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의 시에 나타난 다원적 세계시민주의 연구

균형을 추구하는 다원적 세계시민

by 이건주

김수영은 1950년대 시에서부터 개별성과 보편성 사이에서 중용적 균형을 추구하는 다원적 세계시민을 제시했다. 그는 대립적 양극을 고차원적으로 종합하는 변증법이 아니라, 양극 사이에서 중용적 균형을 추구하는 다원적 세계시민을 상징적으로 제시했던 것이다.


먼저, 「토끼」(1950)에서 개별성과 보편성 사이에서 균형을 추구하는 다원적 세계시민이 나타난다. 화자는 “토끼는 입으로 새끼를 뱉으다”라는 난해한 말을 던진다. 그리고 토끼가 태어날 때부터 “뛰는 훈련”을 받는 “운명”에 처해 있다고 하면서, “어미의 입”에서 “탄생”과 동시에 “추락”을 “선고받는” 존재라고 덧붙인다. 이것은 “시인의 입에서 탄생한 말”인 “시(詩)의 타락”이 아니라, 음식을 먹는 기관인 “입”을 강조하는 것으로서 먹고살기 위해 힘들게 뛰어다녀야 하는 것이 육체를 가지고 있는 인간의 운명이라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사르트르가 “인간은 자유롭도록 선고받았다.”라고 말했듯이 인간은 먹고살기 위해 뛰어다니도록 선고받았다는 것이다.

토끼는 입으로 새끼를 뱉으다

토끼는 태어날 때부터

뛰는 訓練을 받는 그러한 運命에 있었다

그는 어미의 입에서 誕生과 동시에 墜落을 宣告받는 것이다

토끼는 앞발이 길고

귀가 크고

눈이 붉고

또는 「李太白이 놀던 달 속에서 방아를 찧고」……

모두 재미있는 現像이지만

그가 입에서 誕生되었다는 것은 또한번 토끼를 생각하게 한다

自然은 나의 몇 사람의 獨特한 벗들과 함께

토끼의 誕生의 方式에 對하여

하나의 異德을 주고 갔다

우리집 뜰앞 토끼는 지금 하얀 털을 비비며 달빛에 서서 있다

토끼야

봄 달 속에서 나에게만 너의 才操를 보여라

너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너의 새끼를 - 「토끼」 1부(초판:20)

그는 “이태백”이 놀던 “달” 속에서 방아를 찧는 것도 “재미있는 현상”이지만, “입”에서 탄생한 것이 토끼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연이 몇 사람의 독특한 “벗”들과 함께 “이덕(異德)”을 주고 갔다고 하면서, “우리 집 뜰앞”에서 하얀 털을 비비며 “달빛”에 서서 있는 토끼에게 “너”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너의 새끼를” 보여 달라고 주문한다. 사르트르가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라고 말했듯이 물질문명 시대에는 “입”으로 먹어야 살 수 있는 가족의 생활난을 해결하는 것이 “이태백이 놀던 달”로 상징되는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는 일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독특한 벗”은 1954년의 산문 「나와 가극단 여배우와의 사랑」에서 쓰고 있듯이 해방 직후에 “시는 조선은행 금고 속에 있는 거야! 우리는 우리의 이상을 살리기 위하여 최소한도의 돈이 필요해!”(3판:65)라고 외쳤던 초현실주의 화가 P(박일영)를 가리키는 것으로 짐작된다. 이제는 보편적 정신만 추구하지 않고, 자식들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재조(才操)”, 즉 생활 능력을 보여줌으로써 자연이 부여해 준 또 하나의 “덕(德)”을 실천하겠다는 것이다.


제2부에서는 이와 정반대로 토끼가 살기 위해서는 “전쟁”이나 혹은 “나의 진실성” 모양으로 멈춰 “서서”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영혼을 가진 인간이 살기 위해서는 돈을 벌기 위해 뛰어다니다가도 “잠시” 멈춰 서서 보편적 정신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토끼=인간”은 “캥거루”의 일족처럼 잘 뛰어다니지 못하고, “수우(水牛)”나 “생어(生漁)”처럼 넓은 바다에서 “음정을 맞추며 사는 법”을 습득하지 못하였으므로 뛰지만 말고 “고개”를 들고 멈춰 “서서” 주변 상황을 자주 살펴야 한다고 덧붙인다.

生後의 토끼가 살기 위하여서는

戰爭이나 혹은 나의 眞實性 모양으로 서서 있어야 하였다

누가 서 있는 게 아니라

토끼가 서서 있어야 하였다

그러나 그는 캥거루의 一族은 아니다

水牛나 生漁같이

音程을 맞추어 우는 법도

習得하지는 못하였다

그는 고개를 들고 서서 있어야 하였다

蒙昧와 年齡이 언제 그에게

나타날는지 모르는 까닭에

暫時 그는 별과 또 하나의 것을 쳐다보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또 하나의 것이란 우리의 肉眼에는 보이지 않는 曲線 같은 것일까

樵夫의 일하는 소리

바람이 생기는 곳으로

흘러가는 흘러가는 새 소리

갈대 소리

「올 겨울은 눈이 적어서 토끼가 은거할 곳이 없겠네」

「저기 저 하아얀 것이 무엇입니까」

「불이다 山火다」 - 「토끼」 2부(초판:21)

그는 특히 “몽매”와 “연령”으로 인해 개별적 생활에 사로잡히는 것을 경계하면서, “잠시” 멈춰 서서 우주적인 “별”과 자연적인 “초부”의 일하는 소리, “바람”이 생기는 곳, “새”와 “갈대”의 소리 등으로 구체화되는 “또 하나의 것”, “보이지 않는 곡선” 같은 보편적 정신을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올해 “겨울”은 “눈”이 적어서 토끼가 “은거”할 곳이 없을 것이라고 하면서도 “하아얀 것”을 보고 “불”,“산화(山火)”라고 외치면서 시를 마무리한다. 올해 겨울은 가난히 극심하지만 그래도 잠시 멈춰 서서 보편적 정신을 뜨겁게 추구하겠다는 것이다.


제1부에서 토끼는 자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뛰어다녀야 하는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인 반면에, 제2부에서 토끼는 진실성 있게 살기 위해서는 잠시 멈춰 서서 보편적 정신을 추구해야 하는 존재이다. 결국 토끼=인간은 “시적 주체가 만들어낸 환영적 산물”이나, “제국주의 시대의 몰락과 불확실한 냉전질서의 등장이라는 역사적 전망의 이중적 부재 상황”에서 “실존적 자아, 단독자의 표상”이 아니라, 가장으로서의 개별적 생활과 세계시민으로서의 보편적 정신 사이에서 균형을 추구하는 다원적 세계시민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이후 「달나라의 장난」(1953)에서도 개별성과 보편성 사이에서 균형을 추구하는 다원적 세계시민을 찾아볼 수 있다. 화자는 전쟁의 폐허 속에서 생활난에 시달리면서 누구보다도 “여유” 없이 바쁘게 살아가던 어느 날 “주인” 집에 와서 “어린아이”가 돌리고 있는 “팽이”를 보게 된다. 그는 “살림”을 사는 아이들처럼 “노는” 아이도 아름다워 보인다고 생각하면서 다시 “팽이”를 돌려주었으면 하고 바란다. 그리고 “도회”, 즉 도시 문명 속에서 쫓겨 다니듯이 사는 자신의 “일”과 어느 “소설”보다 신기한 자신의 “생활”을 모두 다 내던지고, 자신의 “나이”와 나이가 준 무게를 생각하면서 “속임 없는 눈”으로 팽이가 도는 것을 보니 팽이가 까맣게 변하여 “서서” 있다고 말한다. 팽이가 빨리 돌면 마치 멈춰 있는 것처럼 보이듯이 자신도 쫓겨다니는 것을 멈추고 싶다는 것이다.

팽이가 돈다

어린아해이고 어른이고 살아가는 것이 신기로워

물끄러미 보고 있기를 좋아하는 나의 너무 큰 눈 앞에서

아이가 팽이를 돌린다

살림을 사는 아해들도 아름다웁듯이

노는 아해도 아름다워 보인다고 생각하면서

손님으로 온 나는 이집 주인과의 이야기도 잊어버리고

또 한 번 팽이를 돌려주었으면 하고 원하는 것이다 - 「달나라의 장난」 부분(초판:24)

그는 누구 집을 가 보아도 “여유”가 있고, 바쁘지도 않아서 “별세계(別世界)”같이 보이고, “팽이”가 도는 것이 “달나라의 장난” 같다고 말한다. 생활의 여유가 있어 바쁘지 않은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도 일을 멈추고 쉬면서 보편적 정신을 추구할 수 있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하지만 팽이가 돌면서 자신을 울린다고 하면서, 오랫동안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지 못하고 가족의 생활난을 해결하기 위해 쫓겨다니는 듯이 살고 있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한다.


이어서 그는 “제트기” 벽화 밑의 “나”보다 더 뚱뚱한 “주인” 앞에서 자신은 결코 울어야 할 사람이 아니라고 하면서, “제트기”로 대표되는 전쟁 속에서도 치부를 한 속물적인 주인과는 달리 자신이 보편적 정신을 아예 버린 것은 아니라고 밝힌다. 그리고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운명과 사명”에 놓여 있는 이 “밤”에 “방심”해서는 안 되는데, “팽이”가 비웃는 듯이 돌고 있다고 고백한다. 이것은 그가 주경야독(晝耕夜讀)이라는 말처럼 노동의 시간인 낮에는 개별적 생활을 위해 일하다가도 휴식의 시간인 밤에는 “존재 자체의 근본적인 전환”을 시도하면서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고 있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서서 돌고 있는” 다원적 팽이처럼 자신도 낮에는 돌면서 개별적 생활을 위해 일하다가도 “밤”에는 멈춰 서서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려고 하는데 “방심”해서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므로 부끄럽다는 것이다. 그리고 “비행기 프로펠러”로 상징되는 물질문명 시대에 “팽이”로 상징되는 전통적 정신에 대한 “기억”이 더 멀지만, 자신은 “강한 것”인 서양 문명보다 “약한 것”인 전통적 정신을 더 좋아한다고 하면서, 수천 년 전의 “성인(聖人)”처럼 적어도 밤의 시간에는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겠다는 의지를 다진다.

비행기 프로펠러보다는 팽이가 記憶이 멀고

강한 것보다는 약한 것이 더 많은 나의 착한 마음이기에

팽이는 지금 數千年前의 聖人과 같이

내 앞에서 돈다

생각하면 서러운 것인데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된다는 듯이

서서 돌고 있는 것인가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 「달나라의 장난」 부분(초판:25)

그는 “생각하면 서러운 것”인데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 된다는 듯이” “서서 돌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묻는다. 여기서 “서서 돌고 있는” 팽이는 서 있으면서 동시에 돌고 있는 다원적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생각하면 서러운 것”이라는 말도 낮에는 개별적 생활을 위해 돌다가 휴식의 시간인 밤에도 “방심”하면서 쉬지도 못하고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는 다원적 삶이 힘들고 서러울 수밖에 없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또한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은 물질문명 속에서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생활 능력을 상징하는 반면에, “공통된 그 무엇”은 세계시민으로서 추구해야 하는 보편적 정신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마사 누스바움의 말대로 “사람들을 서로 구분하는 출신지, 지위, 계급, 성별 등의 특징보다는 공통된 인간성에 초점을 맞추는 정치, 혹은 그런 정치에 대한 도덕적 접근의 가능성”을 사유하는 세계시민주의와 직접 연결된다.


그렇다면,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 된다는 듯이”라는 말은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만 추구하고, “공통된 그 무엇”은 배제해야 한다는 “단독성의 절대적 긍정”이나 “김수영이 자신 있게 회복해야 할 단독자의 반복”으로 해석하기는 어렵다. 이것은 “서서 돌고 있는” 다원적 팽이가 아니라, 멈춰 서지 않고 돌기만 하는 일원적 팽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 울어서는 아니 된다는 듯이”로 끊어 읽으면,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과 “공통된 그 무엇”을 동시에 추구하는 다원적 삶은 “서러운 것”이지만, 울지 않고 실천하겠다는 다원주의적 의지를 드러내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서서 돌고 있는” 다원적 팽이처럼 가장으로서의 “스스로 도는 힘”과 세계시민으로서의 “공통된” 보편적 정신을 모두 긍정하면서, 양극 사이에서 중용적 균형을 추구하는 다원적 세계시민이 되겠다는 것이다.


이후 「나비의 무덤」(1955)에서도 개별성과 보편성 사이에서 균형을 추구하는 다원적 세계시민이 계속 나타난다. 화자는 나비의 “몸”은 제철이 가면 금방 죽지만, 그의 몸에 붙은 “지분”은 겨울의 어느 차디찬 등잔 밑에서 죽어 없어진다고 말한다. 개별적인 “몸”보다 보편적인 영혼을 상징하는 “지분”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으로서 개별적 생활난을 해결하기 위해 “고독”하게 일하는 사람의 죽음은 세계시민으로서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는 사람 못지않게 의미가 있다고 강조한다.

나비의 몸이야 제철이 가면 죽지마는

그의 몸에 붙은 고운 지분은

겨울의 어느 차디찬 등잔 밑에서 죽어 없어지리라

그러나

고독한 사람의 죽음은 이러하지는 않다

나는 노염으로 사무친 정의 소재를 밝히지 아니하고

운명에 거역할 수 있는

큰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여기에 밀려 내려간다 - 「나비의 무덤」 부분(초판:55)

그는 “운명”을 “거역”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지만, “노염으로 사무친 정”에 밀려 내려간다고 말한다. 자신은 생활난을 해결해야 하는 인간의 운명을 거역하면서 정신을 추구할 수 있지만, 가장으로서 가족을 부양하지 않으면 “노염”을 받을 수밖에 없는 “정” 때문에 일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가 나비의 무덤 앞에서 생각했다는 “나의 할 일”도 “바다”로 상징되는 보편적 정신이 아니라, 가장으로서 개별적 생활난을 해결하기 위해 “고독”하게 돈을 버는 일일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보편적 정신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개별적 생활에 몰두하다가 “나이”가 들어서 무서운 “인생의 공백”을 가르쳐주려 할 때, 즉 보편적 정신의 소중함을 알게 되는 나이에 다시 나비의 무덤을 찾아오겠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는 “물소리 새소리 낯선 바람 소리”로 상징되는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고, “모자의 정”이나 “부부의 의리” 등 개별적 가족 생활을 위해 일해야 하는 “고독한 정신”을 나비의 지분처럼 곱고 “뜨거운” 정신에 녹이면서 울겠다고 다짐한다. 지금은 가장으로서 개별적 생활에 집중할 수밖에 없지만, 이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때가 오면 세계시민으로서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겠다는 것이다.


그가 “오늘”이 있듯이 “그날”이 있는 “두 겹” 절벽 “가운데”에 자신이 서 있다고 말하는 것도 자신이 개별적 생활과 보편적 정신을 넘어야 할 “두 겹”의 “절벽”으로 모두 긍정하고 있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다만, “오늘”은 생활난 해결을 제대로 담당하지 못하니 너의 가슴 위에서는 “나” 대신 값없는 낙엽이라도 울어 줄 것이라며 보편적 정신을 추구할 여유가 없는 현실을 한탄한다.

오늘이 있듯이 그날이 있는

두 겹 절벽 가운데에서

오늘은 오늘을 담당하지 못하니

너의 가슴 위에서는

나 대신 값없는 낙엽이라도 울어 줄 것이다

나비야 나비야 더러운 나비야

네가 죽어서 지분을 남기듯이

내가 죽은 뒤에는 고독의 명맥을 남기지 않으려고

나는 이다지도 주야를 무릅쓰고 애를 쓰고 있단다 - 「나비의 무덤」 부분(초판:56)

마지막 연에서 그가 나비를 “더러운 나비”라고 부르는 것은 깨끗한 정신을 추구하지 못하고 “더러운” 생활에 집중하고 있는 자신을 비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는 나비의 “몸”은 더럽지만 “고운 지분”을 남기듯이 자신도 개별적인 가족을 위해 고독하게 일하는 “고독의 명맥”을 남기지 않고 아름다운 정신을 추구할 수 있는 “그날”을 위해 지금 더러운 현실 속에서 “주야”를 무릅쓰고 애를 쓰고 있다는 말로 시를 마무리한다. 이것은 자신이 “오늘” 개별적 생활에 집중하는 것은 보편적 정신을 추구할 수 있는 “그날”을 위해서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몸”과 “지분”을 모두 가지고 있는 나비처럼 가장으로서의 개별적 생활과 세계시민으로서의 보편적 정신 사이에서 균형을 추구하는 다원적 세계시민이 되겠다는 것이다.


한편, 김수영은 1960년대 시에도 개별성과 보편성 사이에서 중용적 균형을 추구하는 다원적 세계시민을 지속적으로 제시했다. 그는 대립적 양극을 고차원적으로 종합하는 변증법이 아니라, 양극 사이에서 중용적 균형을 추구하는 다원적 세계시민을 일관성 있게 제시했던 것이다.


먼저, 「반달」(1963)에서 개별성과 보편성 사이에서 균형을 추구하는 다원적 세계시민이 나타난다. 화자는 “음악”을 들으면서 쉬다 보면 “차밭”의 앞뒤 일하는 “시간”이 “가시”처럼 고통스럽게 생각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차잎”이 “아침”이면 날개를 펴고, “저녁”이면 일제히 쉰다고 하면서, 쉬는 데에도 “규율(規律)”과 “탄력(彈力)” 있다고 강조한다. 여기서 차밭은 음악을 들으면서 쉬는 정신(차=음악)과 그 “앞뒤”의 생활(밭)이 공존하는 다원적 공간이고, “차잎”은 “생장과 쉼을 거듭하며 규율과 탄력을 잃지 않”는 존재로서, 노동의 시간인 “아침”에는 가족의 생활난을 해결하기 위해 일하다가, 휴식의 시간인 “저녁”에는 “규율”, “탄력” 있게 쉬면서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는 다원적 인간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그는 “구월 중순”이 되어 차나무가 거의 자기 키만큼이나 자랐는데 “밭 주인”이 아직도 잘라가지 않는다고 하면서, 휴식의 계절인 가을이 되었으니 그만 쉬면서 보편적 정신을 추구해야 하는데 여전히 일해야 하는 자신의 생활난을 한탄한다.

音樂을 들으면 茶밭의 앞뒤 시간이

가시처럼 생각된다

나비 날개처럼 된 茶잎은 아침이면

날개를 펴고 저녁이면 體操라도 하듯이

일제히 쉰다 쉬는 데에도 規律이 있고

彈力이 있다 九月中旬 茶나무는 거의

내 키만큼 자라나고 노란 꽃도 이제는

보잘것없이 되었는데도 밭주인은

아직도 나타나 잘라가지 않는다 - 「반달」 부분(초판:220)

그는 차밭 옆에 “인습적(因襲的)”인 “분가루”를 칠한 “채소밭”이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채소밭은 다원적 공간인 차밭과 달리 “인습적”이고, “개똥”처럼 더러운 생활의 공간을 상징한다. 그가 채소밭의 주인이 “차밭 주인”의 “소작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채소밭”으로 상징되는 생활은 “차밭”으로 상징되는 다원적 삶에서 잠시 빌려온 것일 뿐이라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자신은 개별적 생활과 보편적 정신 사이에서 균형을 추구하는데, 지금은 가족의 생활난이 심해져서 잠시 채소밭을 빌려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편네”는 채소밭을 “자기 밭”이라고 멀쩡한 “거짓말”을 하면서 생활에 집착한다. 물론 그도 생활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거짓말이 “필요할 때”가 있다고 인정한다. 그래서 이런 거짓말을 해도 생활이 나아지거나 하는 “성과”가 없다고 하면서도 여편네의 거짓말에 “반대”하지는 않는다.


시의 후반부에서는 “음악”을 들으면서 쉬다 보면 차밭의 앞뒤 일하는 시간이 “가시”처럼 생각된다는 말을 되풀이하면서, 차밭으로 상징되는 다원적 삶이 “세계(世界)”를 배경으로 한 자신의 “사상”이고, “인생”의 “윤곽과 비밀”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모든 “음악”은 “무용곡”이고, 음악이 “폐허” 같은 생활에 “질서”를 부여하며, 돈을 벌기 위해서 감수해야 하는 “수치”를 이길 수 있게 해준다고 매우 긍정한다. 또한 “가시의 의미” 즉, 개별적 생활을 위해 일하는 고통은 음악을 들으면서 쉬는 “휴식의 휴식” 시간에 “차나무 냄새”, “어둠”, “소녀” 등으로 상징되는 보편적 정신을 추구해야 치유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마지막 연에서 그는 모든 곡(曲)이 “눈물”이라고 하면서 가족의 생활난을 해결하기 위해서 애쓰다 흘리는 “눈물”을 긍정하면서, “아들놈”의 눈 아래에 생긴 눈물방울 같은 “사마귀””를 빼지 않을 작정이라고 말한다. “눈물”은 “나의 장사”이므로 가족의 생활난을 해결하기 위해 일하는 설움과 눈물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달아난 음악”, “반달”을 부르면서 보편적 정신을 상징하는 “음악”이 달아나서 눈물만 남은 개별적 생활도 달의 반쪽처럼 긍정하겠다고 밝힌다. “무용곡”으로 상징되는 정신이라는 반달과 “눈물”로 상징되는 생활이라는 반달을 모두 긍정하고 그 사이에서 균형을 추구하겠다는 것이다. 결국 달은 “시인의 에너지원이자 감각의 안테나 구실을 하는” “눈물과 음악의 이종 결합”으로서 개별적 생활의 ‘반달’과 보편적 정신의 ‘반달’을 모두 긍정하면서 중용적 균형을 추구하는 다원적 세계시민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모든 曲은 눈물이다 어렸을 때 어머니는

나의 얼굴의 사마귀를 떼주었다

입밑의 사마귀와 눈밑의 사마귀……

그런 사마귀가 나의 아들놈의 눈 아래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 나도 꼭 빼주어야

하겠다고 결심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내 눈 아래에 다시 생긴 사마귀는

구태여 빼지 않을 작정이었다

「눈물은 나의 장사이니까」- 오오 눈물의

눈물이여 音樂의 音樂이여

달아난 音樂이여 반달이여

내 눈 아래에 다시 생긴 사마귀는

구태여 빼지 않을 작정이다 - 「반달」 부분(초판:221)

이후 「현대식 교량」(1964)에서도 개별성과 보편성 사이에서 균형을 추구하는 다원적 세계시민을 찾아볼 수 있다. 화자는 현대 물질문명을 상징하는 “현대식 교량”을 건널 때마다 갑자기 “회고주의자”가 된다고 하면서, “식민지”의 “곤충들”은 이것이 얼마나 “죄”가 많은 다리인 줄도 모르고 “자기”의 다리처럼 건너다닌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나이 어린” 사람들이 어째서 이 다리가 “부자연스러운지”를 모른다고 한탄하면서, 자기는 이 다리를 건널 때마다 “심장”을 “기계”처럼 중지시키는 연습을 무수히 해왔다고 밝힌다. 젊은 세대들은 식민지 시대를 겪어보지 못해서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현대식 교량의 부자연스러움을 모르지만, 자신은 다리를 건널 때마다 울분을 참기 위해 무수히 연습해 왔다는 것이다.

現代式 橋梁을 건널 때마다 나는 갑자기 懷古主義者가 된다

이것이 얼마나 罪가 많은 다리인 줄 모르고

植民地의 昆蟲들이 二十四시간을

자기의 다리처럼 건너다닌다

나이어린 사람들은 어째서 이 다리가 부자연스러운지를 모른다

그러니까 이 다리를 건너갈 때마다

나는 나의 心臟을 機械처럼 중지시킨다

(이런 연습을 나는 무수히 해왔다) - 「現代式 橋梁」 부분(초판:235)

그는 현대식 교량에 대한 자신의 “반항”보다 젊은이들의 자신에 대한 “사랑”, “신용”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 마음을 바꾼다. 그리고 젊은이들이 “선생님 이야기는 20년 전 이야기이지요”라고 말할 때마다 “새로운 여유”와 “새로운 역사”를 느끼면서 이제는 개별적 민족 전통만 추구할 것이 아니라, 미래 젊은 세대에게 생활의 여유를 선사해 주는 보편적 세계 문명을 새로운 역사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거 식민지 시대에 머물러서 보편적 세계 문명을 부정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반항임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이런 해석은 그의 산문「대중의 시와 국민가요」(1964)에서 “남북통일과 현대 공업화의 비전”(3판:367)을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뒷받침된다. 그는 당시에 “남북통일”이라는 민족적 과제 못지않게 민중의 생활난 해결을 위한 “현대 공업화”를 시대적 과제로 제시했던 것이다.


그는 이런 “경이(驚異)”가 자신을 늙게 하는 동시에 젊게 한다고 하면서, 현대식 교량을 둘러싸고 “엇갈리는” “늙음”과 “젊음” 사이의 갈등은 사실 누가 맞는지 “분간이 서지 않는” 것이므로 서로 간에 화해의 “다리”를 놓고 “정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개별적 민족 전통을 추구하는 “늙음”의 “속력”과 보편적 세계 문명을 추구하는 “젊음”의 “속력”을 잘 “정돈”하여 중용적 균형을 추구해야 세대 간의 “사랑”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현대식 교량은 개별적 민족과 보편적 세계 사이에서 중용적 균형을 추구하는 다원적 세계시민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이 다리 밑에서 엇갈리는 기차처럼

늙음과 젊음의 분간이 서지 않는다

다리는 이러한 停止의 증인이다

젊음과 늙음이 엇갈리는 순간

그러한 速力과 速力의 停頓 속에서

다리는 사랑을 배운다

정말 희한한 일이다

나는 이제 敵을 兄弟로 만드는 實證을

똑똑하게 천천히 보았으니까! - 「現代式 橋梁」 부분(초판:235-236)

그는 “적”을 “형제”로 만드는 “희한한 일”을 똑똑하게 보았다고 외치면서 시를 마무리한다. 미래 젊은 세대를 위해 현대식 교량으로 대표되는 물질문명의 가치를 긍정함으로써 식민지 시대 민족의 “적”들도 보편적 세계 문명의 발전을 위해 함께 협력하는 “형제”로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현대식 교량은 실제의 다리인 “염천교”인 동시에 당시 사회정치적으로 논란이 매우 컸었던 한일협정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 시에 “회고”, “죄”, “식민지”, “적” 등이 직접 언급되어 있고, 한일협정이 체결된 1965년 6월 22일 직후인 7월《현대문학》에 게재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적을 형제로 만드는 실증”은 식민지 시대의 적인 일본과 수교하여 형제가 되는 한일협정을 쉽게 떠오르게 한다. 그가 희한한 일이라고 말한 이유도 “적을 이기려면 적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역설적 사랑”이 아니라, 한일협정이 적대적인 국가 간에 체결되는 조약으로서 적을 형제로 만드는 실증이기 때문에 좀처럼 일어나기 어려운 희한한 일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개별적 민족 전통만 주장하면서 한일협정에 반대할 것이 아니라, 미래 젊은 세대를 위해 한일협정을 체결하여 보편적 세계 문명의 발전을 추구하자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김수영의 시에는 개별성과 보편성 사이에서 중용적 균형을 추구하는 다원적 세계시민이 전기의 「토끼」(1950), 「달나라의 장난」(1953), 「나비의 무덤」(1955)과 후기의 「반달」(1963), 「현대식 교량」(1964) 등 여러 작품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그는 개별성과 보편성 사이에서 중용적 균형을 추구하는 다원적 세계시민을 전기부터 후기까지 일관성 있게 제시했던 것이다.


- 이건주 문학박사/K-문학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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