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의 시에 나타난 다원적 세계시민주의 연구

봄·여름·가을·겨울 사이의 순환을 통한 시중적 세계시민-되기

by 이건주

김수영은 1950년대 시에서부터 개별성과 보편성 사이에서 중용을 추구하는 다원적 세계시민-되기의 실천 방법으로 봄·여름·가을·겨울 사이의 무한한 순환을 제시하였다, 농촌에서 봄에 싹을 틔우고, 여름에 기르며, 가을에 수확하고, 겨울에 저장한다는 의미의 춘생하장(春生夏長), 추수동장(秋收冬藏)이라는 말처럼 노동의 계절에는 가장으로서 개별적 생활을 추구하고, 휴식의 계절에는 세계시민으로서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는 시간의 순환을 시중(時中)적 세계시민-되기의 실천 방법으로 제시했던 것이다.


먼저, 「여름 뜰」(1954)에서는 여름과 겨울 사이의 순환이 나타난다. 화자는 “여름 뜰”을 보면서 자신이 무엇 때문에 “부자유한 생활”을 하고, “자유스러운 생활”을 피하고 있는지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자신이 “부자유한 생활”을 하는 이유가 “주름살”과 “굴곡(屈曲)”으로 상징되는 생활난을 해결하기 위해서라고 답한다. “여름 뜰”은 “자연의 표상”이 아니라, 반대로 “여름”이 노동의 계절이고, “뜰”이 생활을 위한 현실 공간이므로 먹고살기 위해 일해야 하는 현실적 시공간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는 지금 여기 “여름 뜰”에서 개별적 생활난을 해결하기 위해서 “부자유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不自由한 생활을 하고 있으며

무엇 때문에 自由스러운 생활을 피하고 있느냐

여름 뜰이여

나의 눈만이 혼자서 볼 수 있는 주름살이 있다 屈曲이 있다

모오든 言語가 詩에로 通할 때

나는 바로 一瞬間 전의 大膽性을 잊어버리고

젖 먹는 아이와같이 이즈러진 얼굴로

여름뜰이여

너의 廣大한 손(手)을 본다 - 「여름 뜰」 부분(초판:90)

그는 “모든 언어”가 “시”로 통할 때, 즉 개별적 생활을 상징하는 언어가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는 시를 침범하여 생존의 문제가 닥칠 때에는 자유를 요구하던 “대담성”을 잊어버리고 “젖 먹는 아이”처럼 현실적 시공간인 “여름 뜰”의 “광대한 손”을 보지 않을 수 없다고 고백한다. 시인이자 세계시민으로서 개별적 생활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라고 대담하게 말했지만, 생활난이 극심해지면 “젖먹는 아이”처럼 “여름 뜰”이라는 현실적 시공간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어서 그는 “여름 뜰”에서 “조심하여라! 자중하여라! 무서워할 줄 알아라!” 하는 “억만의 소리”가 비 오듯 내린다고 말한다. 생활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노동의 시공간을 부정하지 말고, 오히려 무서워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합리와 비합리의 사이”에 앉아 있는 자신의 표정에 “우습고 간지럽고 서먹하고 쓰디쓴 것”이 섞여 있다고 덧붙인다. 자신은 시인이자 세계시민으로서 “자유”, “합리”로 상징되는 보편적 정신과 “여름 뜰”, “비합리”로 상징되는 개별적 생활을 모두 긍정하고, 그 사이에서 “우습고 간지럽고 서먹하고 쓰디쓴” 중용적 균형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시의 후반부에서는 부자유한 생활을 하고 있는 자신을 다시 비판하면서, “크레인의 강철”보다도 강한 “황금빛”, 즉 물질문명 시대 황금만능주의를 “꺾기 위하여” 달려가는 “조그마한 동물”이라도 있다면 “희생”할 것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한다. 지금은 비록 생활의 시공간인 “여름 뜰”에서 먹고살기 위해 “부자유한 생활”을 하고 있지만, 여기서 벗어나 세계시민으로서 자유롭게 보편적 정신을 추구할 수 있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보편적 정신을 위한 “질서”와 개별적 생활을 위한 “무질서” 사이에서 움직이고 있다고 하면서, “여름 뜰”에서는 영혼이 사라진 “시체”나 다름없이 살 수밖에 없다고 한탄한다.

秩序와 無秩序와의 사이에

움직이는 나의 生活은

섧지가 않아 屍體나 다름없는 것이다

여름 뜰을 흘겨보지 않을 것이다

여름 뜰을 밟아서도 아니될 것이다

黙然히 黙然히

그러나 속지 않고 보고 있을 것이다 - 「여름 뜰」 부분(초판:90-91)

마지막 연에서는 현실적 시공간인 여름 뜰을 무조건 부정하면서 “흘겨” 보거나 무조건 긍정하면서 “밟아서도” 안 된다고 경고한다. 그리고 “묵연(黙然)히 묵연(黙然)히” 속지 않고 “보고” 있을 것이라고 다짐한다. 시인이자 세계시민으로서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더라도 가장으로서 가족의 생활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여름 뜰”이라는 노동의 시공간을 긍정하고 “부자유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후 「초봄의 뜰 안에」(1958)에서는 봄과 겨울 사이의 순환이 나타난다. 화자는 “초봄”이 되어 가족과 함께 사는 생활 공간인 “뜰 안”으로 들어오면, 정신적 세계인 서방정토(西方淨土)를 암시하는 “서편”의 “풍경”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황폐한 “강변”에 흐르는 “해빙”의 파편이 “영혼”보다 더 새롭다고 덧붙인다. 이것은 강변의 얼음이 녹는 봄이 왔으니, 겨울 동안 세계시민으로서 “영혼”을 추구하느라 “황폐”해진 생활난을 해결하기 위해 일을 시작해야 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이제 “겨울”이 지나 “초봄”이 되었으니, “영혼”을 위한 보편적 정신만 추구하지 말고, 가장으로서 가족을 위해 다시 일하러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초봄의 뜰안에 들어오면

서편으로 난 欄干문 밖의 풍경은

모름지기

보이지 않고

荒廢한 강변을

靈魂보다도 더 새로운 解氷의 破片이

저멀리

흐른다 - 「초봄의 뜰 안에」 부분(초판:112)

그는 생계를 위해 “병아리”를 기르는 “아내와 아들”을 귀중한 “보석”에 비유하고, 생활의 냄새인 짓이긴 “파 냄새”를 “신약(神藥)”처럼 생긋하다고 말한다. 노동의 계절인 봄에는 가족의 생활난을 해결하기 위해 일하는 것이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는 것 못지않게 귀하고 아름다운 일이라는 것이다. “바람”이 “어제”와 “오늘”이 다른데 “옷”을 벗어 놓은 “나”의 “정신”이 “늙은 바위”에 앉은 이끼처럼 춥다는 말도 봄이 와서 “바람”이 달라졌는데도 “늙은 바위”에 앉은 이끼처럼 생활의 “옷”을 벗어놓고 정신만 추구하면 생활난으로 인해 추울 수밖에 없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흐린 하늘에 이는 바람은

어제가 다르고 오늘이 다른데

옷을 벗어놓은 나의 精神은

높은 바위에 앉은 이끼처럼 추워라

겨울이 지나간 밭고랑 사이에 남은

孤獨은 神의 無才操와 詐欺라고

하여도 좋았다 - 「초봄의 뜰 안에」 부분(초판:112)

마지막 연에서는 “겨울”이 지나간 밭고랑 사이에 남아 있는 “고독”을 “신(神)”의 “무재주(無才操)”와 “사기(詐欺)”라고 해도 좋았다고 비판한다. 이것은 신이 재주가 없거나 아니면 사기로 “겨울”지나고 “봄”이 오도록 만들어 놓아서 사람들이 저마다 생활난을 해결하기 위해 밭고랑 사이에서 “고독”하게 일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휴식의 계절인 겨울이 지나고 노동의 계절인 봄이 되었으니 고독하게 개별적 생활에 집중하는 것이 “신”의 섭리라는 것이다.


한편, 김수영은 후기인 1960년대 시에서도 개별성과 보편성 사이에서 중용을 추구하는 다원적 세계시민-되기의 실천 방법으로 봄·여름·가을·겨울 사이의 무한한 순환을 지속적으로 제시하였다, 농촌에서 봄에 싹을 틔우고, 여름에 기르며, 가을에 수확하고, 겨울에 저장한다는 의미의 춘생하장(春生夏長), 추수동장(秋收冬藏)이라는 말처럼 노동의 계절에는 가장으로서 개별적 생활을 추구하고, 휴식의 계절에는 세계시민으로서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는 시간의 순환을 시중(時中)적 세계시민-되기의 실천 방법으로 일관성 있게 제시했던 것이다.


먼저, 「아픈 몸이」(1961)에서는 여름과 겨울 사이의 순환이 나타난다. 화자는 “아픈 몸”이 “아프지 않을” 때까지 가자고 자신에게 주문한다. “아픈 몸”은 「파리와 더불어」(1960), 「먼 곳에서부터」(1961)와 마찬가지로 생활난을 해결하기 위해 일하는 고통을 의미한다. 그리고 “아프지 않을” 때까지 가자는 말은 아프지 않을 때까지 무작정 가 보자는 말이 아니라, 노동의 계절인 여름이 지나고 휴식의 계절인 겨울이 올 때까지는 일하느라 몸이 아프더라도 참고 가자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그가 “골목”을 돌아서 겨울에 주로 사용하는 “베레모”를 썼다는 말은 휴식의 계절 겨울이 왔다는 것이고, “또” “골목”을 돌아서 “신”이 찢어졌다는 말은 다시 노동의 계절인 여름이 되었다는 뜻이며, “또” “골목”을 돌아서” “추위”에 온몸이 돌같이 감각을 잃었다는 말은 다시 휴식의 계절인 겨울이 왔다는 것을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아픔”이 “아프지 않을” 때가 무수한 “골목”이 없어질 때라는 말도 육체의 아픔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죽음이라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육체를 가진 존재로서 먹고살기 위해 일해야 하는 아픔은 사람이 죽기 전에는 사라질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것이다.

아픈 몸이

아프지 않을 때까지 가자

골목을 돌아서

베레모는 썼지만

또 골목을 돌아서

산이 찢어지고

온몸에서 피는

빠르지도 더디지도 않게 흐르는데

또 골목을 돌아서

추위에 온몸이

돌같이 감각을 잃어도

또 골목을 돌아서

아픔이

아프지 않을 때는

그 무수한 골목이 없어질 때 - 「아픈 몸이」 부분(초판:191)

그는 이제부터는 “즐거운 골목”이 자신을 돌 것이라고 하면서, 보편적 정신을 추구할 수 있는 즐거운 계절인 겨울이 왔다고 말한다. 그런데 “돌다 말리라”는 말을 덧붙인 이유는 겨울이 지나고 다시 여름이 오면 생활난을 해결하기 위해 일하느라 다시 “아픈 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골목”은 여름과 겨울 등으로 바뀌는 계절의 순환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온몸에서 “피”는 빠르지도 더디지도 않게 흐르지만, 계절이 바뀌면 아픈 몸이 아프지 않을 때가 오는 것이 자연적 “순환의 원리”(「긍지의 날」)라는 것이다.


시의 후반부에서는 다시 “아픈 몸”이 “아프지 않을 때”까지 가자는 말을 되풀이하면서, 지금 자신의 “발”에서 “절망의 소리”가 나오고, “병원” 냄새에 “휴식”을 얻는 소년처럼 병이 나지 않는 한 쉴 수가 없다고 한탄한다. 그리고 “교회”를 부르면서 자신의 “몸”에 “1,961개의 곰팡내”를 풍겨 넣으라고 요청한다. 이것은 당시 1961년까지 아픈 노동의 시간과 아프지 않은 휴식의 시간이 반복된 것이 곰팡내가 날 정도로 오래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썩어 가는 탑”이나 “나의 연령”, “4,294알의 구슬”(단기 4,294년) 등도 이런 자연적인 반복의 세월이 매우 오래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족의 생활난을 해결하기 위한 육체적 고통이 생겼다가 없어지기를 무수히 반복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역사이므로 이를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 연에서는 온갖 “식구”, “친구”, “적들”, “적들의 적들”과 함께 “아프지 않을 때”까지 가자고 말한다. 여기서 “식구”와 “친구”는 자신과 함께 생활난을 해결하기 위해 애쓰는 가까운 사람들이고, “적(敵)들”은 사멸시켜야 할 적대자가 아니라 샹탈 무페가 말하는 “경합”의 상대자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적들도 “아픈 몸”으로 아프지 않을 때까지 갈 수밖에 없는 같은 인간이므로 적대시하지 말고 함께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 썩어가는 탑

나의 연령

혹은

4,294알의

구슬이라도 된다

아픈 몸이

아프지 않을 때까지 가자

온갖 식구와 온갖 친구와

온갖 적들과 함께

적들의 적들과 함께

무한한 연습과 함께 - 「아픈 몸이」 부분(초판:192)

그가 “무한한 연습과 함께”라는 말로 시를 마무리하는 것도 식구든 친구든 적이든 인간은 생활난을 해결하기 위해서 아프게 일하는 연습을 무한히 해야만 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먹고살기 위해 아픈 몸으로 아프지 않을 때까지 갈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 존재라는 것이다. 결국 그는 시간적 상황에 따라 ‘아픈 몸의 시간’과 ‘아프지 않은 몸의 시간’ 사이를 무한히 순환하는 시중(時中)을 제시한다고 볼 수 있다.


이후 「설사의 알리바이」(1966)에서는 여름과 가을의 순환이 나타난다. 화자는 “설파제”를 먹어도 “설사”가 막히지 않는다고 하면서, “배”에는 푸른색도 흰색도 “적(敵)”이라고 말한다. “배”로 상징되는 먹고사는 가족의 생활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푸른색”, “흰색”으로 상징되는 보편적 정신을 생각할 겨를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물리쳐야 할 적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설파제를 먹어도 설사가 막히지 않는다

하룻동안 겨우 막히다가 다시 뒤가 들먹들먹한다

꾸루룩거리는 배에는 푸른색도 흰색도 敵이다

배가 모조리 설사를 하는 것은 머리가 설사를

시작하기 위해서다 性도 倫理도 약이

되지 않는 머리가 불을 토한다 - 「설사의 알리바이」 부분(초판:264)

하지만 그는 “배”가 모조리 “설사”를 하는 것은 “머리”가 설사를 시작하기 위해서라고 하면서, “성(性)”도 “윤리”도 약이 되지 않는 “머리”가 불을 토한다고도 말한다. 노동의 계절인 여름에 “배”가 모조리 설사할 정도로 개별적 생활에 집중한 이유는 휴식의 계절인 가을에 남편으로서의 “성(性)”과 가장으로서의 “윤리”를 생각하지 않고, “머리”가 설사할 정도로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리고 “여름”이 끝난 “벽” 저쪽에 서 있는 “낯선 얼굴”, 즉 개별적 생활만 추구하다가 이기적 속물로 변해버린 자신을 보면서, 이제 “가을”이 왔으니 “꽃”으로 상징되는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겠다고 다짐한다.


그는 “문명”의 하늘은 “무엇인가”로 채워지기를 원하므로 지금 “타의(他意)의 규제(規制)”로 시를 쓰고 있다고 하면서, 시인이지만 “타의(他意)” 즉 남편으로서 그리고 가장으로서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성(性)”과 “윤리”의 “규제(規制)”를 부정할 수 없다고 밝힌다. 자신은 가장으로서의 개별적 생활과 시인이자 세계시민으로서의 보편적 정신 사이를 무한히 순환하는 다원적 세계시민-되기를 실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어서 그는 “언어”가 “죽음의 벽을 뚫고 나가기 위한 숙제”를 방해하는 것이 “성의 윤리”와 “윤리의 윤리”라고 하면서, 물질문명 속에서 정신의 “죽음”이라는 “벽”을 뚫지 못하는 것은 남편으로서의 “성의 윤리”와 가장으로서의 “윤리의 윤리” 같은 “타의(他意)의 규제(規制)” 때문이라고 되풀이한다. 가장으로서 마땅히 가족의 생활난을 해결해야만 한다는 “윤리”적 의무를 그대로 따르면, “죽음의 벽을 뚫고 나가기 위한 숙제”인 보편적 정신을 추구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가 “중요한 것”이 “괴로움과 괴로움의 이행”이라고 말하는 것은 노동의 계절인 여름에는 개별적 생활을 추구하는 괴로움을 이행하고, 휴식의 계절인 가을에는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는 괴로움을 이행하는 시중(時中)을 통해 양극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균형을 추구해야 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言語가 죽음의 벽을 뚫고 나가기 위한

숙제는 오래된다 이 숙제를 노상 방해하는 것이

性의 倫理와 倫理의 倫理다 중요한 것은

괴로움과 괴로움의 履行이다 우리의 行動

이것을 우리의 詩로 옮겨놓으려는 생각은

단념하라 괴로운 설사

괴로운 설사가 끝나거든 입을 다물어라 누가

보았는가 무엇을 보았는가 일절 말하지 말아라

그것이 우리의 증명이다 - 「설사의 알리바이」 부분(초판:264)

마지막 연에서는 “괴로운 설사”가 끝나면 “입”을 다물고, 누가 무엇을 보았는가 “일절” 말하지 말라고 하면서 그것이 “우리의 증명”이라는 말로 시를 마무리한다. 이것은 여름에 생활을 위한 “배”의 설사가 끝나면 “일절” 말하지 말고 가을에 정신을 위한 “머리”의 설사를 시작하며, 다시 이것이 끝나면 “일절” 말하지 말고 다시 생활을 위한 “배”의 설사를 시작하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다원적 세계시민임을 “증명”하려면 개별적 생활을 상징하는 “배”의 설사와 보편적 정신을 상징하는 “머리”의 설사 가운데 어느 한 극점에 안주하려는 “나타와 안정”(「폭포」)을 단호하게 절제하고 양극 사이를 무한히 순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설사”는 “죽음을 뚫고 나가는 실천으로서의 시 쓰기가 불가능한 상황”이 아니라, 가장으로서의 개별적 생활과 세계시민으로서의 보편적 정신 사이를 무한히 순환하는 다원적 세계시민-되기의 실천 의지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이후 「꽃잎3」(1967)에서는 봄과 여름의 순환이 나타난다. 화자는 도둑질을 해야만 먹고살 수 있을 정도로 가난한 사람들을 상징하는 “순자”가 “꽃”과 “더워져 가는 화원”과 “우주”를 “완성”하고, “더워져 가는” 화원에 “잠시” 찾아오기를 그친 “벌과 나비”의 소식을 완성한다고 말한다. “순자”는 “혁명”이라는 “거룩한 순간을 체현하고 있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 집에 “고용”을 살러 온 “열네 살” 식모인데, 습관적으로 물건을 훔치는 버릇인 “도벽(盜癖)”(「식모」)이 있는 인물로서 개별적 생활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꽃이 피는 봄에는 “벌과 나비”로 상징되는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다가도 노동의 계절인 여름이 오면 잠시 멈추고, 순자처럼 개별적 생활난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우주가 완성된다는 것이다.


순자가 “우주의 완성”을 건 “한 자(字)의 생명의 귀추(歸趨)”를 지연시킨다는 말도 여름에는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보편적 정신을 잠시 미루고 도적질을 해서라도 개별적 생활난을 해결해야 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우주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보편적 정신과 개별적 생활이 모두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순자야 너는 꽃과 더워져 가는 花園의

초록빛과 초록빛의 너무나 빠른 변화에

놀라 잠시 찾아오기를 그친 벌과 나비의

소식을 완성하고

宇宙의 완성을 건 한 字의 생명의

歸趨를 지연시키고

소녀가 무엇인지를

소녀는 나이를 초월한 것임을

너는 어린애가 아님을

너는 어른도 아님을

꽃도 장미도 어제 떨어진 꽃잎도

아니고

떨어져 물 위에서 썩은 꽃잎이라도 좋고

썩은 빛이 황금빛에 닮은 것이 순자야

너 때문이고

너는 내 웃음을 받지 않고

어린 너는 나의 전모를 알고 있는 듯

야아 순자야 깜찍하고나

너 혼자서 깜찍하고나 - 「꽃잎(三)」 부분(초판:278)

그는 가난한 식모인 순자를 “썩은 꽃잎”이나 “황금빛을 닮은 것”에 비유하면서,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는 자신의 “웃음”을 받지 않고, “문명”의 “어마어마한 낭비”에 대항한다고 “공허한 투자”를 해 온 자신의 “정신”을 “비웃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순자가 “정신”만을 추구해 온 자신의 방대한 “낭비와 난센스와 허위”, 현실을 바로 보지 못하는 “눈”, 생활을 부정하고 정신만을 추구하는 “둔갑한 영혼”, 생활난을 해결하지 못해서 “애인 없는 더러운 고독”, “음탕한 전통”의 문제점을 쉽게 간파했다고 덧붙인다. “순자”는 물질문명 시대에 맞지 않게 보편적 정신만을 추구해 온 자신과 대립적으로 개별적 생활을 상징하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이어서 그는 “더워져 가는 화원”, “초록빛”의 변화로 보편적 정신을 상징하는 벌과 나비가 찾아오지 않는 “여름날”에는 “캄캄한 소식”만 기다리지 말고 개별적 생활을 추구해서 인생을 “완성”해야 한다고 외친다. 휴식의 계절인 봄에는 “벌과 나비”로 상징되는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되, 노동의 계절인 “여름”에는 가족의 생활난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식으로 생활과 정신 사이를 무한히 순환해야 “인생”이 완성된다는 것이다.

꽃과 더워져 가는 花園의

꽃과 더러워져 가는 花園의

초록빛과 초록빛의 너무나 빠른 변화에

놀라 오늘도 찾아오지 않는 벌과 나비의

소식을 더 완성하기까지

캄캄한 소식의 실낱 같은 완성

실낱 같은 여름날이여

너무 간단해서 어처구니없이 웃는

너무 어처구니없이 간단한 진리에 웃는

너무 진리가 어처구니없이 간단해서 웃는

실낱 같은 여름 바람의 아우성이여

실낱 같은 여름 풀의 아우성이여

너무 쉬운 하얀 풀의 아우성이여 - 「꽃잎(三)」 부분(초판:279)

그가 이것을 “간단”한 진리라고 말하는 것은 단순하고 간략함이라는 간단(簡單)이라는 뜻도 있지만, 잠시 그치거나 끊어짐이라는 간단(間斷)이라는 의미도 가지는 중의적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사랑의 변주곡」(1967)에서 “간단(間斷)도 사랑”이라고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휴식의 계절인 봄에는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다가, 노동의 계절인 여름이 오면 “잠시” 그치고 개별적 생활을 추구하는 “간단(間斷)”이 바로 웃음이 나오도록 “어처구니없”고, “너무 쉬운”, “간단(簡單)”한 진리라는 것이다.


그가 “여름 바람”, “여름 풀”의 아우성을 반복적으로 제시하면서 시를 마무리하는 것도 노동의 계절인 “여름”에는 가족의 생활난을 해결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아우성”이 필수적이라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휴식의 계절인 봄에는 세계시민으로서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다가도 노동의 계절인 여름에는 가장으로서 개별적 생활을 추구하면서 다원적 세계시민-되기를 실천하라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김수영의 시에는 봄에 싹을 틔우고, 여름에 기르며, 가을에 수확하고, 겨울에 저장한다는 의미의 춘생하장(春生夏長), 추수동장(秋收冬藏)이라는 말처럼 봄·여름·가을·겨울의 무한한 순환이 전기의 「여름 뜰」(1954), 「초봄의 뜰 안에」(1958)과 후기의 「아픈 몸이」(1961), 「설사의 알리바이」(1966), 「꽃잎3」(1967) 등 여러 작품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김수영은 개별성과 보편성 사이에서 중용을 추구하는 시중(時中)적 세계시민-되기의 실천 방법으로서 계절의 순환을 전기부터 후기까지 일관성 있게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 이건주 문학박사/K-문학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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