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의 시에 나타난 다원적 세계시민주의 연구

생활과 자연 사이의 순환을 통한 유목적 세계시민-되기

by 이건주

김수영은 1950년대 시에서부터 개별성과 보편성 사이에서 중용을 추구하는 다원적 세계시민-되기의 실천 방법으로 생활과 자연 사이의 무한한 순환을 제시하였다. 가장으로서 현실적 생활 공간에서 개별적 생활을 추구하다가, 세계시민으로서 초월적 자연 공간에서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는 공간의 순환을 유목적 세계시민-되기의 실천 방법으로 제시했던 것이다.


먼저, 「도취(陶醉)의 피안(彼岸)」(1954)에서 생활 공간과 자연 공간 사이의 순환이 나타난다. 화자는 자신이 사는 “지붕” 위를 지나가는, “날짐승들”의 울음소리에 취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여기서 날짐승은 초월적 자연 공간인 “피안(彼岸)”에서 날아온 자유로운 존재를 상징한다. 그는 자유로운 날짐승을 보면서 현실적 생활 공간인 차안(此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서 부끄러움을 느낀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날짐승들이 와서 앉거나 그림자가 떨어질까봐 두려워할 정도로 피안에 “취하여 살기”를 싫어한다고 분명하게 밝힌다.

내가 사는 지붕 위를 흘러가는 날짐승들이

울고 가는 울음소리에도

나는 취하지 않으련다

사람이야 말할 수 없이 애처로운 것이지만

내가 부끄러운 것은 사람보다도

저 날짐승이라 할까

내가 있는 방 우에 와서 앉거나

또는 그의 그림자가 혹시나 떨어질까 보아 두려워하는 것도

나는 아무것에도 취하여 살기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 「陶醉의 彼岸」 부분(초판:43)

그가 피안에 도취하는 것을 싫어하는 이유는 하루에 한 번씩 찾아오는 “수치와 고민의 순간”을 들키지 않기 위함이나, “솔개” 같은 사나운 놈이 기다리고 있는 생활 공간에서는 날짐승들이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도 아니라, 날짐승들이 “사람”의 “발자국” 소리보다 “시간”을 가르쳐 주는 것이 싫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여기서 사람의 “발자국” 소리는 「토끼」(1950)에서 “뛰는 훈련”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먹고살기 위해서 뛰어다녀야 하는 개별적 생활을 상징하는 반면에 “시간”은 날짐승의 발가락 사이에 잠겨 있을 운명이 가르쳐 주는 시간, 즉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는 시간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현실적인 생활 공간에서 가장으로서 당면한 가족의 생활난을 해결해야 하는데, 초월적 피안에서 날아온 날짐승들이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는 “시간”만 가르쳐 주는 것이 싫다는 것이다. 그가 “너”는 날아가면 고만이지만, 자신은 “늙어 가는 몸” 위에 앉아 있으면 고만이라고 말하는 것도 “날짐승”과 달리 “나”는 늙어 죽을 때까지 가족의 생활난을 해결하기 위해 일해야 하는 운명이라는 의미로 이해된다.


이런 해석은 그의 1954년 12월 30일자 일기로 뒷받침된다. 그는 “돈이 반가운 줄 몰라, 남이 돈을 벌어야 한다고 날뛰니까 나도 덩달아서 날뛰어보는 것이야”라고 웃으면서, “이것은 날이 갈수록 기계같이 늙어가는 나 같은 사나이들이 누구나 한 번쯤은 생각해 보았을 서글픈 회의일 것”(3판:694)이라고 말한다. 현실적 생활 공간 속에서 돈을 벌기 위해 기계처럼 늙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 부정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날짐승에게 자신의 초라한 “검은 지붕”에 “날개 소리”, “엷은 울음소리”를 남기지 말라고 주문한다. 그리고 차라리 앉아 있는 “기계”처럼 피안에 도취하지 않고 늙어가겠다고 하면서, 자신의 “겨울”을 한층 더 무거운 것으로 만들기 위해 자신의 “눈”을 더 맑게 해달라고 주문한다. 가장으로서 가족의 생활난을 해결하기 위해 “기계”처럼 일해야 되므로 “피안”에 도취하면 안 되지만, 이후 “겨울”이 오면 “날짐승”들이 사는 초월적 자연 공간으로 가서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겠다는 것이다.

나의 초라한 검은 지붕에

너의 날개소리를 남기지 말고

네가 던지는 조그마한 그림자가 무서워

벌벌 떨고 있는

나의 귀에다 너의 엷은 울음소리를 남기지 말아라

차라리 앉아 있는 기계와 같이

취하지 않고 늙어가는

나와 나의 겨울을 한층 더 무거운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나의 눈이랑 한층 더 맑게 하여다우

짐승이여 짐승이여 날짐승이여

도취의 피안에서 날아온 무수한 날짐승들이여 - 「陶醉의 彼岸」 부분(초판:44)

이후 「구름의 파수병」(1956)에서도 생활 공간과 자연 공간 사이의 순환을 찾아볼 수 있다. 화자는 자신이 “시”와는 “반역된 생활”을 하고 있다고 고백한다. 시인이자 세계시민으로서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는 시가 아니라 가족의 생활난을 해결하기 위해 돈 버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다고 스스로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초월적 자연 공간인 “먼 산정”에 서 있는 마음으로 “자식”과 “아내”와 “주위에 있는 잡스러운 물건들”을 보면서, “친구”들이 뭐라 하든 개별적 생활에서 벗어나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겠다는 “꿈”을 꾼다.

만약에 나라는 사람을 유심히 들여다본다고 하자

그러면 나는 내가 詩와는 反逆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먼 山頂에 있는 마음으로 나의 자식과 나의 아내와

그 주위에 놓인 잡스러운 물건들을 본다

그리고

나는 이미 정하여진 물체만을 보기로 결심하고 있는데

만약에 또 어느 나의 친구가 와서 나의 꿈을 깨워주고

나의 그릇됨을 꾸짖어주어도 좋다 - 「구름의 파수병」 부분(초판:87)

그는 자신이 “낡아빠진 생활”을 하는 이유가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는 것이 “함부로 흘리는 피”처럼 생각되어 거부하는 것은 아니라고 밝힌다. 그리고 “잡초” 위에 “구름”이 있듯이 개별적 생활을 상징하는 “잡초”와 보편적 정신을 상징하는 “구름”을 모두 긍정한다고 덧붙인다. 특히 여기서 구름은 “잠자는” 구름이라는 점에서 잠시 잠자는 상태로 놓아 둔 정신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지금은 가족의 생활난을 해결하기 위해서 구름으로 상징되는 보편적 정신을 재우고 “잡초”처럼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고생”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세상에서는 “철 늦은 거미”처럼 “존재 없이 살기”도 어려운 일이라고 말하는 것도 가족을 위해 고생스럽게 일하다가도 때가 되면 세계시민으로서 보편적 정신을 추구해야 하는데, “철 늦은 거미”처럼 아직도 일만 하고 있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그는 시인으로서 “남”들과 같이 가족들과 함께 살아가는 자신을 들여다보면서 쑥스러움을 느낀다. 그리고 자기의 “나체”를 더듬어보고 살펴볼 수 없는 “시인”이 된 비참한 자신을 돌아본다. 그리고 “거리”에 나와서 “집”을 보고, “집”에 앉아서 “거리”를 그리던 어리석음도 사라졌다고 한탄한다. 가장으로서 개별적 생활을 위한 “거리”와 세계시민으로서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는 “집” 사이에서 유지했던 긴장이 사라지고 지금은 오로지 일만 하고 있으므로 다원적 세계시민-되기를 실천하려는 자신의 “꿈”이 “날아간 제비”와 같이 사라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는 다시 “반역의 정신”을 말하면서, “지금”은 “시”를 “반역한 죄”에 대한 벌을 받기 위해 “산정”에서 “구름의 파수병”이 되겠다고 다짐한다. 여기서 “산정”은 푸코의 헤테로토피아처럼 “삶의 전투와 반역의 정신이 깃든 공간”, “끊임없이 생존의 길을 넘어 ‘반역의 정신’이 깃든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가장으로서 현실적 생활 공간에서 “시”와 반역된 개인적 “생활”에 전념했으니, “지금”부터는 시인이자 세계시민으로서 초월적 자연 공간인 “산정”에서 “구름”을 지키는 “파수병”이 되어 개인적 “생활”과 반역된 인간적 “정신”을 추구하겠다는 것이다.

날아간 제비와 같이 자국도 꿈도 없이

어디로인지 알 수 없으나

어디로이든 가야 할 反逆의 정신

나는 지금 산정에 있다--

시를 반역한 죄로

이 메마른 산정에서 오랫동안 꿈도 없이 바라보아야 할 구름

그리고 그 구름의 파수병인 나 - 「구름의 파수병」 부분(초판:88)

이후 「사치」(1958)에서도 생활 공간과 자연 공간 사이의 순환이 계속 나타난다. 화자는 “어둠”, “겨울”이라는 휴식의 시간에 물질문명을 상징하는 “주전자”, “흰 벽”, “불”을 등지고서 “해바라기”, “성황당”이 보이는 초월적 자연 공간인 “산”에 “나들이”를 갔다 온다. 그리고 “문명(文明)”된 “아내”를 껴안아도 좋을 것이라고 하면서, 자연 공간에서 얻은 정신적 힘을 통해 “아내”로 상징되는 개별적 생활에 맞서겠다는 의지를 드러낸다.

어둠속에 비치는 해바라기와…… 주전자와…… 흰 벽과……

불을 등지고 있는 성황당이 보이는

그 산에는 겨울을 가리키는 바람이 일기 시작하네

나들이를 갔다 온 씻은 듯한 마음에 오늘밤에는 아내를 껴안아도 좋으리

밋밋한 발회목에 내 눈이 자꾸 가네

내 눈이 자꾸 가네 - 「奢侈」 부분(초판:116)

그는 “새로 파논 우물전”과 “도배를 하고 난 귀얄”을 씻고 간 “두붓집” 아가씨에게 “수고의 인사”를 해야 한다고 하면서, 그동안 생활난을 해결하기 위해 함께 수고했던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를 한다. “나들이”를 갔다가 “아들놈”을 두고 왔다는 충격적인 말도 이제는 휴식의 계절인 겨울이 되었으니 가장으로서 자식을 부양하는 의무에서 벗어나 보편적 정신을 추구할 수 있다는 상징적인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문명된 아내”에게 실력을 보려면, 속세의 때가 묻은 “발”부터 씻고, “냉수”와 “맑은 공기”처럼 깨끗한 보편적 정신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연”이 하라는 대로 하고, 느끼라는 대로 느낄 뿐 실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초월적 자연 공간에서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다가 가족의 생활난이 심해지더라도 “실망”하지 않고 이를 감수하겠다는 것이다.

자연이 하라는 대로 나는 할 뿐이다

그리고 자연이 느끼라는 대로 느끼고

나는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의지의 저쪽에서 영위하는 아내여

길고긴 오늘밤에 나의 사치를 받기 위하여

어서어서 불을 끄자

불을 끄자 - 「奢侈」 부분(초판:116)

마지막 연에서는 “의지의 저쪽”에서 영위하는 “아내”에게 오늘 밤에 자신의 “사치”를 받기 위해 “불을 끄자”라고 거듭 말한다. 이제 휴식의 시간인 “밤”이 되었으니 “아내”로 상징되는 개별적 생활에 맞서 세계시민으로서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겠다는 것이다. 그가 이것을 “사치”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가족의 생활난을 해결하지 못한 상황에서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는 것은 분수에 지나친 생활을 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의 사치”로 상징되는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기 위해서 “어서어서 불을 끄자”라고 재촉하면서, 개별적 생활과 보편적 정신 사이를 순환하는 다원적 세계시민-되기를 실천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다.


그의 시를 리얼리즘적 관점에서 사실적 고백으로만 해석하면, 여기서 나들이를 갔다가 “아들놈”을 두고 오는 비정상적인 아버지, 그러면서도 아내와의 잠자리만 재촉하는 성적 욕망의 화신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그가 의미와 무의미,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사이에서 긴장을 추구했던 다원주의자라는 관점에서 숨어 있는 상징적 의미를 찾아보면, 휴식의 시간인 겨울밤에 가장으로서의 생활난 해결이라는 의무를 잠시 내려놓고, 세계시민으로서 보편적 정신을 추구는 “사치”를 누리려는 다원적 “의지”를 읽을 수 있다.


한편, 김수영은 1960년대 시에서도 개별성과 보편성 사이에서 중용을 추구하는 다원적 세계시민-되기의 실천 방법으로 생활과 자연 사이의 무한한 순환을 지속적으로 제시하였다. 가장으로서 현실적 생활 공간에서 개별적 생활을 추구하다가, 세계시민으로서 초월적 자연 공간에서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는 공간의 순환을 유목적 세계시민-되기의 실천 방법으로 일관성 있게 제시했던 것이다.


먼저, 「누이의 방」(1961)에서 생활 공간과 자연 공간 사이의 순환이 나타난다. 화자는 “숲속”에 있는 “누이의 방”이 “장마”가 지나면 익어 가는지 묻는다. 그리고 “팔월의 밤”에 누이의 방이 너무 정돈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여기서 “팔월의 밤”은 이후 「여름밤」(1967)과 마찬가지로 노동의 시간인 여름을 뜻하는 “팔월”과 휴식의 시간인 “밤”이 공존하는 다원적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팔월”에는 현실적 생활 공간에서 개별적 생활을 위해 일하고, “밤”에는 초월적 자연 공간에서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면서 다원적이고 입체적으로 살아야 하는데, 누이는 너무 “평면”적으로 하나에만 치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밤에는 “서울”의 얼치기 “양관(洋館)”에 있는 여자의 “댓가지 백” 속에 “조약돌”이 들어 있는 “공간의 우연”에 놀란다는 말도 현실적 생활 공간인 “서울”의 양관에서 물질문명과 돈을 상징하는 “백” 속에서 이와 모순되는 자연적인 “조약돌”이 들어 있듯이 서로 이질적인 생활 공간과 자연 공간 사이를 순환해야 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똘배가 개울가에 자라는

숲속에선

누이의 방도 장마가 가시면 익어가는가

허나

人生의 장마의

추녀 끝 물방울 소리가

아직도 메아리를 가지고 오지 못하는

八月의 밤에

너의 방은 너무 정돈되어 있더라

이런 밤에

나는 서울의 얼치기 洋館 속에서

골치를 앓는 여편네의 댓가지 백 속에

조약돌이 들어 있는

空間의 偶然에 놀란다

누이야

너의 방은 언제나

너무도 정돈되어 있다

입을 다문 채

흰 실에 매어달려 있는 여주알의 곰보

창문 앞에

安置해 놓은 당호박

平面을 사랑하는

코스모스

역시 平面을 사랑하는

킴 노박의 사진과

國內小說冊들……

이런 것들이 정돈될 가치가 있는 것들인가

누이야

이런 것들이 정돈될 가치가 있는 것들인가 - 「누이의 방」 전문(초판:186-187)

그는 누이의 방이 너무도 정돈되어 있다고 되풀이하면서, 누이가 초월적 자연 공간인 “숲 속”에서 입을 다문 채 매달려 있는 “여주알”이나 창문 앞에 안치해 놓은 “당호박”, “코스모스”처럼 보편적 정신만 추구하는 것이나, 당시 미국 영화 현기증(Vertigo, 1958)에 출연했던 배우 “킴 노박의 사진”, “국내 소설책들”로 상징되는 비현실적인 세계만을 추구하는 것을 “평면적”이라고 지적한다. 현실적 생활을 무시하고 과도하게 보편적 정신만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누이”에게 이런 평면적인 것들이 “정돈”될 가치가 있는 것들이냐고 자꾸 묻는 것도 “팔월”의 “밤”에는 개별적 생활과 보편적 정신 어느 하나에만 머무르는 평면적이고 정돈된 삶이 아니라, 양자 사이를 무한히 순환하는 입체적이고 다원적 삶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노동의 계절인 팔월과 휴식의 시간인 밤이 결합되어 있는 팔월의 밤에는 현실적 생활 공간인 “서울”에서의 개별적 생활과 초월적 자연 공간인 “숲속”에서의 보편적 정신 사이를 순환하면서 끊임없이 긴장을 유지하라는 것이다.


이후 「이사」(1964)에서도 생활 공간과 자연 공간 사이의 순환을 찾아볼 수 있다. 화자는 “자연” 옆에 있는 “막다른 방”으로 이사를 왔다고 말한다. 그리고 “옆방”인 자연을 “푸석한 암석”, “구름”, “갯벌”, “벌레” 등으로 묘사하면서, 자연이 보기 싫어지기 전에 이것을 차단할 “부엌문”이 가까운 거리에 있다고 덧붙인다. 초월적 자연 공간 속에서 보편적 정신을 추구하다가 싫증이 나면 바로 옆에 있는 현실적 생활 공간인 “부엌”으로 와서 먹고살기 위한 개별적 생활에 충실하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막다른 방”은 현실적 생활 공간인 “부엌”과 초월적 공간인 “자연” 사이에 있는 다원적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나의 방은 막다른 방

이제 나의 방의 옆방은 自然이다

푸석한 암석이 쌓인 산기슭이

그치는 곳이라고 해도 좋다

거기에는 반드시 구름이 있고

갯벌에 고인 게으른 물이

벌레가 뜰 때마다 눈을 껌벅거리고

그것이 보기싫어지기 전에

그것을 차단할

가까운 距離의 부엌문이 있고

아내는 집들이를 한다고

저녁 대신 뻘건 팥죽을 쑬 것이다 - 「移舍」 전문(초판:232)

그는 아내가 “집들이”로 이웃들과 나누어 먹을 “팥죽”을 쑬 것이라고 말로 시를 마무리한다. 이것도 “자연”에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왔지만, 보편적 정신만을 추구하지 않고 평범한 이웃들과 함께 개별적 생활에도 충실하겠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그는 생활로부터 도피해서 자연으로 온 것이 아니라, 생활과 자연 사이를 순환하기 위해 위해 다원적 공간인 “막다른 방”으로 이사를 온 것이다. 결국 “막다른 방”은 가장으로서의 개별적 생활과 세계시민으로서의 보편적 정신 사이를 무한히 순환하는 다원적 세계시민-되기를 실천하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김수영의 시에는 생활 공간과 자연 공간 사이의 무한한 순환이 전기의 「도취의 피안」(1954), 「구름의 파수병」(1956), 「사치」(1958)와 후기의 「누이의 방」(1961), 「이사」(1964) 등 여러 작품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그는 개별성과 보편성 사이에서 중용을 추구하는 다원적 세계시민-되기의 실천 방법으로 현실적 생활 공간과 초월적 자연 공간 사이의 순환을 전기부터 후기까지 일관성 있게 제시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김수영의 시 작품에 나타난 중용의 실천 방법으로서 시공간의 순환을 『중용(中庸)』의 시중(時中)과 미셸 푸코의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 개념을 중심으로 살펴본 결과, 그가 개별성과 보편성 사이에서 중용을 추구하는 다원적 세계시민-되기의 실천 방법으로 시공간의 순환을 제시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따라서 김수영은 이론과 실천 양면에서 다원적 세계문학을 전기부터 후기까지 일관성 있게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 이건주 문학박사/K-문학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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