아까운 것”이 “지우산”을 현장에 버리고 온 일이었다는 충격적인 고백을 한다. 표면적으로 보면 아내를 죽이고도 사이코패스처럼 양심의 가책을 전혀 받지 않고 자신의 범행을 감추려고만 할 뿐만 아니라, 하찮은 우산을 아까워하는 비정상적인 심리 상태를 드러내고 있다. 이것은 도스토옙스키의 동명 소설 『죄와 벌』에서 라스콜니코프가 페테르부르크 거리에서 고리대금업자 노파와 죄 없는 목격자 여동생을 죽이고도 반성하지 않은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


하지만 이 시는 여성 혐오적인 아내 구타와 살해에 대한 사실적인 자백이나 반성이 아니라, 자본주의 물질문명 시대에 필수적인 개별적 가족 생활의 중요성을 상징적으로 강조한 텍스트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가족의 “생활로 표상되는” 여편네를 때려눕히는 행위는 실제 아내를 구타하는 사실적인 장면이 아니라, 보편적 인간 정신을 추구하기 위해서 개별적 가족 생활을 부정하는 상징적 행동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린놈”이 울었다는 것은 개별적 가족 생활을 부정하고 보편적 인간 정신만 추구하다 보니 생활난 때문에 어린 자식들이 울 수밖에 없다는 말이고, “사십명” 가량의 “취객들”이 모여들었다는 것은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않는 자신에 대해 주위 사람들이 비난하기 시작했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아는 사람”이 “범행의 현장”을 보았는지가 제일 마음에 꺼리는 일이었다는 말도 친구나 친척들처럼 자신을 아는 사람들의 비난이 가장 부담이 되었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자본주의 시대에는 가장으로서 가족의 생활난을 해결하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하는데 이를 거부하고, 세계시민으로서 보편적 인간 정신만 추구하는 것은 “죄”이므로 그 “벌”로서 가족의 고생은 물론이고 타인의 따가운 시선과 양심의 가책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가 가장 아까운 것이 “지우산”을 현장에 버리고 온 일이라고 마무리하는 것은 개별적 가족 생활을 부정하고 보편적 인간 정신을 추구하는 것이 자식이나 타인의 시선도 문제이지만, 무엇보다 자신 스스로가 실천하기 어려운 일이라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생활을 부정하면서 돈을 벌지 않는 것은 “지우산”으로 상징되는 물질적 욕망을 죽이는 것이므로 자본주의 물질문명 시대에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다.


결국 시의 첫머리에 있는 남에게 “희생”을 당할 만한 충분한 각오를 가진 사람만이 “살인”을 한다는 말은 「너를 잃고」(1953)에서의 “억만 개의 모욕”처럼 가족이나 타인으로부터 모욕과 희생을 감당할 만한 충분한 각오가 있어서야만 개별적 가족 생활을 부정하고 보편적 인간 정신을 추구할 수 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자본주의 시대에 가장으로서 개별적 가족 생활을 부정하는 것은 가족이나 타인으로부터 당하는 모욕과 희생으로서의 “벌”을 각오해야만 하는 “죄”라는 것이다.


이후 「이혼 취소」(1966)에서도 개별적 가족 생활을 추구하려는 의지가 계속 나타난다. 화자는 아내가 “별거”를 하기로 작정한 “이틀째” 되는 날에 “나”와의 “이혼”을 결정하고, “친구 미망인”의 빚보증을 물어 주기로 한 것이 좋다고 밝힌다. 아내가 친구 미망인의 빚보증을 섰던 화자를 나무라면서 이혼을 결정하자, 그도 속물적인 아내와 이혼하고 인간적으로 친구의 미망인을 도울 수 있게 된 것을 오히려 좋아하는 것이다.

당신이 내린 決斷이 이렇게 좋군

나하고 別居를 하기로 작정한 이틀째 되는 날

당신은 나와의 離婚을 결정하고

내 친구의 미망인의 빚보를 선 것을

물어주기로 한 것이 이렇게 좋군

집문서를 넣어 六부 이자로 十만원을

물어주기로 한 것이 이렇게 좋군 - 「離婚取消」 부분(초판:255)

그런데 막상 “집문서”를 잡히고 돈을 빌리려고 하니 “이자”가 아까워서 아내보다도 더 망설이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5만 원”을 “무이자로” 바꿔 보려고 생전 처음으로 “친구”한테 돈을 꾸러 가는 등 “피” 같은 돈을 아끼려 애쓴다. 평소에 돈보다는 친구와의 우정이나 사랑이 가치 있다고 생각해 왔지만, 피 같은 돈을 조금이라도 아끼려는 속물적인 자신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러던 중에 그는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 대학”에 다니는 “어린 친구”한테서 편지를 받는다. 그리고 그 안에 적힌 “블레이크의 시” 「지옥의 격언」에 나오는 “Sooner murder an infant in its cradle than nurse unacted desire(실행되지 않는 욕망을 키우느니 요람에 든 아기를 죽이는 편이 낫다.)”라는 말을 소개한다. 이것은 같은 시에 나오는 “He who desires but acts not, breeds pestilence(욕망할 뿐 행하지 않으면 질병이 생긴다.)”라는 말로 보아 자신의 욕망을 긍정하라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그런데 김수영은 이 말을 “상대방(미망인)이 원수같이 보일 때 비로소 자신이 선(善)의 입구에 와 있는 줄 알아라.”로 의역했다고 시의 각주에 밝힌다. 개인적 욕망을 추구하는 것이 “선”이라는 블레이크의 말처럼 자신으로 하여금 빚보증을 서게 해서 금전적 피해를 입힌 친구 미망인을 “원수”로 생각하는 것이 “선”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아내”에게 “우리는 이겼다”, “우리는 블레이크의 시를 완성했다”라고 외치면서, 그동안 세계시민으로서 우정과 사랑 등 보편적 인간 정신만 추구했던 자신을 이기고 아내처럼 개별적 가족 생활을 긍정하게 되었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이제 “차디찬 사람들”을 경멸할 수 있다고 하면서, “천사” 같은 “여류작가”의 눈동자가 “피”를 흘리고 있지 않기 때문에 “거짓말”이라고 비판한다. 자본주의 물질문명 시대에 개별적 가족 생활을 부정하고 보편적 인간 정신만 추구하는 것은 “천사”들이나 할 수 있는 일이지, 먹고살기 위해서 “피”를 흘려야 하는 인간에게는 “거짓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것을 지금 완성했다 아내여 우리는 이겼다

우리는 블레이크의 詩를 완성했다 우리는

이제 차디찬 사람들을 경멸할 수 있다

어제 국회의장 공관의 칵테일 파티에 참석한

天使 같은 女流作家의 냉철한 지성적인

눈동자는 거짓말이다

그 눈동자는 피를 흘리고 있지 않다

善이 아닌 모든 것은 惡이다 神의 地帶에는

中立이 없다

아내여 화해하자 그대가 흘리는 피에 나도

참가하게 해다오 그러기 위해서만

離婚을 취소하자 - 「離婚取消」 부분(초판:255-256)

그는 “선”이 아닌 모든 것은 “악”이라고 하면서, “신(神)”의 지대(地帶)에는 “중립”이 없다고 말한다. “피” 같은 돈을 부정하는 극단적인 선(善)이나, 반대로 돈만 아는 극단적인 악(惡)만 있는 신의 지대와 달리, 인간의 지대에는 개별적 가족과 보편적 인간 사이에서 균형을 추구하는 “중립” 지대도 있다는 것이다. 그가 아내에게 “그대”가 흘리는 “피”에 참가할 수 있도록 “이혼”을 “취소”하자고 제안하는 것은 개별적 가족 생활을 상징하는 “아내”를 동반자로 삼아서 자신도 가족의 생활난을 해결하기 위해 애쓰겠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이제는 가장으로서 개별적 가족 생활을 적극적으로 추구하겠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김수영의 시에서는 개별적 가족 생활을 추구하려는 의지가 전기의 「나의 가족」(1954), 「영롱한 목표」(1955)와 후기의 「돈」(1963), 「죄와 벌」(1963), 「이혼 취소」(1966) 등 여러 작품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그는 가장으로서 가족의 생활난을 해결하려는 의지를 전기부터 후기까지 일관성 있게 제시했던 것이다.


- 이건주 문학박사/K-문학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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