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의 시에 나타난 다원적 세계시민주의 연구

낮과 밤 사이의 순환을 통한 시중적 세계시민-되기

by 이건주

김수영은 1950년대 시에서부터 개별성과 보편성 사이에서 중용을 추구하는 다원적 세계시민-되기의 실천 방법으로 낮과 밤 사이의 순환을 제시하였다, 낮에는 밭을 갈고, 밤에는 글을 읽는다는 주경야독(晝耕夜讀)이라는 말처럼 낮에는 가장으로서 개별적 생활을 추구하다가 밤에는 세계시민으로서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는 시간의 순환을 시중(時中)적 세계시민-되기의 실천 방법으로 제시했던 것이다.


먼저, 「구슬픈 육체」(1954)에서 낮과 밤 사이의 순환이 나타난다. 화자는 불을 끄고 누웠다가 “잊어지지 않는 것”이 있어서 다시 일어났다고 말한다. 그리고 다시 불을 켜고 앉아 있으면 이미 “내가 찾던 것”은 없어졌다고 덧붙인다. 밤에는 “내가 찾던 것”을 만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낮에는 “잊어지지 않는 것”이 있어서 다시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밤에 추구했던 “아름다운 통각(統覺)”, “조화”, “영원”, “귀결”을 “잠시” 찾지 않겠다고 말한다. 휴식의 시간인 밤에는 “청춘”, “대지(大地)” 등의 정신이 “몸”과 “일체(一體)”가 되기를 원하는 “불굴의 의지”를 다졌지만, 노동의 시간인 낮에는 밤에 “잊어버린 생활”, “귀중한 생활”을 다시 찾기 위해 불을 켰다는 것이다. 그는 육체를 위한 낮의 생활도 영혼을 위한 밤의 정신과 마찬가지로 “귀중한” 생활이라며 대단히 긍정하고 있는 것이다.

불을 끄고 누웠다가

잊어지지 않는 것이 있어

다시 일어났다

암만해도 잊어버리지 못할 것이 있어 다시 불을 켜고 앉았을 때는 이미 내가 찾던 것은 없어졌을 때

반드시 찾으려고 불을 켠 것도 아니지만

없어지는 自體를 보기 위하여서만 불을 켠 것도 아닌데

잊어버려서 아까운지 아까웁지 않은지 헤아릴 사이도 없이 불은 켜지고

나는 잠시 아름다운 統覺과 調和와 永遠과 歸結을 찾지 않으려 한다

- 「구슬픈 肉體」 부분(초판:53)

물론 그는 인간적 “조화”를 원하는 “가슴”으로 조화가 없는 개인적 “생활”을 찾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해”가 지면 낮의 생활을 헤어진 “구슬픈 벗”처럼 여기고 “천사(天使)”처럼 완전히 흘려 버리고 싶어한다. 하지만 천사와 달리 인간은 “쉴 사이 없이 가야 하는” “구슬픈 육체”를 가지고 있으므로 어쩔 수 없이 낮에는 다시 불을 켤 수밖에 없다고 한탄한다. 인간은 육체를 가지고 있으므로 천사와 달리 먹고사는 생활을 부정할 수 없는 슬픈 운명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그는 「토끼」(1950)에서 먹고살기 위해 뛰는 훈련을 받아야 하는 인간의 운명을 제시했던 것처럼 여기서도 “육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생활난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강조하고 있다. 천사라면 세계시민주의를 실천할 수 있겠지만, 육체를 가진 인간은 주경야독(晝耕夜讀)이라는 말처럼 낮에는 개별적 생활을 추구하다가 밤에는 세계시민주의를 추구하는 다원적 세계시민주의를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나간 생활을 지나간 벗같이 여기고

해 지자 헤어진 구슬픈 벗같이 여기고

잊어버린 생활을 위하여 불을 켜서는 아니될 것이지만

天使같이 천사같이 흘려버릴 것이지만

아아 아아 아아

불은 켜지고

나는 쉴사이없이 가야 하는 몸이기에

구슬픈 肉體여. - 「구슬픈 肉體」 부분(초판:54)

이후 「눈」(1957)에서도 낮과 밤 사이의 순환이 계속 나타난다. 화자는 자연 공간인 산이 아니라 현실 공간인 “마당” 위에 떨어져 있는 눈이 살아 있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3연에서는 “눈”이 “밤”을 새고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있다는 시간적 의미로 확대된다. 이것은 눈이 개별적 생활을 상징하는 시공간인 ‘마당-새벽’과 보편적 정신을 상징하는 시공간인 ‘산-밤’의 대립을 넘어서 항상 살아있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눈은 개별적 생활과 보편적 정신을 모두 추구하는 다원적 존재라는 것이다.

눈은 살아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詩人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놓고 마음놓고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靈魂과 肉體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詩人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 「눈」 전문(초판:97)

그는 “눈”이 살아있는 이유를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함이라고 말한다. 이거은 “시인으로서의 소명을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 정신을 상징하는 “영혼”과 개별적 생활을 상징하는 “육체” 모두 “죽음”을 잊어버리면 안 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이미「구라중화」에서 “죽음 위에 죽음 위에 죽음을 거듭”해야 한다고 제시했듯이 밤에는 시인이자 세계시민으로서 “육체”의 죽음을 통해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고, 낮에는 가장으로서 “영혼”의 죽음을 통해 개별적 생활을 추구하면서 ‘영혼의 죽음’과 ‘육체의 죽음’ 사이를 무한히 순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여기서 눈은 개별적 생활을 상징하는 ‘마당=새벽=육체’와 보편적 정신을 상징하는 ‘산=밤=영혼’의 대립을 넘어서 항상 살아있는 다원적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다원적 존재인 눈처럼 인간도 ‘마당=새벽=육체’로 상징되는 개별적 생활을 위해서도 살고, ‘산=밤=영혼’으로 상징되는 보편적 정신을 위해서도 사는 다원적 삶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젊은 시인”에게 눈을 보면서 “기침”을 하고,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를 뱉으라고 주문한다. 여기서 “가래”는 “현실에의 분노”가 아니라, 시인이자 세계시민으로서 “영혼”을 위해 밤새도록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다가 생긴 찌꺼기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이제 개별적 생활을 상징하는 “육체”의 시간인 “새벽”이 되었으니 밤새도록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다가 생긴 찌꺼기를 완전히 뱉어내고, 다시 일어나서 생활난을 해결하기 위해 일하러 나가라는 것이다.


결국 “눈”을 향해 “기침”을 하는 것은 “스스로 존재의 중요성을 망각하고 있는 좀비 같은 상황”에서 “몰락한 것처럼 보이지만 아직도 살아 있는 눈 같은 존재에게 ‘나도 살아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의 시간인 새벽에는 ‘마당=육체’로 상징되는 개별적 생활을 위해 살아가려는 상징적 행위로 이해할 수 있다. 새로운 세대인 젊은 시인이라면 세계시민으로서 보편적 정신만 추구하지 말고, 개별적 생활 사이를 순환하는 다원적 세계시민-되기를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김수영은 1960년대 시에서도 개별성과 보편성 사이에서 중용을 추구하는 다원적 세계시민-되기의 실천 방법으로 낮과 밤 사이의 순환을 지속적으로 제시하였다, 낮에는 밭을 갈고, 밤에는 글을 읽는다는 주경야독(晝耕夜讀)이라는 말처럼 낮에는 가장으로서 개별적 생활을 추구하다가 밤에는 세계시민으로서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는 시간의 순환을 시중(時中)적 세계시민-되기의 실천 방법으로 일관성 있게 제시했던 것이다.


먼저, 「피곤한 하루의 나머지 시간」(1960)에서 낮과 밤 사이의 순환이 나타난다. 화자는 “피곤한” 하루의 “나머지 시간”이 눈을 깜짝거린다고 하면서, “세계”는 그러한 무수한 “간단(間斷)”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하루의 나머지 시간은 피곤한 낮이 끝나고 남은 밤의 시간이고, 세계가 무수한 “간단(間斷)”이라는 말은 이후 「사랑의 변주곡」(1967)에서의 “간단(間斷)”과 마찬가지로 눈을 뜨면 낮이고 감으면 밤인 것처럼 세계는 낮과 밤이 무수히 끊어졌다가 이어진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사람은 낮의 개별적 생활과 밤의 보편적 정신 사이를 무한히 순환하면서 살아가는 다원적 존재라는 것이다.

피곤한 하루의 나머지 시간이 눈을 깜짝거린다

세계는 그러한 무수한 間斷

오오 사랑이 추방을 당하는 시간이 바로 이때이다

내가 나의 밖으로 나가는 것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산이 있거든 불러보라

나의 머리는 관악기처럼

우주의 안개를 빨아올리다 만다 - 「피곤한 하루의 나머지 시간」 전문(초판:159)

그는 “바로 이때”가 “사랑”이 “추방(追放)”을 당하는 시간이고, “내”가 “나의 밖”으로 나가는 시간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피곤한 하루의 나머지 시간인 밤은 가장으로서 생활난을 해결해야 하는 가족적 “사랑”이 추방당하는 시간이자, 자신도 세계시민으로서 “나의 밖”으로 나가서 보편적 세계시민주의를 추구하는 시간이라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마지막 연에서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산”을 불러보라고 스스로에게 명령하는 것도 낮에는 어쩔 수 없이 가족의 생활난을 해결하기 위해 피곤하게 일하더라도 밤에는 “산”으로 상징되는 보편적 정신을 추구해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이어서 그는 자신의 “머리”가 “관악기”처럼 “우주의 안개”를 빨아올린다고 하면서, 밤에는 “관악기”로 상징되는 예술과 “우주의 안개”로 상징되는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고 있다고 밝힌다. 그는 이 시의 탈고일인 1960년 10월 29일자 일기에서 “오늘 시 「피로한 하루의 나머지 시간」을 쓰다. 전작과는 우정 백팔십도 전환. <일보 퇴보>의 시작(試作). 말하자면 반동의 시다. 자기 확립이 중요하다. 다시 뿌리를 펴는 작업을 시작하자.”(3판:505)라고 썼다. 따라서 그가 ‘밤’의 시간에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는 것은 현실을 부정하고 우주로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힘을 회복하기 위한 “자기 확립”의 시간이자 “다시 뿌리를 펴는 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는 “빨아올리다 만다”라는 말로 시를 마무리한다. 이것은 밤이 지나면 낮이 오기 때문에 언제까지 보편적 정신만 추구할 수는 없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세계는 “무수한 간단”이므로 밤에는 세계시민으로서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더라도 다시 낮이 되면 가장으로서 개별적 생활을 추구하는 시중(時中)을 통해 다원적 세계시민-되기를 실천하겠다는 것이다.


이후 「적2」(1965)에서도 낮과 밤 사이의 순환을 찾아볼 수 있다. 화자는 제일 “피곤”할 때 “적(敵)”에 대한다고 하면서 이를 “바위의 아량”이라고 규정한다. 여기서 “적(敵)”은 “처”로 대표되는 개별적인 가족의 생활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하루 가운데 일을 마치고 “피곤”해서 쉬는 밤에는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기 위해서 가족을 위한 생활을 “적”으로 대하고 이겨보려는 “바위”처럼 단단한 마음이 생긴다는 것이다.

제일 피곤할 때 敵에 대한다

바위의 아량이다

날이 흐릴 때 정신의 집중이 생긴다

神의 아량이다

그는 四肢의 관절에 힘이 빠져서

특히 무릎하고 大腿骨에 힘이 빠져서

사람들과

특히 그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련을 解體시킨다. - 「敵(二)」 부분(초판:245)


그가 “날이 흐릴 때” “정신의 집중”이 생기는 것을 “신의 아량”이라고 말하는 것도 날이 흐려서 일할 수가 없는 때에는 개별적 생활 대신에 보편적 정신을 추구할 수 있으니 “신”의 아량이자 선물이라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휴식의 시간인 밤이나 일을 할 수 없는 흐린 날에는 자신의 “적”인 개별적 생활을 물리치고 보편적 정신을 추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힘”이 빠져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련을 해체시킬 수 있다는 말도 “힘”이 빠져서 일할 수가 없는 휴식의 시간에는 가장 사랑하는 가족도 생각하지 않고 보편적 정신을 추구할 수 있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마찬가지로 “시(詩)”가 “쨍쨍한 날씨”에 버려진 우산처럼 “망각의 상기”라는 말도 피곤한 밤이나 흐린 날에는 “쨍쨍한 날씨”에 일하느라 망각하고 있었던 보편적 정신을 노래하는 시를 쓰라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그는 “성인(聖人)”이 “처(妻)”를 적으로 삼았다고 하면서, 지금 한국에서도 “눈”이 뒤집힌 사람들 틈에 끼여 사는 “처”들을 보고 “결별의 신호”라고 외친다. 그리고 자신은 “이조 시대” 장안에 깔린 “기왓장” 수만큼 많은 것을 버렸다고 덧붙인다. 물질문명 시대 한국에서는 보편적 정신에만 눈이 뒤집혀서 가족의 생활난을 해결하지 않는 “이조 시대”의 성인과 결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가장 피로할 때 “가장 귀한 것”을 버린다고 말하는 것은 낮에는 가장으로서 개별적 생활을 추구하더라도 휴식의 시간인 밤에는 세계시민으로서 “가장 귀한 것”인 “처”를 위한 개별적 생활과 “결별”하고 보편적 정신을 추구해야 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흐린 날”에는 “연극”이 없고 모든 게 쉰다는 말도 일하기가 어려운 흐린 날에는 “연극”으로 상징되는 가짜 인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쉬면서 진짜 인생인 정신을 추구하라는 의미로 이해된다. 쉬지 않는 것은 “처”와 “버림받은 애인”뿐이라는 말도 흐린 날에는 “처”와 “애인”처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개별적 생활을 버리고 쉬면서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라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李朝時代의 장안에 깔린 개왓장 수만큼

나는 많은 것을 버렸다

그리고 가장 피로할 때 가장 귀한

것을 버린다

흐린 날에는 演劇은 없다

모든게 쉰다

쉬지 않는 것은 妻와 妻들 뿐이다

혹은 버림받은 愛人뿐이다

버림받으려는 愛人뿐이다

넝마뿐이다

제일 피곤할 때 敵에 대한다

날이 흐릴 때면 너와 대한다

가장 가까운 敵에 대한다

가장 사랑하는 敵에 대한다

偶然한 싸움에 이겨보려고 - 「敵(二)」 부분(초판:246)

마지막 연에서는 “제일 피곤할 때”, “날이 흐릴 때”가 되면, “가장 가까운 적”, “가장 사랑하는 적”에 대한다고 하면서, 휴식의 시간인 밤과 흐린 날에는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기 위해서 가장 사랑하는 가족을 위한 생활을 물리쳐야 한다고 다시 강조한다. 노동의 시간인 낮에는 가장으로서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개별적 생활을 추구하더라도 휴식의 시간인 밤에는 이를 단호하게 물리치고 세계시민으로서 보편적 정신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김수영의 시에는 낮에는 밭을 갈고, 밤에는 글을 읽는다는 주경야독(晝耕夜讀)이라는 말처럼 낮과 밤의 무한한 순환이 전기의 「구슬픈 육체」(1954), 「눈」(1957)과 후기의 「피곤한 하루의 나머지 시간」(1960), 「적2」(1965) 등 여러 작품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김수영은 개별성과 보편성 사이에서 중용을 추구하는 시중(時中)적 세계시민-되기의 실천 방법으로서 낮과 밤 사이의 순환을 전기부터 후기까지 일관성 있게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 이건주 문학박사/K-문학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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