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주의 박사논문 「김수영의 시에 나타난 다원적 세계시민주의 연구」(2025)를 알기 쉽게 수정 보완한 [K-문학:다원적 세계시민 김수영]의 일부입니다. 출간 예정인 신간 도서의 초고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윌리엄 제임스는 1909년에 출간한 『다원주의자의 우주』에서 헤겔의 변증법을 대표적인 일원론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헤겔의 변증법이 중시하는 ‘대립’은 구체적인 삶의 전체 구성을 확립시키는 것으로 다원주의적 사유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인접하는 것들과의 마찰과 대립”을 가리키는 “변증법적인 운동” 자체는 “사물들에 대한 다원론적 비전의 용어들에 의해 기술되고 설명될 수 있는 운동”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헤겔이 다원주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변증법을 “비경험적인 견지”에서 보면서 궁극적으로 “고차적 종합”을 추구했기 때문에 일원론으로 환원시키고 말았다고 비판했다. 헤겔의 변증법은 “모든 모순이 조화를 이루게 될 유일한 전체”인 “절대정신”을 추구함으로써 “부분들을 전체에 포섭시키는” 일원론적 사고방식으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헤겔은 『정신현상학』 서문에서 변증법적 운동은 대립을 통한 내면적인 저지에서 그치지 말고 자신 안으로 되돌아가는 “개념의 자기 내 복귀”, “자기 내 귀환”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정신의 보편성”을 강조하면서, “개인은 더욱더 자신을 망각”해야 하고, “개인에게도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라는 말을 했던 것도 사실이다.
헤겔이 “참된 것은 전체적인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했듯이 그의 변증법은 개별성에서 벗어나 정신의 보편성을 획득하는 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제임스는 헤겔이 사물들 사이의 관계를 변증법적인 것으로 만듦으로써 자신의 체계를 구체화시키려고 했지만, “대상들의 차이로부터 자아의 동일성으로 항상 복귀”하기 때문에 결국 “모든 특수자를 포기”하게 된다고 비판했다. 절대정신은 대상들로부터 그 자신을 분리시켜서 대상을 의식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것은 대상들을 더 고차적인 하나의 자기의식의 요소들로 만들면서 한데 묶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제임스는 “사실이 우선이고, 그 뒤를 따르는 우리의 모든 개념적인 처리 방식은 부적절한 차선책”으로서 결코 완전히 대등할 수 없다고 하면서, “현상의 총체는 개별 현상과 같지 않기 때문”에 절대주의가 주장하듯이 “다자로서의 세계”는 “하나로서의 세계”와 같은 것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헤겔의 변증법이 추구하는 현상의 총체는 실제의 개별 현상과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세계를 그 자체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제임스는 다원주의적 세계를 “제국”이나 “왕국”이 아니라 “연방공화국”에 빗대어 설명했다. 다원주의는 세계가 서로 “함께” 공존하지만, 어떤 것도 모든 것을 포함한다거나 모든 것 위에 군림하지 않으며, 통일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무엇인가 늘 빠져나가고, 뭔가 다른 여분이 늘 남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결국 제임스의 다원주의는 연방공화국을 구성하는 개별자들의 독자성을 긍정하고 끊임없는 긴장 속에서 다양하게 연결되는 방식(A↔B)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정(A)과 반(B)의 투쟁을 통해 고차원적 합(C)으로 발전하는 헤겔의 변증법(A↔B⇒C)에서 합(C)의 과정을 배제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천 개의 고원』(2001)에서 제시한 “다양체” 논의도 윌리엄 제임스의 다원주의와 연결된다. 그들은 “의식과 무의식, 자연과 역사, 영혼과 육체의 분리”라는 이분법을 바탕으로 하는 헤겔 변증법의 “총체화, 전체화, 통일화”를 비판하면서, 다양체는 “독자성”의 “구성주의적” 체계로서 어떠한 통일도 전제하지 않으며, 결코 “총체성”으로 들어가지 않는 “단호한 반헤겔적” 시도들에 기반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들은 각각의 독자성을 유지하면서 ‘되기=생성’의 방식으로 다양한 네트워크를 생성해 나가는 “사이-존재”인 “리좀(rhizome)”이라는 다원주의적 체계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그리고 리좀은 “감자”나 “잡초”처럼 “지면을 따라 모든 방향으로 갈라지는 확장에서 구근과 덩이줄기로의 응고에 이르기까지” 매우 잡다한 모습을 띠고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제임스가 다원적 세계를 연방공화국이라고 규정하면서 “항상 ‘그리고’라는 낱말이 모든 문장 뒤에 따라붙는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그들도 리좀이 “그리고…그리고…그리고…라는 접속사를 조직으로 갖는다.”라고 강조했다.
그들은 현실 세계에는 ‘절편들을 두 개씩 대립’시키고, ‘절편들의 모든 중심들을 공명’시키며, ‘등질적이고 분할 가능한’ 절편들을 생산하는 나무 유형의 ‘이분법적 기계’가 작동하고 있는데, 이를 넘어서기 위해 견고한 이항적 절편들 ‘사이’로, 분자보다 작은 또 다른 방향으로, 도주선들을 끊임없이 흐르게 하는 ‘리좀적 기계’들을 작동시킬 것을 제안했다.
한편, 샹탈 무페는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의 갈등은 근절될 수 없으며 근절되어서도 안 된다.”라고 하면서, 변증법적으로 종합될 수 없는 적대적 양극 사이에서 민주적으로 “경합”하는 다원주의를 제시하였다. 근절할 수 없는 긴장과 갈등 상황 속에서도 자유민주주의 질서를 구성할 수 있으려면, 타자를 완전히 파멸시키려는 적(敵)들 사이의 쟁투가 아니라, 그들의 이념과 격렬하게 다툴지라도 자신의 이념을 옹호할 그들의 권리를 문제 삼아서는 안 되는 “대결자”들이 스포츠처럼 공정하게 경쟁하는 “경합”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김수영이 제시한 개별성과 보편성 사이의 긴장은 대립적 양극을 고차원적으로 종합하는 변증법이 아니라, 각각의 독자성을 긍정하면서 끊임없는 긴장과 경합을 추구하는 다원주의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김수영이 여러 산문에서 변증법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는 「모더니티의 문제」(1964)에서 박성룡의 시를 평가하면서, “그의 한계는 언어가 아니라 ‘내 언어’이며, 자기가 요리할 수 있는 내용과 대척될 수 있는 언어인데, 이런 기술상의 변증법적인 언어는 배경의 역할을 하는 내용이 없이는-즉, 내용이 새로워지면 생채(生彩)를 띨 수 없게 된다.”(3판:580)라고 말했다.
이후 「참여시의 정리」(1967)에서도 신동엽의 시 「아니오」에는 “우리가 오늘날 참여시에서 바라는 최소한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고 하면서, “이 시는 종연에 가서 전연에서 보일락 말락 하게 비추었던 음부(陰部)의 증인을 다시 감추고, 그림자의 의식을 버리면서, 한 차원 더 높은 문명비평에의 변증법을 완성할 것”(3판:496)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는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1966)에서는 “의미를 이루려는 충동”과 “의미를 이루지 않으려는 충동”이 서로 강렬하게 충돌하면 충돌할수록 힘 있는 텍스트가 나온다고 하면서, “이런 변증법적 과정이 어떤 선입관 때문에 충분한 충돌을 하기 전에 어느 한쪽이 약화될 때 그것은 텍스트의 감응의 강도에 영향을 줄 뿐만 아니라 텍스트의 성패를 좌우하는 치명상을 입히는 수도 있다.”(3판:462)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반시론」(1968)에서도 “대극의 긴장”을 고차원적으로 종합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싸움, 더 큰 싸움, 더, 더, 더, 큰 싸움……”을 통해 끊임없이 긴장을 유지하는 방법으로 “무한한 순환”을 제시했다. 따라서 그는 헤겔의 변증법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도 고차원적 종합보다는 “충분한 충돌”이나 “더 큰 싸움”을 강조함으로써 다원주의적 관점을 취했다고 볼 수 있다. 강신주의 말대로 김수영은 “헤겔처럼 모든 개별자를 포괄하는 절대정신”이 아니라, “모든 개별자들이 어떤 절대자에도 포섭되지 않고 단독적인 삶을 영위해야 한다는 명령”을 추구했던 것이다.
김수영이 대립적 양극 사이의 긴장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변증법이 아니라 다원주의를 제시했다는 것은 그가 시「중용에 대하여」(1960), 「술과 어린 고양이」(1961)와 여러 산문에서 제시한 중용(中庸)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1950년대 말이나 1960년대 초반에 발표된 것으로 보이는 산문 「구두」에서부터 “중용”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였다. 여기서 “구질구질한 구두를 신고 다니는 사람의 얼굴이 다시 한번 치어다 보이듯이 너무 광채가 휘황한 구두를 신고 다니는 사람도 나에게는 적지않이 불쾌한 감을 준다.”라고 하면서, “구두 닦는 “길”에도 중용이 필요한가 보다. 그러나 나는 이 “길”에도 중용의 덕을 발휘하지는 못하고 있다.”라고 한탄하였다.(3판:91) 구두를 닦는 일에도 지나치게 더러워서 “구질구질한 구두”나 지나치게 깨끗해서 “광채가 휘황한 구두”라는 양극 사이에서 “중용의 덕”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후 「평균 수준의 수확」(1966)에서도 허소라의 시를 평하면서 “요즘 현대시에서 논의되는 형태(예술성)와 내용(사회성)의 양극을 두고 볼 때 온화한 중용의 길을 택하고 있어 보이며 그러면서도 산뜻한 현대적 감각미를 풍길 줄 아는 것”이 특색이라며 “중용”이라는 말을 시평(詩評)에 직접 사용했다.(3판:631) 당시에 허소라의 시는 형태와 내용, 예술성과 사회성 사이의 대립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어느 한 극점에 치우치지 않고 “온화한 중용”의 길을 택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수영이 제시한 중용은 헤겔의 변증법이 아니라 윌리엄 제임스의 다원주의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최영진은 『주역』에 헤겔의 정(正)·반(反)에 대비될 수 있는 양·음이라는 개념은 나오지만 합(合)에 해당되는 개념은 명확히 나타나지 않는다고 하면서, 헤겔의 변증법처럼 “음·양이 지양되어서 도(道)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상반적인 타자를 적대적인 관계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성을 확보하기 위한 필수적인 전제”로서 요구하고, “상반성을 매개로 하여 서로를 성취”시키면서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대대(對待)” 관계라고 설명했다.
따라서 김수영이 민족과 세계, 가족과 인간 사이의 긴장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제시한 중용은 대립적인 양극을 고차원적으로 종합하는 변증법(A↔B)⇒C)이 아니라, 양극의 독자성을 긍정하면서 끊임없이 긴장과 연결을 추구하는 다원주의(A↔B)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찬도 중용에서는 상반적인 타자를 적대적인 관계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성을 확보하기 위한 필수적인 전제”로서 요구하는 “대대(對待) 관계”로 이해한다고 설명했다. 강신주가 “김수영이 꿈꾼 중용의 사회는 단독성이 실현되는 동시에 보편성도 확보되는 사회”라고 보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된다.
유학에서 ‘중용(中庸)’은 균형과 절제로 나누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먼저, 중용의 일차적 의미는 ‘균형’이다. 일찍이 주자(朱子)는 중용이라는 말에서 “중(中)은 치우치거나 기울지 않고, 과하거나 모자라지 않는 것이고, 용(庸)은 특별한 일이 없는 보통 때이다.”(中者 不偏不依 無過不及之名 庸 平常也)라고 풀이했다.
물론 중용이 산술적으로 고정된 중간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이기동은 “중(中)”이 말하는 “가운데”는 “단지 한가운데의 고정된 지점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수평을 유지하면서 전체를 들어 올릴 수 있는 지점”이므로 “매달린 무게의 변화에 따라” 바뀔 수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중용은 상황에 따라 적절한 균형을 찾아가는 “동적 평형” 상태라는 것이다.
중용에서 ‘균형’은 대립적인 양극의 조화와 공존을 의미하기도 한다. 『중용(中庸)』제12장에는 “『시경』에 ‘솔개는 날아서 하늘에 이르거늘 고기는 못에서 뛴다’ 하니, 그 위와 아래로 나타남을 말한 것이다.”(詩云鳶飛戾天 魚躍于淵 言其上下察也)라는 말이 나온다. 이기동은 “하늘을 날고 있는 솔개와 물에서 헤엄치고 있는 물고기는 존재의 본질인 “삶에 대한 의지”가 위와 아래에 동시에 나타나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는 모습”이라고 하면서, “상반되고 대립되는 관계에 있는 것같이 보이는 현상들도 사실은 조화 속에 있음”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중용(中庸)』 제30장에도 “만물은 함께 자라도 서로 방해하지 않고, 도(道)는 함께 행하여져도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 작은 덕은 냇물처럼 흐르지만, 큰 덕은 일시에 변화시킨다. 이것이 천지가 위대하게 되는 까닭이다.”(萬物並育而不相害 道並行而不相悖 小德 川流 大德 敦化 此天地之所以爲大也)라는 말이 있다. 이기동은 “만물은 각각 자기의 특징대로 다양하게 삶을 유지하지만, 각각의 삶이 얻는 혜택이 근본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에 그 다양성이 차별성으로 나타나지 않고 조화로움으로 나타나 서로 해치지 않는다.”라고 풀이했다.
신정근도 이 구절에 대해서 “천지(天地)는 다양한 존재를 하나같이 끌어안을 뿐이지, 어떤 이유로 빼 버리거나 내쫓아야 하는 대상을 나열하지 않는다.” 그래서 “모두가 주체로서 이 천지의 세계에 참여한다.”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중용』의 세계는 “실천적 지혜가 사람의 도리, 세계의 균형성을 적용하면서 찾는 최적의 길”이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기 때문에 “방법론적 다원주의”라고 부를 수 있다고 말했다. 서로 반대되는 행위가 제각각 일어나도 모두 도리에 어긋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유학에서 중용은 대립적인 양극 사이의 균형과 조화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양극을 고차원적으로 종합하는 변증법(A↔B⇒C)이 아니라, 양극의 독자성을 인정하고 다양한 연결과 경합을 추구하는 다원주의(A↔B)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김수영의 시에서는 개별성과 보편성 사이에서 중용적 균형을 추구하는 다원적 세계시민이 자주 나타난다. 특히 그는 「잔인의 초」(1965)의 「시작 노트」에서 “생명과 생명의 대치를 취급한 주제 면에서나 호흡 면”에서 「만용에게」와 같은 계열에 속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거기에 있는 “너와 나는 “반반(半半)”이라는 의미의 말”과 비슷한 “일 대 일의 대결의식”이 「잔인의 초」에도 들어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래도 나의 본질에 속하는 것 같고 시의 본질에 속하는 것” 같다고 강조했다.(3판:546-547) 그는 “반반(半半)”, “일 대 일의 대결의식”으로 표현된 중용적 균형을 자신의 “시의 본질”로 인식했던 것이다.
한편, 유학의 『중용(中庸)』에서는 대립적 양극 사이에서 중용을 실천하기 위한 의지로서 “절제”를 매우 강조한다. 제1장에는 “기쁨·노여움·슬픔·즐거움의 감정이 드러나지 않은 것을 ‘중’이라 하고, 드러나서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을 ‘화’라 한다. ‘중’이라는 것은 천하의 위대한 근본이고, ‘화’라는 것은 천하에 통달되는 ‘도’인 것이다.”(喜努哀樂之未發 謂之中 發而皆中節 謂之和 中也者 天下之大本也 和也者 天下之達道也)라는 말이 나온다.
신정근은 “중화(中和)”라는 말에서 “중(中)”은 “사람이 사태를 제대로 가늠하여 적합하게 대처할 수 있는 안정되며 온전한 상태”이고, “화(和)”는 “감정을 드러내지만 절도와 한도를 벗어나지 않아” 정감과 행실이 잘 어울리게 하는 것으로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감정을 통제할 수 있는 정상 상태”라고 풀이했다. 그리고 『중용』에서는 “화(和)”가 아닌 “불화(不和)”, 즉 “절제되지 않은 감정”을 규제하는 방법으로 중(中)과 정(靜)을 내놓았다고 하면서, 우리가 “중정(中靜)”에 들게 된다면 “자기감정의 주인”으로서 세계와 조우할 수 있는 역량을 창출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대립적 양극 사이에서 중용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감정의 절제가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김수영은 개별성과 보편성 가운데 어느 한 극점에 안주하려는 감정을 절제하고, 양극 사이를 무한히 순환하는 분열적 세계시민을 제시하였다. 전기 시「봄밤」(1957)에서는 “절제”가, 후기 시「사랑의 변주곡」(1967)에서는 “절도”라는 말이 직접 제시되어 있다. 특히 그가 「반시론」(1968)에서 제시한 “무한한 순환”은 개별성을 선택했다가 보편성을 선택하고 다시 개별성을 선택하는 식으로 양극 사이를 무한히 순환하는 것이므로 어느 한 극점에 안주하려는 “방심”(「달나라의 장난」)이나 “나타와 안정”(「폭포」)을 단호하게 끊어내고, 양극 사이에서 중용을 추구하려는 의지인 ‘절제’를 내포한다고 볼 수 있다.
그는 개별성과 보편성 사이를 무한히 순환하는 다원적 세계시민이 양자택일식의 이분법이 지배하는 세인(世人)들에게는 비정상적이고 분열적인 존재로 인식될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분열적 세계시민을 제시한 것은 “진창의 현실과 피안의 이상 사이의 모순” 때문에 발생한 “개화기 이래 한국 지식인에 고유한 광기”일뿐만 아니라, 그가 일부 산문에서 직접 언급했던 사르트르의 분열적 존재론을 수용한 결과로 볼 수도 있다.
당시에 세계문학공화국의 수도라고 할만 했던 파리에서 “막대한 공인 권력”으로 인해 “문학적 현대성을 구현할 일종의 화신”으로 군림했던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인간을 “즉자(卽自)”와 “대자(對自)”의 분열적 존재로 규정했다. 그에 의하면, “즉자”는 주어진 “현상의 존재”로서 “그것이 있는 그대로의 것”으로 규정되는 내재적이고 사실적인 존재인 반면에 “대자”는 현상을 지각하고 이해하는 “의식의 존재”로서 “그것이 있지 않은 것으로 있고, 그것이 있는 것으로 있지 않은 것”으로 규정되는 초월적이고 자유로운 존재이다.
사르트르는 자유로운 대자를 강조하면서도 대자가 즉자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항상 대자에 붙어 다니면서 대자를 즉자존재와 연결시키지만, 그 자체는 결코 파악되지 않는” 즉자의 우연성을 “사실성”이라고 불렀다. 또한 대자는 자율적인 실체가 아니라 즉자를 무화(無化)하는 “절대적인 사건”으로만 나타나므로 “대자에 대한 즉자의 존재론적 우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사르트르는 즉자와 대자를 “끊임없이 분열 상태에 놓여 자연적 현재에서 초월로, 또 그 반대의 끊임없는 활주”를 하거나, “있는 그대로의 것인 존재에서 있는 그대로의 것이 아닌 존재를 향한, 또 그 반대로 있는 그대로의 것이 아닌 존재에서 있는 그대로의 것인 존재를 향한 끊임없는 이행(移行)”의 관계라고 보았다. 그리고 즉자와 대자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면서도 상대적인 독립성으로 인해 통합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통합적”인 전체가 아니라 “통합해소적인 전체”라고 하면서, 내재성과 초월성 사이를 끊임없이 이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수영은 사르트르가 제시한 즉자와 대자, 내재성과 초월성 사이의 “분열”과 끊임없는 “이행”을 민족과 세계, 가족과 인간 사이를 끊임없이 이행하는 분열적 세계시민으로 변용했다고 볼 수 있다.
앞으로 그가 개별성과 보편성 사이에서 중용적 균형을 추구하는 다원적 세계시민과 어느 한 극점에 안주하려는 감정을 절제하고, 개별성과 보편성 사이를 끊임없이 이행하는 분열적 세계시민을 일관성 있게 제시했다는 사실을 해당 시 작품에 대한 면밀한 분석을 통해 밝혀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서 그가 개별성과 보편성을 고차원적으로 종합하는 보편적 세계문학이 아니라, 양극 사이에서 중용적 균형과 절제를 추구하는 다원적 세계문학을 제시했다는 사실이 밝혀질 것으로 기대된다.
- 문학박사 이건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