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의 시에 나타난 다원적 세계시민주의 연구

중용의 실천 방법으로서 시공간의 순환

by 이건주

김수영이 산문 「반시론」(1968)에서 “귀납과 연역, 내포와 외연, 비호(庇護)와 무비호, 유심론과 유물론, 과거와 미래, 남과 북, 시와 반시의 대극의 긴장”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제시한 “무한한 순환”은 그의 시에서 시간의 순환과 공간의 순환으로 구체화된다. 이것은 그가 『중용(中庸)』에 나오는 ‘중절(中節)’, ‘시중(時中)’을 개별성과 보편성 사이에서 중용을 추구하는 다원적 세계시민-되기의 실천 방법으로 변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중용(中庸)』 제1장에는 “기쁨·노여움·슬픔·즐거움의 감정이 드러나지 않은 것을 ‘중’이라 하고, 드러나서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을 ‘화’라 한다. ‘중’이라는 것은 천하의 위대한 근본이고, ‘화’라는 것은 천하에 통달되는 ‘도’인 것이다.”(喜努哀樂之未發 謂之中 發而皆中節 謂之和 中也者 天下之大本也 和也者 天下之達道也)라는 말이 나온다. 이기동은 “중절(中節)”에서 절(節)이 “마디”를 의미한다고 하면서, “공간적으로 독립된 물체 하나하나가 모두 “마디”이며, 시간적으로는 구별할 수 있는 시간의 단위 하나하나가 모두 마디”라고 설명했다. 이것은 대립적인 양극 가운데 어느 한 극점에 머무르지 않고, 시간과 공간에 따라 양극 사이를 무한히 순환하는 것이 “중절(中節)”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이와 함께『중용』제2장에는 “군자는 중용을 지키고 소인은 중용에 반하는 행동을 한다. 군자는 중용에 대하여 군자답게 때에 알맞게 행동하고, 소인은 중용에 대하여 소인답게 아무런 거리낌도 없는 짓을 한다.(君子中庸 小人反中庸 君子之中庸也 君子而時中 小人之反中庸也 小人而無忌憚也)라는 말도 있다. 여기서 “시중(時中)”은 시간적 상황만이 아니라 공간적 상황도 내포한다고 볼 수 있다. 김학주는 “중용을 지키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때에 알맞게 행동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때는 시간뿐만 아니라 사람의 처지나 환경을 전부 포함하는 말”이므로 시중(時中)은 “사회의 법률이나 도덕 또는 주위의 모든 사정에 가장 알맞게 행동한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김용옥도 “중(中)”은 기하학적 미들(middle)이 될 수 없으며, 어떻게 시공적 상황에 알맞게 그 중(中)을 발현하느냐 하는 ‘시중(時中)’의 문제로 귀착될” 수밖에 없다고 하면서, “시중”을 시공간적 상황에 알맞게 행위하는 것으로 풀이했다.


신정근도 시중에서 시(時)는 “좁은 의미로 시간을 나타내지만 넓은 의미로 시간과 공간이 결합된 특정한 시대”를 나타낸다고 하면서, “시대가 사람에게 작용하는 영향력이란 측면으로 시(時)는 삶의 조건, 환경”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시중은 시대의 변화를 인정하지 않는 “고수(固守)”나 “수구(守舊)”와 호응될 수 없고, 시대에 따라 변화나 적응과 어울리게 된다고 강조했다.


한편, 들뢰즈와 가타리는 다양체의 모델인 리좀(Rhizome)을 “시작하지도 않고 끝나지도 않”으며, “언제나 중간에 있으며 사물들 사이에 있고 사이-존재이고 간주곡”이라고 하면서, “나무는 혈통 관계이지만 리좀은 결연 관계”라고 설명했다. 또한 “나무는 “-이다(être)”라는 동사를 부과하지만, 리좀은 “그리고…그리고…그리고…”라는 접속사를 조직으로 갖는다고 하면서, “이 접속사 안에는 <이다>라는 동사를 뒤흔들고 뿌리뽑기에 충분한 힘”이 있다고 강조했다.


특히 그들은 리좀을 “중앙 집중화되어 있지 않고, 위계도 없으며, 기표작용을 하지도 않고, <장군>도 없고, 조직화하는 기억이나 중앙 자동장치도 없으며, 오로지 상태들이 순환하고 있을 뿐인 하나의 체계”로 규정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개별성과 보편성 사이에서 어느 한 극점에 머물러 있는 것은 “위계”에 따라 중앙 집중화되어 있는 “나무 유형의 계통”이라고 할 수 있는 반면에, 양극 사이를 무한히 순환하는 것은 “오로지 상태들이 순환하고 있을 뿐”인 리좀처럼 다원주의적 체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김수영이 제시한 시간의 순환과 공간의 순환은 개별성과 보편성 사이에서 중용을 추구하는 다원적 세계시민-되기의 실천 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


김수영은 그는 여러 시와 산문에서 시간의 순환을 매우 다양하게 제시했다. 특히 산문 「생활의 극복-담뱃갑의 메모」(1966)에서는 “모순의 고민을 시간에 대한 해석으로 해결해 보는 것도 순간적이나마 재미있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이런 여유가 고민으로 생각되는 것은 우리들이 이것을 “고정된” 사실로 보기 때문이다. 이것을 흘러가는 순간에서 포착할 때 이것은 고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3판:159) 시간을 배제하고 “고정된” 사실로 보면 개별적 생활의 “여유”를 추구하는 것이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는 것과 모순되지만, “미래”라는 “시간”의 흐름으로 포착하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가 「반시론」(1968)에서 “대극의 긴장”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제시한 “무한한 순환”도 시간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어제 개별적 가족을 선택했다면 오늘은 보편적 인간을 선택하고 다시 내일은 개별적 가족을 선택하는 식으로 시간적 상황에 따라 양극 사이를 무한히 순환하는 것이므로 중용의 시중(時中)을 다원주의적으로 변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기동은 『중용(中庸)』에서 “시중(時中)”을 상반된 두 의견 가운데 어느 하나의 의견을 고집함이 없이 “때에 따라 가장 합당한 견해를 취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나아가야 할 때 나아가고, 물러나야 할 때 물러나며, 살아야 할 때 살고, 죽어야 할 때 죽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엄연석은 “시중”을 “구체적인 상황의 다원론적 시의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파악했다. 시중은 구체적인 실천을 통하여 개별적이고 특수한 상황을 포용하고자 하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다원주의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신정근도 시중(時中)에서 “때[時]가 중(中)을 만나는 것”은 중이 현실의 특정한 상황에 맞게 적용되는 것이므로 시중은 “중의 시간화이자 현실화”라고 설명했다. 특히 시중을 “반대되는 가치와 성향들이 배척되지 않고 창조적으로 종합”되는 것으로 규정하면서, “A하면서도 B하기”, “A하지도 않고 B하지도 않기”, “A하면서도 B하지 않기”의 세 가지 형식으로 구분했다.


이 가운데 “A하면서도 B하기”는 A와 B를 모두 긍정하고 특정 시간에서는 A를 하다가 다른 시간에서는 B를 하는 식으로 A와 B 사이를 무한히 순환하면서 균형을 찾아가는 것이다. 그는 “한편으로 너그러우면서 다른 한편으로 엄격하게 군다면 기우뚱한 균형이 지켜질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시중은 정(A)과 반(B)의 투쟁을 통해 고차원적 합(C)을 생성하는 변증법(A↔B⇒C)이 아니라, 합(C)의 과정을 배제하고 시간적 상황에 따라 양극 사이를 무한히 순환하는 다원주의(A↔B)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김수영의 시에서 ‘시중’은 「긍지의 날」(1953)에 나오는 “너무나 잘 아는 순환의 원리”라는 말처럼 낮과 밤, 계절의 순환 등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시「기도」(1960)에서 “물이 흘러가는 달이 솟아나는 / 평범한 대자연(大自然)의 법칙(法則)을 본받아 / 어리석을만치 소박(素朴)하게 성취한 / 우리들의 혁명(革命)”이라고 했듯이 그는 혁명도 “대자연의 법칙”에 따르는 것으로 인식했다.


특히 그의 시중은 전통적인 농촌사회에서 농사짓는 활동과 관련이 깊다. 낮에는 밭을 갈고, 밤에는 글을 읽는다는 뜻의 주경야독(晝耕夜讀)에서 낮과 밤의 순환이 나타나고, 날이 개면 논밭을 갈고 비가 오면 글을 읽는다는 의미의 청경우독(晴耕雨讀)에서 비 오는 날과 맑은 날의 순환이 나타난다. 그리고 봄에 싹을 틔우고, 여름에 기르며, 가을에 수확하고, 겨울에 저장한다는 뜻의 춘생하장(春生夏長), 추수동장(秋收冬藏)이라는 말에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순환이 나타난다.


이와 함께 김수영은 공간의 무한한 순환도 개별성과 보편성 사이에서 중용을 추구하는 다원적 세계시민-되기의 실천 방법으로서 제시했다. 그는 「시의 “뉴 프런티어”」(1961)에서는 “서울에서 염증이 나면 시골로 뛰어가지만 시골도 마찬가지.”(3판:318)라고 하면서, “서울”이라는 문명적 공간과 “시골”이라는 전통적 공간 어느 한 공간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순환하였다.


이후 1968년의 「반시론」에서는 “아우의 농장이 자연으로의 문을 열어주는 유일한 성당”이라고 하면서, 도봉산 밑의 농장이 자신의 “탈출구”라고 말했다.(3판:508) 그는 가장으로서 현실적 생활 공간에서 가족의 생활난을 해결하기 위해 애쓰다가 초월적 자연 공간으로 이동해서 세계시민으로서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는 공간의 순환을 양극 사이에서 중용을 추구하는 다원적 세계시민-되기의 실천 방법으로 제시했던 것이다.


그가 제시한 “시골”이나 “농장” 등은 푸코가 제시한 ‘헤테로토피아’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푸코는 우리가 “순백의 중립적인 공간” 안에 사는 것이 아니라, “어둡고 밝은 면이 있고, 제각기 높이가 다르며 계단처럼 올라가거나 내려오고 움푹 패고 불룩 튀어나온 구역과 단단하거나 또는 무르고 스며들기 쉬우며 구멍이 숭숭 난 지대” 등 서로 구별되는 다양한 장소에서 살아간다고 보았다. 그리고 헤테로토피아를 “안의 공간”과 절대적으로 대비되는 “바깥의 공간”이면서도 비현실적인 유토피아와도 다른 공간으로 규정했다.


푸코는 헤테로토피아를 일종의 “반(反)공간”으로서 “자기 이외의 모든 장소들에 맞서서, 어떤 의미로는 그것들을 지우고 중화시키고 혹은 정화시키기 위해 마련된 장소”라고 하면서, 그 사례로 아이들의 “정원”, “다락방”, “인디언 텐트” 등과 어른들의 “묘지”, “감호소”, “사창가”, “감옥”, “휴양촌” 등을 들었다. 그리고 실제 장소를 갖지 않는 배치인 유토피아와 달리, “현실적인 장소, 실질적인 장소이면서 일종의 반(反)배치이자 실제로 현실화된 유토피아인 장소들”인 헤테로토피아에 의해서 “실제 배치들, 우리 문화 내부에 있는 온갖 다른 실제 배치들은 재현되는 동시에 이의 제기당하고 또 전도”된다고 강조했다.

유토피아는 실제 장소를 갖지 않는 배치이다. 그 배치는 사회의 실제 공간과 직접적인 또는 전도된 유비 관계를 맺는다. 그것은 그 자체로 완벽한 사회이거나 사회에 반한다. 그러나 어쨌거나 유토피아는 근본적으로, 그리고 본질적으로 비현실적인 공간이다. 마찬가지로 아마도 모든 문화와 문명에는 현실적인 장소, 실질적인 장소이면서 일종의 반(反)배치이자 실제로 현실화된 유토피아인 장소들이 있다. 그 안에서 실제 배치들, 우리 문화 내부에 있는 온갖 다른 실제 배치들은 재현되는 동시에 이의제기당하고 또 전도된다. 그것은 실제로 위치를 한정할 수 있지만 모든 장소의 바깥에 있는 장소들이다. 이 장소는 그것이 말하고 또 반영하는 온갖 배치들과는 절대적으로 다르기에, 나는 것을 유토피아에 맞서 헤테로토피아라고 부르고자 한다.

김수영이 도시와 시골, 생활 공간과 자연 공간 사이를 무한히 순환하면서 개별성과 보편성 사이에서 중용을 추구하는 다원적 세계시민을 제시한 것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하는 유목민(nomades)과도 연결된다. 그들은 한편에는 “로마 제국의 견고한 절편성이 있고, 그와 더불어 공명의 중심과 주변, 국가, ‘팍스 로마나’, 기하학, 주둔지, 변경의 요새 지대”가 있는 반면에 다른 편에는 “지평선에는 전혀 다른 선, 유목민들의 선이 있는데, 이들은 스텝을 떠나 능동적이고 유동적인 도주를 시도하고, 도처로 탈영토화를 가져가고, 국가 없는 전쟁 기계에 의해 활기를 띠고 촉발되는 양자들의 흐름들”을 만들어낸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도시에서조차 도시를 완전히 떠나지 않고, “제자리에서의 여행”을 하는 “도시의 유목민”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도시에서조차 매끄럽게 된 채로 살 수 있고, 도시의 유목민이 될 수 있다. […] 도시 한가운데서도 낯선 여행이 있을 뿐만 아니라 제자리에서의 여행도 있다. […] 토인비가 시사하는 대로 이들 유목민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그들은 이동하지 않는다라고. 전혀 이동하지 않음으로써, 이주하지 않음으로써, 또 하나의 매끈한 공간을 보유한 채 떠나기를 거부하기 때문에, 또 정복하거나 죽을 때야 비로소 그곳을 떠나기 때문에 유목민인 것이다. 제자리에서의 여행, 이것이 모든 강렬함들의 이름이다.

김수영이 도시와 시골, 생활 공간과 자연 공간 사이의 무한한 순환을 통해 개별성과 보편성 사이에서 중용을 추구하는 다원적 세계시민을 제시한 것은 도시의 유목민-되기이자, 유목적 세계시민-되기라고 볼 수 있다. 앞으로 김수영이 개별성과 보편성 사이를 무한히 순환하는 시간의 순환과 공간의 순환을 다원적 세계시민-되기의 실천 방법으로 지속적으로 제시했다는 사실을 해당 작품에 대한 면밀한 분석을 통해 밝혀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서 그가 이론적 차원뿐만 아니라 실천적 차원에서도 다원적 세계문학을 추구했다는 사실이 입증될 것으로 기대된다.


- 이건주 문학박사/ K-문학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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