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와 하루 사이의 순환을 통한 시중적 세계시민-되기
김수영은 1950년대부터 개별성과 보편성 사이에서 중용을 추구하는 다원적 세계시민-되기의 실천 방법으로 하루와 하루 사이의 무한한 순환을 제시하였다, 청경우독(晴耕雨讀)이라는 말처럼 맑은 날에는 개별적 생활을 추구하다가, 비 오는 날에는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거나,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이라는 말처럼 오늘 개별적 생활을 추구했다면, 내일은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는 시간의 순환을 시중(時中)적 세계시민-되기의 실천 방법으로 제시했던 것이다.
먼저, 「방 안에서 익어가는 설움」(1954)에서는 비 오는 날과 맑은 날, 낮과 밤 사이의 순환이 모두 나타난다. 화자는 “비”가 그친 후 어느 날 자신의 방 안에 “설움”이 충만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말한다. 여기서 “설움”은 “끊임없이 다시 살아나는 자기 갱신의 방편이자, 안주하지 않으려는 실존적 고뇌”나 “현실에 실재하지 않는 예술적‧정신적 지평을 구축하려는 모험”이 동시에 거느리는 “부정적 심리”가 아니라, 개별적 생활을 위해 일해야 하는 노동의 “피로”와 “설움”(「긍지의 날」)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비가 와서 쉬면서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다가 비가 그쳤으니, 생활난을 해결하기 위해 노동의 피로와 설움을 무릅쓰고 다시 일하러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비가 그친 후 어느 날―
나의 방 안에 설움이 충만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오고 가는 것이 直線으로 혹은
對角線으로 맞닥드리는 것같은 속에서
나의 설움은 유유히 자기의 시간을 찾아갔다
설움을 逆流하는 야릇한 것만을 구태여 찾아서 헤매는 것은
우둔한 일인줄 알면서
그것이 나의 생활이며 정신이며 시대이며 밑바닥이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아아 그러나 지금 이 방안에는
오직 시간만이 있지 않으냐 - 「방안에서 익어가는 설움」(초판:45)
그는 “오고 가는 것”이 “직선” 혹은 “대각선”으로 맞닥뜨리는 것 같은 속에서 “설움”이 유유히 “자기의 시간”을 찾아갔다고 말한다. 비가 오는 휴식의 시간과 비가 그친 노동의 시간이 “오고 가는 것”이 자연적인 “순환의 원리”(「긍지의 날」)이기 때문에 비가 그치면 설움을 주는 노동의 시간을 “자기의 시간”으로 알고 “유유히” 찾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는 개별적 생활을 위해 일하는 “설움”을 “역류”하는 야릇한 것인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는 것이 “우둔한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것이 자신의 “생활”이며 “생명”이며 “정신”이며 “시대”이며 “밑바닥”이라고 믿고 구태여 찾아서 헤맨다고 밝힌다. “그러나” “지금”은 “오직” 생활에 매달려야 하는 “설움”의 “시간”만 있는 것이 아니냐고 묻는다. 세계시민으로서 마땅히 보편적 정신을 추구해야 하지만, “지금”은 비가 그쳤으니 가장으로서 개별적 생활을 추구하면서 중용적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어서 그는 흐르는 “시간” 속에 “푸른 옷”이 걸리고 그 위에 반짝이는 “별”같이 “흰 단추”가 달려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푸른 옷”은 푸른 죄수복처럼 인간을 구속하는 생활을, “흰 단추”는 “별”처럼 우주적이고 인간적인 정신과 자유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개별적 생활을 위한 시간 속에도 보편적 정신을 위한 시간이 들어 있으니 양극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라는 것이다. 이런 해석은 그의 1954년 11월 30일자 일기로 뒷받침된다. 여기에서 그는 “와사등 밑에 반사되는 물체처럼 아련하고도 표독한 생활을 찾아가자.”라고 하면서, “자유는 나의 가슴에 붙은 흰 단추와 같다.”(3판:682)라고 쓰고 있다. 죄수복인 “푸른 옷”으로 상징되는 “표독한 생활”의 “시간” 속에 “별”, “흰 단추”로 상징되는 “자유”를 위한 시간도 함께 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가 “시간”과 함께 “한 자루의 부채”를 제시하면서 자신의 “눈”과 “정신”이 어느 “하나”의 가냘픈 “물체”에 고정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도 부채 손잡이로 상징되는 개별적 생활과 우주를 향하여 “시야에서 멀어져가는” 부채살로 상징되는 보편적 정신 가운데 어느 한 극점에 “고정”되지 않고 양극 사이에서 균형을 추구하겠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비 오는 날과 맑은 날이라는 시간의 변화에 맞게 개별적 생활과 보편적 정신 사이를 무한히 순환하는 시중(時中)의 기술을 실천하겠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그는 이 “밤”이 기다리는 “고요한 사상”마저 초연히 “시간” 위에 얹고 “어려운 몇 고비”를 넘어가는 “기술”을 알고 있다고 하면서, 낮과 밤의 순환이라는 시간의 기술도 제시한다. 주경야독(晝耕夜讀)이라는 말처럼 노동의 시간인 낮에는 개별적 생활의 “설움”을 추구하는 고비를 넘고, 휴식의 시간인 “밤”이 오면 “고요한 사상”을 추구하는 고비를 넘어가는 시간의 “기술”도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것”, 즉 시간의 기술을 통해 가장으로서의 개별적 생활과 세계시민으로서의 보편적 정신 사이를 “오고 가는” 것이 “확실한 나의 생활”이라고 강조한다.
이 밤이 기다리는 고요한 思想마저
나는 초연히 이것을 시간 위에 얹고
어려운 몇 고비를 넘어가는 기술을 알고 있나니
누구의 생활도 아닌 이것은 확실한 나의 생활
마지막 설움마저 보낸 뒤
빈 방안에 나는 홀로이 머물러 앉아
어떠한 내용의 책을 열어보려 하는가 - 「방안에서 익어가는 설움」(초판:45-46)
마지막 연에서 그가 “마지막 설움”마저 보낸 뒤에 “빈방” 안에서 열어보려는 “책”은 “흰 단추”, “고요한 사상” 등으로 상징되는 보편적 정신이라고 볼 수 있다. 비가 그친 후 낮에는 생활난을 해결하기 위해 일하다 보니 방 안에서 “설움”만 익어가지만,다시 휴식의 시간인 “밤”이 오면 생활의 “설움”을 다 내보낸 뒤에 “빈방”에서 “홀로”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겠다는 것이다.
이후 「바뀌어진 지평선」(1956)에서는 어제와 오늘, 오늘과 내일 사이의 순환이 나타난다. 화자는 “생활”을 위해서는 “요만한” “경박성”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예술의 신인 “뮤즈”에게 용서를 빈다. 현실적인 생활난에 빠져서 울지 않으려면 잠시 뮤즈로 상징되는 보편적 정신을 잊고, 영화배우 “로날드 콜맨”과 피우기 싫은 “담배” 등으로 상징되는 경박한 생활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뮤우즈여
용서하라
생활을 하여 나가기 위하여는
요만한 輕薄性이 必要하단다
時間의 表面에
물방울을 풍기어가며
오늘을 울지 않으려고
너를 잊고 살아야 하는 까닭에
로날드 골맨의 新作品을
눈여겨 살펴보며
피우기 싫은 담배를 피워 본다 - 「바뀌어진 地平線」 부분(초판:80)
그렇다고 그가 뮤즈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현실 속에서 “매춘부” 같은 생활을 하고 있지만, “날개 돋친 마음”을 잃지 않기 위해 뮤즈와 같이 걸어간다고 말한다. 그리고 세상을 속지 않고 걸어가기 위해서는 “우울”이 또한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생활을 상징하는 “담배”를 끊고 누구에게든 신경질을 피우고 싶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는 뮤즈에게 “물”에 빠지지 않기 위한 “생활”, 즉 최소한의 생존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자신의 생활을 “경멸”하지 말라고 하면서, 자신은 공명과 이익을 먼저 추구하는 “공리적(功利的)인 인간”이 아니라고 항변한다. 그리고 “남”들이 괴로워하는 현실을 바로 보기 위해서 “약간”의 경박성이 필요한 것뿐이라고 덧붙인다. 물질문명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요만한”, “약간”의 경박성을 가지고 개별적 생활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물질문명 시대에는 “지혜의 왕자”처럼 도사리고 앉아서 “원죄와 회한”만을 생각하는 것보다는 뮤즈의 “생리”를 “해부”해 보는 현실적인 태도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타락”한 오늘의 시대를 제대로 이해하고 극복하기 위해서는 “클라크 게이블”이 나오는 대중영화, 너절한 “대중잡지” 속으로 더 깊이 떨어져야 한다고 하면서도, 사람들이 속물이라고 비웃을 것 같아서 적당히 “넥타이”를 매고 앉아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라고 밝힌다.
결국 그는 뮤즈가 “어제까지” 자신의 세력이었지만 오늘은 “나”의 “지평선”이 바뀌었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어제와 오늘”, “오늘과 내일”의 차이를 정시하고 실천하기 위해서 타락한 “신문기자”의 탈을 쓰고 살고 있다고 덧붙인다. 어제까지는 시인이자 세계시민으로서 뮤즈로 상징되는 보편적 정신을 추구했지만, 오늘부터는 가장으로서 가족의 생활난을 해결하기 위해서 신문기자라는 직업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 말은 “오늘”과 달리 “내일”은 다시 “뮤즈”를 위해 “생활”을 포기할 수도 있다는 변화 가능성도 내포하고 있을 것이다.
시의 후반부에서도 그는 “투기(妬忌)”, “경쟁”, “살인”, “간음”, “사기”가 가득한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는 “약간”의 “경박성”이 필요하다고 거듭 말한다. 그리고 물 위를 날아가는 “돌팔매질”처럼 아슬아슬하게 “세상에 배를 대고 날아가는 정신”을 제시한다. 자신은 개별적 생활과 보편적 정신 어느 한 극점에 머무르지 않고, 물 위를 날아가는 “돌팔매질”처럼 양극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긴장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어지러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하여
나에게는 若干의 輕薄性이 必要하다
물 위를 날아가는 돌팔매질―
아슬아슬하게
세상에 배를 대고 날아가는 精神이여
너무나 가벼워서 내 자신이
스스로 무서워지는 놀라운 肉體여
背反이여 冒險이여 奸惡이여 - 「바뀌어진 地平線」 부분(초판:82)
그는 시인으로서 뮤즈를 “배반”하고, 뮤즈와 생활 사이에서 중용적 균형을 유지하는 “모험”을 감행하려는 자신의 “간악”함이 무서워지지만, 이것은 “육체”를 가진 인간에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뮤즈에게도 “어제”부터 출발했던 영혼의 “아름다움”과 “오늘”부터 출발하는 “육체”의 생활을 모두 얻기 위해 “복부”를 하늘을 보게 하면서 “표면”에 살라고 주문한다. 이제는 개별적 생활에 충실한 직업인으로서의 신문기자와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는 시인 사이에서 “세상에 배를 대고 날아가는 정신”처럼 아슬아슬하게 긴장을 추구하겠다는 것이다.
이어서 그는 생활을 상징하는 “콜맨”, “게이블”, “레이트”, “디보스”, “매리지”, “하우스펠 에어리어”와 정신을 상징하는 “고갱”, “녹턴”, “물새”를 다시 대립시킨다. 그리고 뮤즈에게 시인이 “시(詩)”의 뒤를 따라가기에 싫증이 났다고 하면서, 과거처럼 정신만을 추구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낸다. 그리고 “모두” 다 같이 나가는 “지평선의 대열”을 자신의 새로운 목표로 제시한다. 이를 위해서 이미 “어제”부터 출발했던 정신적 뮤즈는 걸음을 멈추고, 현실을 외면하면서 아직 출발도 하지 않은 “서정시인”은 조금 빨리 가서 대열을 “일자(一字)”로 만들자고 권유한다.
모두 다 같이 나가는 地平線의 隊列
뮤우즈는 조금쯤 걸음을 멈추고
抒情詩人들은 조금만 더 速步로 가라
그러면 隊列은 一字가 된다
사과와 手帖과 담배와 같이
人間들이 걸어간다
뮤우즈여
앞장을 서지 마라
그리고 너의 노래의 音階를 조금만
낮추어라
오늘의 憂鬱을 위하여
오늘의 輕薄을 위하여 - 「바뀌어진 地平線」 부분(초판:83)
마지막 연에서 그는 개별적 생활을 상징하는 “사과”, “수첩”, “담배”와 함께 걸어간다고 하면서, 보편적 정신을 상징하는 뮤즈에게 “앞장”을 서지 말고 “노래”의 음계를 조금만 낮추라고 다시 주문한다. 그리고 정신을 상징하는 “우울”과 생활을 상징하는 “경박”을 모두 추구하겠다는 다원적 의지를 드러낸다. 결국 이 시의 제목인 “바뀌어진 지평선”은 “어제와 오늘”, “오늘과 내일”의 차이를 정시하면서, 시인이자 세계시민으로서의 보편적 정신과 가장으로서의 개별적 생활 사이에서 중용적 균형을 유지하겠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그는 “어제와 오늘”, “오늘과 내일”이라는 시간의 변화에 맞춰 개별적 생활과 보편적 정신 사이를 무한히 순환하는 “시중(時中)”을 다원적 세계시민-되기의 실천 방법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후 「비」(1958)에서는 비 오는 날과 맑은 날 사이의 순환이 나타난다. 화자는 “비”가 오고 있다며, “움직이는 비애”를 알고 있느냐고 묻는다. 이것은 “비”가 오면 일을 할 수가 없으므로 가족의 생활난을 해결하기 위해 몸을 움직여야 하는 “비애”를 달래준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사람은 “명령”, “결의”가 의미하는 보편적 정신과 “평범”하게 되려는 일이 가리키는 개별적 생활 사이에서 “해초”처럼 움직이는 다원적 존재이기 때문에 정신의 시간인 “밤”을 모르는 채 언제나 생활의 시간인 “새벽”만을 향해 움직이는 것은 “비애”일 수밖에 없는데, 비가 오면 일하러 나갈 수가 없으므로 먹고살기 위해 몸을 움직여야 하는 “비애”를 면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비가 오고 있다
여보
움직이는 悲哀를 알고 있느냐
命令하고 決意하고
「平凡하게 되려는 일」가운데에
海草처럼 움직이는
바람에 나부껴서 밤을 모르고
언제나 새벽만을 향하고 있는
透明한 움직임의 悲哀를 알고 있느냐
여보
움직이는 悲哀를 알고 있느냐 - 「비」 부분(초판:113)
그는 “순간”이 “순간”을 죽이는 것이 “현대”라고 하면서, “현대”가 “현대”를 죽이는 “종교”, “현대의 종교”는 출발에서 죽는 영예(榮譽)”라고 말한다. 현대가 도덕적 “명령”과 “결의”, “종교” 같은 보편적 정신을 부정하고, 개별적 생활을 위한 움직임의 “순간”만을 추구하는 이기적 시대라고 비판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여보”에게 비가 와서 일하러 나갈 수 없는 날에는 “마음의 그림자”인 보편적 정신을 사랑하라고 주문한다. 청경우독(晴耕雨讀)이라는 말처럼 비 오는 날에는 일을 쉬고 생활의 “벽”에 비치는 “머리”, 즉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라는 것이다.
이어서 그는 “결의하는 비애”, “변혁하는 비애”, “현대의 자살”을 얘기하다가, “비”가 “너” 대신 움직인다고 하면서 “무수한” 너의 “종교”를 보라고 말한다. 이것은 비가 “영원성을 지향하는 종교적 행위”라는 뜻이 아니라, 종교가 사라진 현대 물질문명 시대에는 “비”가 종교처럼 일을 쉬면서 보편적 정신을 추구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비가 오는 날에는 개별적 생활을 중시하는 “현대”를 죽이려는 “결의”와 “변혁”을 통해 “종교”처럼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라는 것이다.
그는 “계사(鷄舍)” 위에 울리는 “곡괭이 소리”와 “동물의 교향곡”이라고 할 수 있는 닭의 울음소리는 물론이고 “잠”을 자면서 머리를 식히는 “사색가”까지 생활 속에는 너무나 많은 “움직임”이 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비가 개별적 생활을 위한 “움직임”을 통제하는 “결의”이자 “움직이는 휴식”이라고 하면서, 비가 오면 개별적 생활을 위한 일손을 멈추고 “휴식”을 취하면서, “명령”과 “결의”, “종교”처럼 초월적이고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라고 주문한다.
鷄舍 위에 울리는 곡괭이소리
動物의 交響曲
잠을 자면서 머리를 식히는 思索家
─모든 곳에 너무나 많은 움직임이 있다
여보
비는 움직임을 制하는 決意
움직이는 休息
여보
그래도 무엇인가가 보이지 않느냐
그래서 비가 오고 있는데! - 「비」 부분(초판:114)
마지막 연에서는 비가 오고 있으니 “무엇인가가” 보이지 않느냐고 물으면서, “그래서” 비가 오고 있다고 스스로 답한다. 이것은 비가 오는 것은 개별적 생활을 위한 “움직임”을 멈추고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무엇인가” 즉, “마음의 그림자”, “종교” 같은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라는 하늘의 “명령”이라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맑은 날에는 가장으로서 개별적 생활을 추구하다가도 비 오는 날에는 세계시민으로서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면서 양극 사이를 무한히 순환하는 시중(時中)을 다원적 세계시민-되기의 실천 방법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김수영은 1960년대 시에서도 개별성과 보편성 사이에서 중용을 추구하는 다원적 세계시민-되기의 실천 방법으로 하루와 하루 사이의 무한한 순환을 제시하였다, 청경우독(晴耕雨讀)이라는 말처럼 맑은 날에는 개별적 생활을 추구하다가, 비 오는 날에는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거나,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이라는 말처럼 오늘 개별적 생활을 추구했다면, 내일은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는 시간의 순환을 시중(時中)적 세계시민-되기의 실천 방법으로 제시했던 것이다.
먼저, 「엔카운터지(誌)」(1966)에서는 어제와 오늘 사이의 순환이 모두 나타난다. 화자는 부조리극으로 유명한 “이오네스코” 등 보편적 정신을 상징하는 교양지인 “엔카운터지”를 빌려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작년”에 빌려주겠다고 한 이유가 “매춘부 젊은 애들”이 때 묻은 발을 꼬고 앉아서 유부우동을 먹고 있는 것을 보다가 생각한 것이라고 밝힌다. 그때는 “이오네스코”가 나오는 “엔카운터지”를 빌려주는 행위로 상징되듯이 보편적 정신을 “희생”하고, “매춘부 젊은 애들”처럼 가난한 사람들의 비참한 생활난을 해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오네스코”로 상징되는 보편적 정신 “이전에” 있었다고 하면서, “내 몸”, “빛나는 몸”이 상징하는 개별적 생활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한다.
빌려드릴 수 없어. 작년하고도 또 틀려.
눈에 보여. 냉면집 간판 밑으로―육개장을 먹으러―
들어갔다가 나왔어― 모밀국수 전문집으로 갔지―
매춘부 젊은 애들, 때묻은 발을 꼬고 앉아서
유부우동을 먹고 있는 것을 보다가 생각한 것
아냐. 그때는 빌려드리려고 했어. 寬容의 미덕―
그걸 할 수 있었어. 그것도 눈에 보였어. 엔카운터
속의 이오네스꼬까지도 희생할 수 있었어. 그게
무어란 말이야. 나는 그 이전에 있었어. 내 몸. 빛나는
몸. - 「엔카운터誌」 부분(초판:260)
그는 “큰놈”과 “가정교사”에게 안방을 내주고 “식모아이”가 쓰던 방으로 이사를 했다가, 가정교사가 싫어해서 다시 돌아왔을 때에도 자신의 “모든 프라이드”, “재산”, “연장”인 “책”을 빌려 드리겠다고 생각했었다고 밝힌다. 집이 작아서 가정 교사를 들이는 것이 어려워지자 보편적 정신을 상징하는 책을 잠시 빌려주고, 가족의 생활난을 해결하기 위해 돈을 벌기로 마음먹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갑자기” 변했다고 하면서 “왜 변했을까. 이게 문제야.”라고 말한다. 그리고 “지금”도 빌려줄 수는 있지만 안 빌려줄 수도 있다고 하면서, “지금”은 안 빌려주기로 하고 있는 “시간”이라고 설명한다. 이것은 책을 빌려주는 것과 안 빌려주는 것은 시간적 상황에 달려 있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책을 빌려주어야 하는 시간과 빌려주면 안 되는 시간이 따로 있으므로 시간적 상황에 맞게 양극 사이를 무한히 순환하는 시중(時中)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어서 그는 “시간은 내 목숨야”라고 외치면서 “오늘”은 “어제”와 달려져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어제”도 “오늘”도 빛나지 않고 그 “연관”만이 빛난다고 덧붙인다. 이것은 보편적 정신을 상징하는 “책”을 빌려주고 개별적 생활을 추구했던 “어제”나, 반대로 책을 빌려주지 않고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는 “오늘” 가운데 어느 하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시간의 변화에 따라 생활과 정신 사이를 무한히 순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생활과 정신 어느 하나만을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어제”는 가장으로서 개별적 생활을 추구했으니, “오늘”은 세계시민으로서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면서 긴장을 유지해야 육체와 영혼을 모두 가진 인간이 “목숨”을 보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시간은 내 목숨야. 어제하고는 틀려졌어. 틀려
졌다는 것을 알았어. 틀려져야겠다는 것을 알
았어. 그것을 당신한테 알릴 필요가 있어. 그것
이 책보다 더 중요하다는 걸 모르지. 그것을
이제부터 당신한테 알리면서 살아야겠어―그게
될까? 되면? 안되면? 당신! 당신이 빛난다.
우리들은 빛나지 않는다. 어제도 빛나지 않고.
오늘도 빛나지 않는다. 그 연관만이 빛난다.
시간만이 빛난다. 시간의 인식만이 빛난다.
빌려주지 않겠다. 빌려주겠다고 했지만
빌려주지 않겠다. 야한 선언을
하지 않고 우물쭈물 내일을 지내고
모레를 지내는 것은 내가 약한 탓이다.
야한 선언은 안 해도 된다. 거짓말을 해도
된다.
안 빌려주어도 넉넉하다. 나도 넉넉하고,
당신도 넉넉하다. 이게 세상이다. - 「엔카운터誌」 부분(초판:261)
그는 “어제”는 빌려주겠다고 했지만 “오늘”은 빌려주지 않겠다고 “거짓말”을 해도 된다고 말한다. 거짓말을 하더라도 어제와 오늘이라는 시간의 변화를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안 빌려주어도 “나”도 “당신”도 “넉넉”하다며, “이게 세상이다”라는 말로 시를 마무리한다. 어제는 보편적 정신을 상징하는 책을 빌려주고 가장으로서 개별적 생활을 추구하다가 오늘은 책을 빌려주지 않고 세계시민으로서 보편적 정신을 다시 추구하면서 양극 사이에서 끊임없이 긴장을 유지하는 것이 사람을 물질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넉넉하게 만드는 길이라는 것이다.
이런 해석은 김수영의 산문 「생활의 극복-담뱃갑의 메모」(1966)로 뒷받침된다. 여기서 그는 생활의 여유를 부끄럽게 여기는 “부정(否定)의 잔재”가 남아 있다고 하면서, 이 모순의 고민을 “시간에 대한 해석”으로 해결해 보는 것도 순간적이나마 재미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여유”가 고민으로 생각되는 것은 이것을 “고정된” 사실로 보기 때문이며, 이것을 “흘러가는 순간”, “평범한 발전의 원칙”에서 포착하면 고민이 아니라 “기쁨”이 된다고 설명했다.(3판:159) 개별적 생활의 여유를 추구하는 것을 고정된 것으로 보면 이기적인 속물이라고 부정할 수밖에 없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다시 보편적 정신을 추구할 것이기 때문에 즐겁게 생활의 여유를 추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시중(時中)이 바로 “시와 생활 사이에서 방황하는 김수영의 숨은 곤경”을 해결하는 방법이었다고 볼 수 있다.
마지막 작품인 「풀」(1968)에서는 흐린 날과 맑은 날 사이의 순환이 나타난다. 화자는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이 누워서 울었다고 하면서,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고 말한다. 이미 「비」(1958)에서 비 오는 날에는 “휴식”을 취하면서 인간적 “비애(悲哀)”를 추구하라고 주문하고, 「여름밤」(1967)에서 “소나기”가 지나고 “바람”이 부는 날을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던 날”이라고 규정했듯이 “비”를 몰아오는 “동풍”이 부는 흐린 날에는 개별적 생활을 위해 일하러 나가지 말고, 그냥 “누워”서 비애와 사랑 같은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라는 것이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 「풀」 전문(초판:297)
그는 풀이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고, 바람보다 “더 빨리” 울며,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고 말한다. 그런데 풀이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말은 바람에 의해 움직이는 풀이라는 자연적 현상에 반하는 진술이기 때문에, 풀을 “민중”으로, 바람을 “불의와 부당한 탄압”이나 “적대적인 적”의 상징으로 이해하면서 의로운 민중이 부당한 독재를 이길 수 있다고 해석하는 근거가 되어 왔다.
하지만 풀이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것을 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바람이 불면 서 있던 풀이 바람보다 더 “빨리” 눕는 것처럼 누워 있는 풀에 맞바람이 불면 풀이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풀이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는 말은 누워 있는 풀에 맞바람이 불면 풀이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듯이 사람도 맑은 날에는 “먼저” 일어나서 일하러 나가야 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비바람이 부는 흐린 날에는 바람보다 “빨리” 누워서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다가, 비가 그치고 맑은 날에는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서 개별적 생활을 추구하는 식으로 양극 사이에서 균형을 추구하라는 것이다.
마지막 연에서는 날이 흐려서 풀이 “발목”, “발밑”까지 눕는다고 하면서, 흐린 날에는 일어나지 말고 “발목”, “발밑”까지 누워서 철저하게 정신을 추구해야 한다고 다시 강조한다. 그가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먼저 일어나고, “늦게” 울어도 먼저 웃는다고 하면서 “늦게”라는 말을 덧붙인 것은 「후란넬 저고리」(1963)에서처럼 생활난이 극심하면 흐린 날에도 “빨리” 누워서 울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풀은 바람보다 “빨리”든 “늦게”든 눕고 울다가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웃는 존재이다. 이것은 흐린 날에 “빨리”든 “늦게”든 누워 울면서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고, 맑은 날에는 가족의 생활난을 해결하고 웃을 수 있도록 “먼저” 일어나서 일하러 나가라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청경우독(晴耕雨讀)이라는 말처럼 흐린 날에는 세계시민으로서 누워 울면서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고, 맑은 날에는 가장으로서 생활난을 해결하고 웃을 수 있도록 일어나서 개별적 생활에 집중하는 시중(時中)을 실천하라는 것이다.
이 시에서 주된 대립 구도를 “풀과 바람”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동안 “비를 몰아오는 동풍”은 풀에게 필요한 비를 제공해주는 존재이므로 풀과 바람이 생태생물학적으로 서로 적이 될 수 없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 시의 주된 대립 구도는 흐린 날과 맑은 날이라는 시간의 긴장이라고 볼 수 있다.
‘바람’은 풀을 눕게도 만들고 일어나게 만드는 시간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비를 몰고 오는 “동풍”은 풀을 눕게 만드는 바람으로서 ‘흐린 날’을 상징하고, 누워 있는 풀 앞에서 부는 바람은 풀을 다시 일어날 수 있게 만드는 바람으로서 ‘맑은 날’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풀’은 흐린 날에 부는 바람을 맞으면 누워서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고, 맑은 날에 부는 바람을 맞으면 다시 일어나서 개별적 생활을 추구하는 다원적 인간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바람의 변화에 따라 누웠다가 일어나고, 울다가 웃다가를 무한히 반복하는 풀처럼 사람도 흐린 날과 맑은 날이라는 시간의 변화에 따라 개별적 생활과 보편적 정신 사이를 무한히 순환하는 시중(時中)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김수영의 시에는 하루와 하루 사이의 순환이 전기의 「방 안에서 익어가는 설움」(1954), 「바뀌어진 지평선」(1956), 「비」(1958)와 후기의 「엔카운터지(誌)」(1966), 「풀」(1968) 등 여러 작품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김수영은 개별성과 보편성 사이에서 중용을 추구하는 시중(時中)적 세계시민-되기의 실천 방법으로서 하루와 하루 사이의 무한한 순환을 전기부터 후기까지 일관성 있게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 이건주 문학박사/K-문학연구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