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장의 해법으로서 중용적 절제
김수영은 1950년대 시에서부터 개별성과 보편성 가운데 어느 한 극점에 안주하려는 마음을 절제하고, 양극 사이를 끊임없이 이행하려는 다원적 세계시민주의를 제시했다. 그는 양극을 고차원적으로 종합하는 변증법이 아니라, 중용적 절제를 통해 양극 사이를 끊임없이 이행하는 다원주의를 긴장의 해법으로 제시했던 것이다.
먼저, 「너를 잃고」(1953)에서 개별성과 보편성 사이를 끊임없이 이행하려는 절제가 나타난다. 화자는 “늬”가 없어도 “나”는 산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너”를 “억만 개의 모욕”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늬”는 “나”를 배신해서 나에게 모욕을 주는 실제의 아내로서 “상처를 아물게 하기는커녕 계속 자신의 상처를 덧내는 모욕 덩어리”가 아니라, “나”가 가장으로서 책임지고 부양해야 할 아내로서 개별적 생활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모욕”은 실제 아내로서 “가장 가까운 존재가 가장 멀리 사라질 때 모욕감”이 아니라, 반대로 “나”가 개별적 생활을 부정하고 보편적 정신만 추구함으로써 아내로부터 당하는 비난과 모욕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늬가 없어도 나는 산단다
억만번 늬가 없어 설워한 끝에
억만 걸음 떨어져있는
너는 억만개의 侮辱이다
나쁘지도 않고 좋지도 않은 꽃들
그리고 별과도 등지고 앉아서
모래알 사이에 너의 얼굴을 찾고 있는 나는 인제
늬가 없어도 산단다 - 「너를 잃고」 부분(초판:36)
그는 나쁘지도 않고 좋지도 않은 “꽃”이나, “별”을 등에 지고 앉아 “모래알” 사이에서 “너의 얼굴”을 찾고 있었다고 하면서, “인제” “늬가 없어도 산단다”라고 다시 선언한다. 그동안 “모래알”처럼 각박한 생활 속에서 “너의 얼굴”을 찾으면서 개별적인 가족을 위해 돈만 벌었으니, 이제부터는 이를 절제하고 “꽃”, “별”로 상징되는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늬” 없이 사는 삶이 “보람”이 있기 위해서 “돈”을 벌지 않고, “여자”를 보지 않고 산다고 하면서, “애정의 원주(圓周)”가 진정으로 “위대”해지기를 바란다고 밝힌다. 이제부터는 애정의 원주를 가족에서 민족, 인간으로 확대하겠다는 것이다.
이런 해석은 1954년 11월 27일자 일기로 뒷받침된다. 여기서 그는 “너 왜 어머니한테 붙어 있니? 집식구들을 벌어먹이려고 있니?”라고 꾸짖는 이모에게 “그럼 돈으로 벌어야 꼭 버는 거요. 정신으로도 버는 수가 있지.”라고 항변하면서 “이러한 종류의 모욕, 아니 이것보다 더 큰 모욕에라도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공연히 마음이 뒤숭숭하여진다.”라고 고백하였다.(3판:678-679) 당시에 그는 가장인데도 무책임하게 “돈”을 벌지 않는다는 가족의 “모욕”을 견디면서 시인이자 세계시민으로서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개별적 생활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늬”가 없는 “공허한 원주”가 가장 찬란해지면 그때는 다시 “다른 유성(遊星)”을 향해 달아날 것을 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별적 생활을 부정하고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다가 “공허한 원주”가 찬란해지면 다시 개별적 생활로 돌아오겠다는 것이다. “나”의 “생활의 원주(圓周)” 위에 어느 날이고 “늬”가 서기를 바라고, “나”의 “애정의 원주(圓周)”가 진정으로 “위대”해지기를 바란다는 말도 지금은 위대한 정신을 추구하지만, 이후에 다시 “늬”가 있는 개별적 생활로 되돌아오겠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나의 생활의 圓周 우에 어느날이고
늬가 서기를 바라고
나의 애정의 圓周가 진정으로 위대하여지기 바라고
그리하여 이 공허한 圓周가 가장 찬란하여지는 무렵
나는 또하나 다른 遊星을 향하여 달아날 것을 알고
이 영원한 숨바꼭질 속에서
나는 또한 영원한 늬가 없어도 살 수 있는 날을 기다려야 하겠다
나는 億萬無慮의 侮辱인 까닭에. - 「너를 잃고」 부분(초판:36)
마지막 연에서 제시된 “영원한 숨바꼭질”은 개별적 생활과 보편적 정신 사이에서 “영원히” “숨바꼭질”을 하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라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사람은 개별적 생활과 보편적 정신 사이를 끊임없이 이행해야 하는 다원적 존재라는 것이다. 여기서 “영원한 숨바꼭질”은 이후 산문「반시론」(1968)에서 제시한 “무한한 순환”과 연결되고, “애정의 원주(圓周)”가 진정으로 “위대”해지기를 바란다는 말은 가족에서 민족, 인간으로 사랑의 범위가 넓어지는 “원주(圓周)의 확대”로 이어진다.
그가 영원히 “늬”가 없어도 살 수 있는 날을 기다리겠다는 말로 시를 마무리하는 것은 자신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개별적 생활이 아니라 보편적 정신이라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자신은 가족의 생활난을 해결하기 위해 애쓰지 않고 영원히 보편적 정신을 추구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개별적 생활을 부정하고 돈을 벌지 않아서 받을 억만무려(億萬無慮)의 “모욕(侮辱)”을 감수하면서도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다. 그동안 가장으로서 개별적인 가족을 위한 생활만 추구해 왔으니, 이제부터는 무책임하다는 “모욕”을 감수하는 중용적 절제를 통해 세계시민으로서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겠다는 것이다.
이후 「폭포」(1956)에서도 개별성과 보편성 사이를 끊임없이 이행하려는 절제가 계속 나타난다. 화자는 “폭포”를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지는 과감한 존재로 제시하면서, “규정”할 수 없는 물결이 “계절과 주야(晝夜)”를 가리지 않고 “고매한 정신”처럼 쉴 사이 없이 떨어진다고 예찬한다. 여기서 “고매한 정신”은 “계절과 주야(晝夜)”의 시간적 상황에 따라 생활과 정신 사이를 끊임없이 이행하는 다원적 정신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폭포는 노동의 시간인 낮이나 여름에는 개별적 생활을 위해 떨어지다가, 휴식의 시간인 밤이나 겨울에는 보편적 정신을 위해 “쉴 사이 없이” 떨어지는 다원적 존재이므로 어느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고매”한 존재라는 것이다.
瀑布는 곧은 絶壁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規定할 수 없는 물결이
무엇을 向하여 떨어진다는 意味도 없이
季節과 晝夜를 가리지 않고
高邁한 精神처럼 쉴 사이 없이 떨어진다
金盞花도 人家도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
瀑布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곧은 소리는 소리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번개와 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醉할 瞬間조차 마음에 주지 않고
懶惰와 安定을 뒤집어 놓은 듯이
높이도 幅도 없이
떨어진다 - 「瀑布」 전문(초판:102)
그는 특히 “금잔화”, “인가”가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 폭포가 “곧은 소리”를 내면서 떨어진다고 강조한다. 폭포는 낮에는 금으로 만든 술잔이라는 “금잔(金盞)”과 가족을 상징하는 “인가(人家)”를 위해 개별적 생활 속으로 떨어지지만, 이들이 보이지 않는 밤에는 “곧은 소리”를 내면서 보편적 정신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곧은 소리”는 시작 노트에서 “우리에게 있어서 정말 그리운 건 평화이고 온 세계의 하늘과 항구마다 평화의 나팔 소리가 빛난 날을 가슴 졸이며 기다리는 우리들의 오늘과 내일을 위하여 시는 과연 얼마만한 믿음과 힘을 돋우어 줄 것인가.”(3판:528)라고 했듯이 세계의 평화를 상징한다. 결국 폭포는 낮에는 개별적 생활을 위해 온몸을 던지다가도 “밤”에는 세계평화라는 보편적 정신을 위해 온몸을 던지는 다원적 세계시민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마지막 연에서는 폭포가 “번개”처럼 “취할 순간”조차 마음에 주지 않고 “나타(懶惰)와 안정(安定)”을 뒤집어 놓은 듯이 “높이도 폭도” 없이 떨어진다고 말한다. 폭포는 개별적 생활과 보편적 정신 가운데 어느 한 극점에 안주하려는 “나타(懶惰)와 안정(安定)”을 단호하게 절제하고, 양극 사이를 끊임없이 이행하므로 “높이도 폭도” 없는 다원적 존재라는 것이다. 여기서 계속 반복되는 “떨어진다”라는 말은 “무서운 기색도 없이”, “쉴 사이 없이”, “나타와 안정”을 뒤집어 놓은 듯이 등의 말과 연결되어 죽음을 불사하고 온몸을 던지는 단호한 절제를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폭포는 “나타와 안정”을 단호하게 절제하고, 온몸을 던져서 개별적 생활과 보편적 정신 사이를 이행하는 다원적 존재라는 것이다.
이후 「봄밤」(1957)에서는 개별성과 보편성 사이를 끊임없이 이행하려는 절제가 직접적으로 나타난다. 화자는 노동의 계절인 “봄”이 되어도 서둘지 말고, “혁혁한 업적”도 바라지 말라고 자신에게 주문한다. 그리고 자연적 존재인 “개”, 종교적인 “종”, 우주적인 “달” 등으로 상징되는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는 시간인 “밤”에는 개별적 생활 때문에 “당황”하지 말라고 덧붙인다. 노동의 계절인 “봄”이 되어 생활의 고통을 달래기 위한 “술”에서 깨어나 몸이 무겁지만, 휴식의 시간인 밤에는 서둘지 말고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라는 것이다.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赫赫한 業績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 - 「봄밤」 부분(초판:103)
그는 낮에 일하느라 한없이 풀어져 피곤하고, 생활의 여유라는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하게 “회전”하며 해결되지 않아서 기차의 “기적 소리”처럼 슬프더라도 서둘지 말라고 되풀이한다. “재앙”, “불행”, “격투”, “청춘”, “천만인의 생활” 등 “모든 것”이 보이는 “밤”에는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같이 서둘지 말고, 세계시민으로서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라는 것이다.
災殃과 不幸과 激鬪와 靑春과 千萬人의 生活과
그러한 모든것이 보이는 밤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같이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節制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靈感이여 - 「봄밤」 부분(초판:103)
그는 “절제”를 자신의 “귀여운 아들”이자 “영감(靈感)”이라고 외치면서 시를 마무리한다. 노동이 시작되는 계절인 봄에도 휴식의 시간인 밤에는 영감(靈感)을 주는 정신을 추구하기 위해 낮의 생활을 단호하게 잊어버리는 “절제”가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결국 제목인 “봄밤”은 “평범한 일상이 반복되는 세계”를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의 계절인 봄과 휴식의 시간인 밤이 공존하는 다원적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봄”은 가장으로서 가족의 생활난을 해결하기 위해 일을 시작하는 노동의 계절이지만, 그래도 휴식의 시간인 “밤”에는 이를 단호하게 “절제”하고 세계시민으로서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라는 것이다.
한편, 김수영은 후기인 1960년대 시에서도 개별성과 보편성 가운데 어느 한 극점에 안주하려는 마음을 절제하고, 양극 사이를 끊임없이 이행하려는 다원적 세계시민주의를 지속적으로 제시했다. 그는 양극을 고차원적으로 종합하는 변증법이 아니라, 중용적 절제를 통해 양극 사이를 끊임없이 이행하는 다원주의를 긴장의 해법으로 일관성 있게 제시했던 것이다.
먼저, 「적(敵)」(1962)에서 개별성과 보편성 사이를 끊임없이 이행하려는 절제가 나타난다. 화자는 “더운 날”에는 “적(敵)”이 “해면(海綿)” 같고, 자신의 “양심”과 “독기”를 빨아먹는 “문어발” 같다고 말한다. 여기서 “더운 날”은 가난을 상징하는 “추운 날”과 반대로 생활의 여유를 상징하고, “적”은 이후 「적1」, 「적2」, 「잔인의 초」 등에서와 마찬가지로 보편적 정신을 부정하고 개별적 생활만 추구하는 이기적 속물을 의미한다. 경제적으로 생활이 안정된 상태가 되면 자신이 공동체의 “적”이라고 생각했던 이기적인 속물들이 해면처럼 잘 느껴지지 않고, 이들을 응징하려는 “양심”과 “독기”도 사라진다는 것이다.
더운 날
敵이란 海綿 같다
나의 良心과 毒氣를 빨아먹는
문어발같다
吸盤같은 나의 大門의 명패보다도
正體없는 놈
더운 날
눈이 꺼지듯 敵이 꺼진다 - 「敵」 부분(초판:198)
그는 “대문(大門)의 명패”로 상징되는 자기 집을 소유할 정도로 생활의 여유가 생기면 문어발의 흡반(吸盤)이 “적”을 빨아먹어서 “정체(正體)”도 없이 사라진다고 거듭 말한다. 또한 생활난의 해결이라는 관점에서 적들을 “운산(運算)”해 보면 속물이라고 적대시할 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덧붙인다. 이기적 속물들도 따지고 보면, “김해동”처럼 자기의 “부하”를 사랑하거나, “정병일”처럼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애쓰고 있는 사람들이므로 비난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시금치밭”에 앉는 “흑나비”와 “주홍나비”처럼 자신의 “과거”와 “미래”가 “숨바꼭질”만 한다고 말한다. “과거”에 세계시민으로서 추구했던 보편적 정신과 가장으로서 “미래”를 위한 개별적 생활 어느 하나에 안주하지 말고, 단호한 절제를 통해 양극 사이에서 “숨바꼭질”(「너를 잃고」) 하듯이 끊임없이 이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적이 어디에 있느냐?”, “적은 꼭 있어야 하느냐?”라고 묻는 것도 “적이 분명히 존재했던 혁명의 무상함에 대해 반발한 것”이 아니라, 이제는 개별적 생활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과거”처럼 이기적인 속물이라며 적대시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시금치밭에 앉는 흑나비와 주홍나비모양으로
나의 과거와 미래가 숨바꼭질만 한다
「敵이 어디에 있느냐?」
「敵은 꼭 있어야 하느냐?」
순사와 땅주인에서부터 過速을 범하는 運轉手에까지
나의 敵은 아직도 늘비하지만
어제의 敵은 없고
더운 날처럼 어제의 敵은 없고
더워진 날처럼 어제의 敵은 없고 - 「敵」 부분(초판:198)
마지막 연에서는 아직도 자신의 “적”이 늘비하지만 “더운 날”처럼 “어제의 적”은 없다는 말을 반복하면서 시를 마무리한다. 이것은 “순사”, “땅주인”, “과속을 범하는 운전수”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적”들이 아직도 즐비하지만, “어제” 적대시했던 “적”, 즉 가족의 생활난을 해결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을 이기적 속물이라며 적대시하지는 않겠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이제부터는 “과거”의 보편적 정신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미래”의 개별적 생활도 추구하면서, 단호한 절제를 통해 양극 사이를 끊임없이 이행하겠다는 것이다.
이후 「사랑의 변주곡」(1967)에서는 개별성과 보편성 사이를 끊임없이 이행하려는 절제가 직접적으로 나타난다. 화자는 속물적 “욕망”의 “입” 속에서 보편적 정신의 핵심인 “사랑”을 발견하겠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도시의 끝”에는 사그러져 가는 “라디오” 소리가 “사랑”처럼 들리고, 그 소리가 지워지는 “강”이 흐르고, 그 강 건너에 “쪽빛 산”이 있다고 덧붙인다. 이기적 욕망을 추구하는 도시와 사랑이 있는 자연 사이를 이행하면서 균형을 추구하겠다는 것이다.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 都市의 끝에
사그러져가는 라디오의 재갈거리는 소리가
사랑처럼 들리고 그 소리가 지워지는
강이 흐르고 그 강 건너에 사랑하는
암흑이 있고 三월을 바라보는 마른나무들이
사랑의 봉오리를 준비하고 그 봉오리의
속삭임이 안개처럼 이는 저쪽에 쪽빛
산이
사랑의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우리들의
슬픔처럼 자라나고 도야지우리의 밥찌끼
같은 서울의 등불을 무시한다
이제 가시밭, 덩쿨장미의 기나긴 가시가지
까지도 사랑이다 - 「사랑의 變奏曲」 부분(초판:271-272)
그는 강 건너에 “사랑”하는 “암흑”이 있고, “삼월”을 바라보는 “마른 나무”들이 사랑의 “봉오리”를 준비한다고 하면서, “봄밤”에는 도시를 떠나 자연 속에서 사랑을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사랑의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쪽빛 산”이 우리들의 “슬픔”처럼 자라나고, “도야지우리”의 “밥찌끼” 같은 “서울의 등불”을 무시한다고 말한다. 봄밤에는 도시에서 이기적 욕망을 추구하느라 쌓인 슬픔을 달래기 위해 “기차”를 타고 “사랑”이 있는 “산”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이제” “가시밭”, “덩쿨장미”의 기나긴 “가시”까지도 “사랑”이라고 하면서, “사랑의 음식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 때까지 “사랑의 숲”이 벅차게 밀려닥친다고 말하는 것도 봄밤에는 세계시민으로서 보편적 정신인 사랑을 추구해야 한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결국 그는 “욕망”의 “입”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는 방법으로 낮에는 문명을 상징하는 “라디오” 소리가 들리는 “서울”에서 개별적 생활을 위해 일하고, 밤에는 “사랑의 음식”인 사랑을 구하기 위해 “쪽빛 산”에서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는 식으로 시공간의 무한한 이행을 제시한다고 볼 수 있다.
이어서 그는 “난로 위에 끓어오르는 주전자의 물이 아슬아슬하게 넘지 않는 것처럼” “사랑의 절도(節度)”가 열렬하다고 말한다. 욕망과 사랑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려면, 낮에는 사랑을 잊어버리고 “열렬”히 개별적 생활을 추구하다가, 밤에는 욕망을 잊어버리고 “열렬”히 인간적 사랑을 추구하는 식으로 시간적 상황에 알맞게 행동하는 “절도”가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그가 “간단도 사랑”이라고 하면서, “암흑” 속을 “사랑이 이어져 가는 밤”을 안다고 말하는 것은 잠시 그치거나 끊어짐을 뜻하는 “간단(間斷)”이라는 말처럼 인간적 사랑이 낮에는 잠시 중단되었다가 밤에는 다시 이어지는 “중단과 계속”(「꽃2」)을 반복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눈을 떴다 감는 기술”이 “사랑을 만드는 기술”이라는 말도 낮에는 “서울”에서 눈을 뜨고 가족을 위한 이기적 욕망에 충실하다가도 밤에는 “쪽빛 산”에서 눈을 감고 인간적 사랑을 추구하는 중용적 절제가 “욕망의 입”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는 “기술”이라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난로 위에 끓어오르는 주전자의 물이 아슬
아슬하게 넘지 않는 것처럼 사랑의 節度는
열렬하다
間斷도 사랑
이 방에서 저 방으로 할머니가 계신 방에서
심부름하는 놈이 있는 방까지 죽음 같은
암흑 속을 고양이의 반짝거리는 푸른 눈망울처럼
사랑이 이어져가는 밤을 안다
그리고 이 사랑을 만드는 기술을 안다
눈을 떴다 감는 기술―불란서 혁명의 기술
최근 우리들이 四一九에서 배운 기술
그러나 이제 우리들은 소리내어 외치지 않는다 - 「사랑의 變奏曲」 부분(초판:271-272)
그는 이런 사랑의 기술을 “불란서 혁명”과 “4·19” 혁명에서 배웠다고 하면서, 이제 소리내어 외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것은 「가다오 나가다오」(1960)에서 “4월 혁명”이 “끝나고 또 시작되고”를 무수히 반복한다고 말했듯이 사랑도 혁명처럼 시공간적 상황에 따라 중단과 계속을 반복하기 마련이므로 굳이 소리내어 외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가족의 생활난을 해결하려는 욕망을 전적으로 부정하고 인간적 사랑만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낮과 밤이라는 시간적 상황에 따라 “절도” 있게 양극 사이를 끊임없이 이행하는 다원주의가 바로 사랑의 기술이라는 것이다.
시의 후반부에서는 “복사씨와 살구씨와 곶감씨의 아름다운 단단함이여”, “고요함과 사랑이 이루어놓은 폭풍의 간악한 신념이여”라고 외친다. 여기서 “씨”는 과일에 “씨”가 있어야 영원히 생명을 지속할 수 있듯이 인간이 영원히 존속할 수 있도록 해주는 “사랑”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간악한 신념”은 성격이 곧아 거리낌 없이 바른말을 한다는 의미로 사랑이 “간악”(侃諤)하게 지켜야 할 보편적 “인류의 신념”이라는 의미로 이해된다. 그는 산문 「새로움의 모색-쉬페르비엘과 비어렉」(1961)에서 “현대시는 이제 그 ‘새로움의 모색’에 있어서 역사적인 경간(徑間)을 고려에 넣지 않으면 아니 될 필연적 단계”에 이르렀다고 하면서, “역사적 지주는 이제 개인의 신념이 아니라 인류의 신념을, 관조가 아니라 실천하는 단계”를 밟아 올라가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로터리의 꽃의 노이로제-시인과 현실」(1967)에서도 “진정한 시는 자기를 죽이고 타자가 되는 사랑의 작업이며 자세인 것”(3판:280)이라고 강조했다. 현대는 개별적인 욕망을 추구하는 “개인의 신념”을 죽이고, 보편적인 ‘인류의 신념’으로서의 “사랑”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봄베이도 뉴욕도 서울도 마찬가지다 / 신념보다 더 큰 / 내가 묻혀사는 사랑의 위대한 도시에 비하면 / 너는 개미이냐”라고 말하는 것도 개별적인 욕망을 추구하는 “개인의 신념”으로 만들어진 물질문명의 도시보다 “인류의 신념”인 “사랑”을 추구하는 도시가 더 위대하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개별적으로 “욕망”을 추구하는 물질문명의 도시를 “복사씨와 살구씨와 곶감씨”처럼 아름답고 단단한 보편적 사랑을 추구하는 사랑의 도시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개별적 생활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아들에게 “광신(狂信)”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사랑을 알 때까지 자라”라고 주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적 사랑만을 “광신”하지 말고 “사랑”을 알기 전까지는 가족의 생활난을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인류의 종언의 날”이나, “술”을 다 마시고 난 날, 미대륙에서 “석유”가 고갈되는 날은 물론이고 그 전에 “도시의 피로”에서 이 “단단한 고요함”으로 상징되는 “사랑”의 필요성을 자연스럽게 배울 것이라고 단언한다. 지금은 당면한 생활난을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지만, 생활의 피로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인간적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을 자연히 알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아들아 너에게 狂信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랑을 알 때까지 자라라
人類의 종언의 날에
너의 술을 다 마시고 난 날에
美大陸에서 石油가 고갈되는 날에
그렇게 먼 날까지 가기 전에 너의 가슴에
새겨둘 말을 너는 都市의 疲勞에서
배울 거다
이 단단한 고요함을 배울 거다
복사씨가 사랑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할 거다!
복사씨와 살구씨가
한 번은 이렇게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다!
그리고 그것은 아버지 같은 잘못된 시간의
그릇된 瞑想이 아닐 거다 - 「사랑의 變奏曲」 부분(초판:272-273)
그는 언젠가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것이라고 외치면서, 그것이 “아버지” 같은 “잘못된 시간”의 “그릇된 명상”이 아닐 것이라는 말로 시를 마무리한다. 이것은 생활난이 극심한 “아버지”의 시대에는 인간적 사랑을 추구하는 것이 “그릇된” 명상일지도 모르지만, 미래 “아들”의 시대에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지금은 가족의 생활난을 해결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인 “잘못된 시간”이지만, 미래에는 인간적 사랑을 추구하는 시간이 반드시 도래할 것이라는 확신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그가 “욕망”의 “입”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는 방법으로 제시한 것은 욕망과 사랑, 개별적 생활과 보편적 정신 어느 한 극점에 안주하지 않고 “절도”를 지키면서 양극 사이를 끊임없이 이행하는 것이다. 제목이 “사랑의 변주곡”인 것도 변주곡(變奏曲, variation)이 하나의 주제가 되는 선율을 바탕으로 선율·리듬·화성 등이 여러 가지로 변형되는 것처럼 “사랑”도 시공간적 상황에 따라 무한히 바뀌는 변주곡과 같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가장으로서의 개별적 생활과 세계시민으로서의 보편적 정신 사이를 끊임없이 이행하는 다원적 세계시민주의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후 「성(性)」(1968)에서도 개별성과 보편성 사이를 끊임없이 이행하려는 절제를 찾아볼 수 있다. 화자는 “그것”과 하고 와서 첫 번째로 “여편네”와 하던 날 여편네가 만족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그 이유로 자신이 “섹스”를 “개관(槪觀)”, 즉 대충 살펴보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그것”을 보편적 정신의 상징으로, “여편네”를 개별적 생활의 상징으로, “섹스”를 사랑으로 보면, 그동안 과도하게 보편적 정신만 사랑하다 보니 개별적 생활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상징적인 고백으로 볼 수 있다. 자신이 정신(그것)을 “혓바닥이 떨어져 나가게” 열렬히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생활(여편네)을 위해 “어지간히 다부지게” 애를 써도 가족의 생활난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하고 하고 와서 첫 번째로 여편네와
하던 날은 바로 그 이튿날 밤은
아니 바로 그 첫날 밤은 반 시간이 넘어 했는데도
여편네가 만족하지 않는다
그년하고 하듯이 혓바닥이 떨어져나가게
물어제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지간히 다부지게 해줬는데도
여편네가 만족하지 않는다
이게 아무래도 내가 저의 섹스를 槪觀하고
있는 것을 아는 모양이다
똑똑히는 몰라도 어렴풋이 느껴지는
모양이다
나는 섬찍해서 그전의 둔감한 내 자신으로
다시 돌아간다
憐憫의 순간이다 恍惚의 순간이 아니라
속아 사는 憐憫의 순간이다
나는 이것이 쏟고난 뒤에도 보통때보다
완연히 한참 더 오래 끌다가 쏟았다
한번 더 고비를 넘을 수도 있었는데 그만큼
지독하게 속이면 내가 곧 속고 만다 - 「性」 전문(초판:291)
그는 가난한 생활이 “섬찍해서” “그전”의 “둔감한” 가장으로 다시 돌아간다고 선언한다. 세계시민으로서 보편적 정신(그것)을 사랑하는 것이 “황홀(恍惚)의 순간”이지만, 가난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가장으로서 개별적 가족 생활(여편네)을 위해서 속아서 사는 불쌍한 “연민(憐憫)의 순간”으로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편네(개별적 가족 생활)에게로 다시 돌아와서 “보통 때”보다 완연히 한참 더 “오래” 끌다가 쏟았다고 고백하면서, 가족의 생활난을 해결하기 위해 더욱 노력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다.
그런데 그가 “지독하게” 속이면 내가 곧 속고 만다는 말로 시를 마무리하는 것은 개별적 생활(여편네)만 과도하게 추구하다 보면 보편적 정신(그것)을 완전히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경고를 스스로에게 던지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번에는 가족의 생활난 때문에 여편네(개별적 생활)에게로 돌아왔지만, “지독하게” 속여서 자신이 속고 마는 상황이 되면 다시 그것(보편적 정신)으로 돌아갈 것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해석은 그가 「반시론」(1968)에서 “나는 프티 부르주아적인 “성”을 생각하면서 부삽의 세계에 그다지 압도당하지 않을 만한 자신을 갖는다.”(3판:511)라고 말하는 것으로 뒷받침된다. “성”으로 상징되는 가족의 생활과 개인적 욕망을 추구하는 프티 부르주아적 태도는 “부삽”으로 상징되는 보편적 정신 못지않게 가치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결국 여기서 그는 “정신과 육체의 이분법을 극복”하고, 보편적 정신(그것)과 개별적 생활(여편네) 사이를 끊임없이 이행할 수 있도록 중용적 절제를 실천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김수영의 시에서는 개별성과 보편성 가운데 어느 한 극점에 안주하지 않으려는 중용적 절제가 전기의 「너를 잃고」(1953), 「폭포」(1957), 「봄밤」(1957)과 후기의 「적(敵)」(1962), 「사랑의 변주곡」(1967), 「성(性)」(1968) 등 여러 작품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그는 개별성과 보편성 사이를 끊임없이 이행하는 다원적 세계시민주의를 전기부터 후기까지 일관성 있게 제시했던 것이다.
- 이건주 문학박사/K-문학연구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