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의 시에 나타난 다원적 세계시민주의 연구

절제를 추구하는 분열적 세계시민

by 이건주

김수영은 1950년대 시에서부터 개별성과 보편성 가운데 어느 한 극점에 안주하려는 감정을 절제하고, 양극 사이를 끊임없이 이행하는 분열적 세계시민을 제시했다. 그는 양극 사이에서 중용을 추구하는 다원적 세계시민이 양자택일적 이분법에 사로잡혀 있는 세인(世人)들에게는 비정상적이고 분열적인 존재로 인식될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적 통념에 맞서서 중용적 절제를 통해 양극 사이를 끊임없이 이행하는 분열적 세계시민을 제시했던 것이다.


먼저, 「하루살이」(1956)에서 개별성과 보편성 사이를 끊임없이 이행하는 분열적 세계시민이 나타난다. 화자는 잠시 “일손”을 멈추고 쉬면서 “무엇”을 생각한다. 그리고 “살아 있는 보람”이 “이것”뿐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이것”은 잠시 일손을 멈추고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시간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가족의 생활난을 해결하기 위해서 일하다가 잠시 쉬면서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는 것이 유일한 “보람”이라는 것이다. 그가 “하루살이의 광무(狂舞)여”라고 외치는 이유는 “하루살이”가 일과 휴식 사이를 끊임없이 이행하는 분열적 존재라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그는 이를 “광무(狂舞)” 즉, 미친 춤이라고 표현하면서 양극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는 다원적 존재가 현실에서는 비정상적인 분열적 존재로 인식되고 있음을 드러낸다.

나는 일손을 멈추고 잠시 무엇을 생각하게 된다

―살아있는 보람이란 이것뿐이라고―

하루살이의 광무(狂舞)여

하루살이는 지금 나의 일을 방해(妨害)한다

―나는 확실히 하루살이에게 졌다고 생각한다―

하루살이의 유희(遊戱)여 - 「하루살이」 부분(초판:106)

그는 “지금” 자신의 일을 “방해”하는 하루살이에게 “확실히” 졌다고 하면서, 하루살이처럼 일과 휴식 사이를 이행하는 “유희(遊戲)”를 즐기지 못하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한다. 「달나라의 장난」(1953)에서 “서서 돌고 있는” 다원적 팽이가 일하느라 돌기만 하는 자신을 보면서 “비웃는” 듯하다고 느꼈듯이 여기서는 생활난을 해결하기 위해 쉬지도 못하고 일만 하고 있으므로 일과 휴식 사이를 “유희”처럼 쉽게 오가는 하루살이에게 졌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가 하루살이를 분열적 존재로 보는 이유는 “소리없이 기고 소리없이 날으다 / 되돌아오고 되돌아가는” 하루살이의 “반복”이라는 말에서 분명하게 제시된다. 하루살이는 개별적 생활을 상징하는 땅을 기다가 보편적 정신을 상징하는 하늘로 날기를 무한히 반복하는 존재인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런 하루살이의 “모습”과 “몸짓”을 매우 자연스럽다고 감탄한다. 양자택일식의 이분법이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중용적 절제를 통해 양극 사이를 끊임없이 이행하는 다원적 삶이 비정상적으로 인식되지만, 사실 이런 분열적 삶은 하루살이에서 보듯이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나의 머리 위의 천장”에서 “너의 소리”가 들린다고 하면서, “지금”은 개별적 생활과 돈만 생각하는 자신의 “머리” 위에 있는 “천장”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하루살이처럼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고 싶다는 마음을 드러낸다.


마지막 연에서는 보편적 정신을 상징하는 “불” 옆으로 모여들다가 어느새 변신하여 개별적 생활을 상징하는 “벽”을 사랑하기도 하는 하루살이의 분열적 광무(狂舞)를 “황홀”하다고 찬탄한다. 그리고 하루살이에게 “감정”을 잊어버린 “시인”인 자신에게 “시각”을 쉬게 하라고 주문한다. 오직 하루만 살 수 있기 때문에 개별적 생활에 집중해야 하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광무(狂舞)를 보여주는 하루살이처럼 자신도 생활난이 극심한 상황에서 “미친놈”(「시」) 소리를 듣더라도 보편적 정신도 함께 추구하겠다는 것이다. 결국 “하루살이”는 “한계 상황에 도전”하는 존재가 아니라, 가장으로서의 개별적 생활과 세계시민으로서의 보편적 정신 사이를 끊임없이 이행하는 분열적 세계시민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불 옆으로 모여드는 하루살이여

벽을 사랑하는 하루살이여

感情을 잊어버린 詩人에게로

모여드는 모여드는 하루살이여

―나의 視覺을 쉬이게 하라―

하루살이의 恍惚이여 - 「하루살이」 부분(초판:106)

이후 「생활」(1959)에서도 개별성과 보편성 사이를 끊임없이 이행하는 분열적 세계시민이 계속 나타난다. 화자는 “시장 거리의 먼지 나는 길” 옆 좌판 위에 있는 “호콩 마마콩”을 보면서 웃음을 터트린다. 여기서 시장 거리는 “모든 것”을 제압하는 개별적 생활을 상징하는 공간이고, “호콩 마마콩”은 보편적 정신인 “애정”을 상징하는 자연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아등바등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꼭 바글바글 모여 쌓인 호콩, 마마콩” 같아서 “허탈한 웃음”을 짓는 것이 아니라, 현실 공간에서도 개별적 “생활”에 제압당하지 않고 솟아올라 있는 보편적 “정신”을 발견하면서 기뻐하고 있는 것이다.

市場거리의 먼지나는 길옆의

좌판 위에 쌓인 호콩 마마콩 멍석의

호콩 마마콩이 어쩌면 저렇게 많은지

나는 저절로 웃음이 터져나왔다

모든 것을 制壓하는 生活 속의

愛情처럼

솟아오른 놈

(幼年의 奇蹟을 잃어버리고

얼마나 많은 歲月이 흘러갔나 - 「生活」 부분(초판:121)

그는 사람에게는 누구나 “호콩 마마콩”처럼 애정의 시기인 “유년기”가 있다고 하면서, 가족인 “여편네와 아들놈”을 데리고 “낙오자”처럼 걸어가면서도 자꾸 웃는다. 자신은 가족적 “생활”에 사로잡히지 않고 “콩”과 “유년기”로 상징되는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위와 생활”의 “극점”을 돌아서 “또 하나의 생활”의 좁은 골목 속으로 들어서면서 이 골목이라고 생각하며 무릎을 친다. “콩”이나 “유년기”처럼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는 “무위(無爲)”의 “극점”과 개별적 “생활”의 “극점”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또 하나의 생활”인 다원적 생활을 발견한 것이다.

無爲와 生活의 極點을 돌아서

나는 또 하나의 生活의 좁은 골목 속으로

들어서면서

이 골목이라고 생각하면서 무릎을 친다

生活은 孤絶이며

悲哀이었다

그처럼 나는 조용히 미쳐간다

조용히 조용히…… - 「生活」 부분(초판:121)

마지막 연에서 그가 “생활”을 “고절(孤節)”, “비애(悲哀)”라고 규정하는 것은 이미 「달나라의 장난」(1953)에서 “서서 돌고 있는” 다원적 팽이를 “생각하면 서러운 것”이라고 했듯이 생활의 골목과 무위의 골목 사이에 있는 다원적 생활이 어느 한 “극점”에 안주할 수 없으므로 외롭고 슬픈 길이라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그가 “조용히 미쳐간다”라는 말을 반복하는 것도 생활과 정신 사이를 끊임없이 이행하는 다원적 삶은 어느 한 극점에 안주하는 세인(世人)들에 의해 미쳤다는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하지만 그는 “조용히 조용히……”를 반복하면서 가장으로서의 개별적 생활과 세계시민으로서의 보편적 정신 사이를 끊임없이 이행하는 분열적 세계시민의 길을 걸어가겠다는 의지를 드러낸다.


한편, 김수영은 후기인 1960년대 시에서도 개별성과 보편성 가운데 어느 한 극점에 안주하려는 감정을 절제하고, 양극 사이를 끊임없이 이행하는 분열적 세계시민을 지속적으로 제시했다. 그는 양극 사이에서 중용을 추구하는 다원적인 세계시민이 양자택일적 이분법에 사로잡혀 있는 세인(世人)들에게는 비정상적이고 분열적인 존재로 인식될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적 통념에 맞서서 중용적 절제를 통해 양극 사이를 끊임없이 이행하는 분열적 세계시민을 일관성 있게 제시했던 것이다.


먼저, 「술과 어린 고양이-신귀거래4」(1961)에서 개별성과 보편성 사이를 끊임없이 이행하는 분열적 세계시민이 나타난다. 화자는 아무리 바빠도 “낮”에는 “일손”을 쉰다고 한잔, “저녁”에는 “어둠”을 맞으려고 또 한잔 마시는 거라고 말한다. 이것은 낮에는 일을 하다가 잠시 쉬면서 마시고, 저녁에는 일이 끝났으니 “어둠”을 맞으려고 다시 마신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그는 산문 「요즈음 느끼는 일」(1963)에서 “술을 마신다는 것은 사랑을 마신다는 것과 마찬가지 의미”라고 하면서, “누가 무어라고 해도, 또 혁명의 시대일수록 나는 문학하는 젊은이들이 술을 더 마시기를 권장합니다. 뒷골목의 구질구레한 목로집에서 값싼 술을 마시면서 문학과 세상을 논하는 젊은이들의 아름다운 풍경이 보이지 않는 나라는 결코 건전한 나라라고 볼 수 없습니다.”(3판:51)라고 말했다. 아무리 바빠도 일만 하지 말고 보편적 정신인 사랑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낮에는 일손을 쉰다고 한잔 마시는 게라

저녁에는 어둠을 맞으려고 또 한잔 마시는 게라

먼 밭을 바라보며 마늘장아찌에

취하지 않은 듯이 취하는 게라

지장이 없느니라

아무리 바빠도 지장이 없느니라 술 취했다고 일이 늦으랴

취하면 취한 대로 다 하느니라

쓸데없는 이야기도 주고받고 쓸데없는 일도

찾아보면 있느니라」

내가 내가 취하면

너도 너도 취하지

구름 구름 부풀 듯이

기어오르는 파도가

제일 높은 砂岸에

닿으려고 싸우듯이

너도 나도 취하는

中庸의 술잔

바보의 家族과 運命과

어린 고양이의 울음

니야옹 니야옹 니야옹

술 취한 바보의 家族과 運命과

술 취한 어린 고양이의 울음

역시

니야옹 니야옹 니야옹 니야옹 - 「술과 어린 고양이」 전문(초판:179)

그는 “구름” 부풀 듯이 기어오르는 “파도”가 제일 높은 “사안(砂岸)”에 닿으려고 싸우듯이 “너도 나도” 취하는 것을 “중용(中庸)의 술잔”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중용”은 가족의 생활난을 해결하기 위해 지나치게 일만 하지 말고, 이를 절제하고 쉬면서 “구름”, “파도” 같은 보편적 정신과 균형을 유지하라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그는 생활과 정신을 고차원적으로 종합하는 변증법이 아니라, 양극 사이에서 중용적 균형과 절제를 추구하는 다원주의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연에서 그는 “바보의 가족”과 “운명”, “어린 고양이”의 울음소리를 제시한다. 여기서 “고양이”는 보들레르의 시 「고양이」처럼 “아내”를, “어린 고양이”는 어린 자식들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가장인 자신이 “바보”처럼 생활 능력이 없어서 “가족”들이 가난하게 살고 있는 운명을 한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술취한 바보”의 가족과 “어린 고양이”의 울음소리로 시를 마무리한다. 이것은 비록 생활난을 해결하지 못해서 아이들이 울고, “바보” 소리를 듣더라도 술에 취해서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는 일은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아무리 가족의 생활난이 심하더라도 낮에는 개별적 생활을 추구하다가도 이를 절제하고 밤에는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는 중용을 실천하겠다는 것이다. 결국 “술 취한 바보”는 가장으로서의 개별적 생활과 세계시민으로서의 보편적 정신 사이를 끊임없이 이행하는 분열적 세계시민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같은 해의 「시」(1961)에서도 개별성과 보편성 사이를 끊임없이 이행하는 분열적 세계시민을 찾아볼 수 있다. 화자는 “변화”가 끝났으니 어서 “일”을 하라고 주문한다. 겨울이 끝나고 “미지근한 물”이 “논”에 고이는 여름이 왔으니 “논”, “초가집”이 있는 농촌에서는 “장기”, “물소”, “수레”를 가지고 개별적 생활을 위해 농사일을 시작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또” 일을 하라고 말하는 것은 “시간”이 다시 흘러서 하얀 “편지 봉투”가 누렇게 변하듯이 “땅”이 변하고, 여름이 끝나서 “논”도 얼어붙는 겨울이 왔으니, “대숲”, “푸른 하늘”로 상징되는 보편적 정신을 다시 추구하라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그는 “수레”에 “기름”을 주라고 반복하면서 여름 동안 일했던 “수레”가 “욕심의 돌” 때문에 털털거리게 되었으니, 겨울에 정신이라는 “기름”을 주어야 한다고 주문한다. 그리고 “쉬었다 가든 거꾸로 가든 모로 가든” 어서 또 가라고 하면서, 시간이 흘러서 다시 여름이 오면, 겨울에 쉬었으니 다시 또 일하러 나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휴식의 계절인 겨울 동안 쉬면서 보편적 정신을 추구했으니, 변화가 끝나서 노동의 계절인 여름이 오면 개별적 생활을 위해 다시 일하러 나가라는 것이다.

어서 일을 해요 변화는 끝났소

어서 일을 해요

미지근한 물이 고인 조그마한 논과

대숲 속의 초가집과

나무로 만든 장기와

게으르게 움직이는 물소와

(아니 물소는 호남 지방에서는 못 보았는데)

덜컥거리는 수레와 - 「詩」 부분(초판:193)

그가 “미친놈” 본으로 어서 “또” 가라고 말하는 것은 “미친놈”으로 오해를 받더라도 어디든 자유롭게 오가는 “실 같은 바람”처럼 생활과 정신 사이를 끊임없이 이행하라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미친놈” 소리를 듣더라도 계절의 변화라는 “대자연의 법칙”(「기도」)에 따라서 개별적 생활과 보편적 정신 사이를 끊임없이 이행하는 분열적인 인간이 되라는 것이다.


마지막 연에서 “나이”와 “시(詩)”를 연결하는 것은 세계시민으로서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는 시만이 아니라, 가장으로서 개별적 생활도 함께 추구해야 하는 나이가 되었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이제 이기적인 “욕심”을 상징하는 “더러운 일기”는 찢어버릴 수 있지만, “재주”를 부릴 줄 알고, “배짱”도 생겨가는 무서운 “나이”가 되었으니, 생활의 여유를 추구하는 “동그랗게 되어 가는” 시, “배부른 시”(「반시론」)를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가 “사전의 시”, “사전”이 앞을 가는 “변화의 시”를 제시하는 것도 시가 언어의 법칙인 사전을 지켜야 하듯이 인간도 계절의 “변화”라는 대자연의 법칙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는 “시와 시 아닌 것 사이”에서 “시”로 돌아가겠다는 것이 아니라, “미친놈” 소리를 듣더라도 가장으로서의 개별적 생활과 세계시민으로서의 보편적 정신 사이를 끊임없이 이행하는 분열적 세계시민을 추구하겠다는 것이다.

더러운 일기는 찢어버려도

짜장 재주를 부릴 줄 아는 나이와 詩

배짱도 생겨가는 나이와 詩

정말 무서운 나이와 詩는

동그랗게 되어가는 나이와 詩

사전을 보면 쓰는 나이와 詩

사전이 詩 같은 나이의 詩

사전이 앞을 가는 변화의 詩

감기가 가도 감기가 가도

줄곧 앞을 가는 사전의 詩

詩. - 「詩」 부분(초판:194)

이후 「절망」(1962)에서도 개별성과 보편성 사이를 끊임없이 이행하는 분열적 세계시민이 계속 나타난다. 화자는 나날이 새로워지는 “괴기한 청년”을 제시한다. 그 청년은 “일본”, “이북”, “삼랑진” 등 “세계의 도처”에서 나타날 수 있는 인물로서 당시에 금기시되던 이북도 포용할 수 있고, “미인, 시인, 사무가, 농사꾼, 상인” “야소(예수)” 등 다양한 인물로 끊임없이 변신하는 인물이다. 그는 이런 “괴기한 인물”을 “천수천족수(千手千足獸)”라고 하면서, 불교에서 자비와 구원 범위가 무궁무진한 천수관음(千手觀音)처럼 긍정적인 인물로 제시한다.

나날이 새로워지는 怪奇한 청년

때로는 일본에서

때로는 以北에서

때로는 三浪津에서

말하자면 세계의 도처에서 나타날 수 있는 千手千足獸

美人, 詩人, 事務家, 농사꾼, 商人, 耶蘇이기도 한

나날이 새로워지는 괴기한 인물

흰 쌀밥을 먹고 갔는데 보리알을 먹고 간 것 같고

그렇게 피투성이가 되어 찾던 만년필은

妻의 백 속에 숨은 듯이 걸려 있고

말하자면 내가 찾고 있는 것은 언제나 나의 가장 가까운

내 곁에 있고

우물도 사닥다리도 愛兒도 거만한 문표도

내가 犯人이 되기 전에

(벌써 오래전에!)

犯人의 것이 되어 있었고

그동안에도

그뒤에도 나의 詩는 영원한 未完成이고 - 「絶望」 전문(초판:201)

그는 개별적 생활의 여유를 상징하는 “흰 쌀밥”과 안빈낙도라는 보편적 정신을 상징하는 “보리알”을 구별하지 않고 모두 긍정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시인이자 세계시민으로서 “만년필”로 상징되는 “영원한” 정신을 추구하고 있지만, 그것이 문명과 생활을 상징하는 “백(bag)” 속에 걸려 있다고 하면서, 생활과 정신 모두 “가장 가까운” “곁”에 두고 있다고 말한다. 또한 “우물”, “사닥다리”, “애아(愛兒)”, “거만한 문표”로 상징되는 개별적 생활을 추구하다가 죄를 저지른 “범인(犯人)”이 되기 전에 이미 그것들이 “범인의 것”이 되어 있었다고 말한다. 이것은 시인임에도 불구하고 오래전부터 개별적 생활을 위해 애쓰는 속물적인 범죄를 저질러 왔다고 고백하면서, 자신은 생활과 정신을 모두 긍정하는 다원주의자임을 강조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결국 나날이 새로워지는 “괴이한 청년”은 미인, 시인, 농사꾼, 야소(예수)처럼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는 인물과 사무가, 상인처럼 개별적 생활을 상징하는 인물 사이를 매일매일 이행하면서 무한히 변신하는 분열적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 연에서 그가 자신의 시를 “영원한 미완성”이라며 제목처럼 “절망”하는 이유도 그의 시가 생활과 정신 어느 한 극점에 안주하지 않고 양극 사이를 끊임없이 이행하기 때문이다. 그는 개별적 생활과 보편적 정신 사이를 끊임없이 이행하는 분열적 세계시민을 세인(世人)들이 “괴기한 인물”이라며 비난하는 것에 “절망”하면서도 이에 굴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김수영의 시에는 개별성과 보편성 사이를 끊임없이 이행하는 분열적 세계시민이 전기의 「하루살이」(1957), 「생활」(1959)과 후기의 「술과 어린 고양이」(1961), 「시」(1961), 「절망」(1962) 등 여러 작품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그는 개별성과 보편성 어느 한 극점에 안주하지 않고, 중용적 절제를 통해 양극 사이를 끊임없이 이행하는 분열적 세계시민을 전기부터 후기까지 일관성 있게 제시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김수영의 시 작품에 나타난 긴장의 해법을 중용(中庸)적 균형과 절제를 중심으로 살펴본 결과, 그가 개별성과 보편성 사이의 긴장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양극을 고차원적으로 종합하는 변증법이 아니라, 양극 사이에서 중용을 추구하는 다원적 세계시민을 지속적으로 제시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따라서 김수영은 개별성과 보편성 사이에서 중용을 추구하는 다원적 세계문학을 전기부터 후기까지 일관성 있게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 이건주 문학박사/K-문학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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