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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주 Feb 06. 2021

김수영과 다원주의 : 라디오 계

김수영과 다원주의 : 라디오 계(界)


김수영은 <반시론>에서 맹자(孟子) <양혜왕상(梁惠王上)> 편에 나오는 “항산(恒産)이 항심(恒心)”이라는 구절을 인용하면서, 먹고사는 생활의 불안이 없어져야 정신의 불필요한 소모가 없어진다고 말한다. 맹자는 “일정한 재산이 없으면서도 항상 일정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자는 오직 선비”라고 했지만, 김수영은 선비(=시인)마저도 생활의 불안을 느끼지 않아야 “정신의 불필요한 소모”가 없어진다고 말하는 것이다. 


더구나 그는 “약간의 사치를 하는 것도 싫지 않고, 남이 하는 사치도 자기의 사치보다 더 즐겁게 생각된다. 하늘은 둥글고 땅도 둥글고 사람도 둥글고 돈도 둥글다. 그리고 시까지도 둥글다.”라고 하면서 둥근 ‘돈’을 추구하는 현실적인 ‘둥근 시’를 긍정하는 태도를 보인다.


그는 현실적 생활을 긍정하는 둥근 시 중에서도 “이 땅에서는 발표할 수 없는 것이 튀어나오는 때가 있다”라고 하면서 <라디오계>의 시작 노트를 제시한다. <라디오계>는 현실 생활을 긍정하는 ‘둥근 시’이지만, 단순히 “부르주아의 손색 없는 시”가 아니라, 오히려 민족의 분단 현실을 변혁하는 불온시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라디오계>에서 시적 화자는 라디오 주파수를 나열하다가 “이북(以北) 방송”인 “10점 5”를 만나자 몸서리를 치며 놀란다. 그는 당시 청취가 금지된 북한 방송을 통해 언론의 자유와 민족의 분단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반시론>에서도 최근에 “신문 칼럼”에 보낸 원고가 수정을 당하여 “순결”을 잃었다고 고백하면서, 글이 자유롭게 내놓여질 수 있는 세상의 문제를 제기한다. 


하지만 그가 이 시에서 민족적인 과제만을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과거 일본 방송이 들리지 않을 때는 라디오에서 나오는 “낭랑한 일본 말”의 “달콤한 억양”이 “금덩어리”처럼 소중했지만, 지금 “HiFi”로 들을 수 있게 되자 “값없게 발길에 차이는” 음성으로 전락하여 안 듣게 된 이상한 일에 주목한다.


여기서 그는 “HIFI가 나오지 않았을 때”를 “비참한 일들이 라디오 소리보다도 더 發狂을 쳤을 때”와 병치시키고, 일본말을 돈을 상징하는 “금덩어리 같던 소리”라고 비유하고 있다. 따라서 잘 들리지 않아서 귀하게 여겨졌던 일본 방송이 원음을 충실하게 재현하는 HIFI(High Fidelity) 기술 덕분에 잘 들리자 오히려 안 듣게 되었듯이 과학기술 발전으로 인한 생활 수준의 향상이 일본에 대한 동경에서 벗어나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지름길이라는 의미로 이해된다. 따라서 이것은 단순히 “시인이 갖고 있는 천성적인 불온성, 내면의 불온성”의 표현이 아니라, 과학기술과 현실 생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어서 그는 “이북(以北) 방송”도 “불온(不穩) 방송”이 안 되어 쉽게 들을 수 있는 날이 오면 그때는 아무런 “미련”이나 “회한”도 없이 북한 방송을 안 듣게 되는 날이 올 것이라고 말한다. HiFi 기술 덕분에 일본 방송을 쉽게 들을 수 있게 되자 오히려 안 듣게 된 것처럼, 북한 방송도 불온 방송이라고 금지하지 않으면 오히려 안 듣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가 시의 마무리 부분에서 북한 방송이 불온 방송이 안 되는 날까지는 “이 엉성한 조악한 방송”들이 “어떻게” 돼야 하고 “어떻게” 될 것이라는 “극도의 낙천주의”를 가진다고 하면서, 그 이유가 “저녁밥상”을 물리고 나서 “배가 부른 탓”이라고 밝히는 것도 현실 생활에 대한 강조로 읽힌다. 과학기술의 발전을 통해 남한 사람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도록 생활을 안정시키면 굳이 북한 방송을 들을 필요가 없어질 것이므로, 북한 방송이 불온 방송이 안 되는 날이 저절로 오게 될 것이라는 낙천주의를 갖게 된다는 말이다.


그가 <반시론>에서 현실 생활의 “탈출구”로서 동짓날에 팥죽을 쑤어 먹듯이 창녀를 찾아간다고 말하는 것도 “자본주의시대 성 통치술에 반항하는 행위”나 “기성의 부르주아적 가치를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실천으로서의 “초현실주의적 일탈”이 아니라, 시인들이 원고를 수정 당하면서 “순결”을 잃는 민족적인 문제보다 생활난을 해결하기 위해 “순결”을 잃고 살아야 하는 지구적인 자본주의의 문제가 더욱 중요하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그가 창녀를 사는 것은 자본주의 시대에 가장 비인간적으로 살아가는 창녀를 통해 <라디오계>에서 제시했던 현실적인 생활난 해결의 중요성을 강조하려는 상징적 행위라는 해석이다.


그가 계집보다도 새벽의 산책이 몇백 배나 더 좋다거나, 한적한 새벽 거리에서 잠시나마 “이방인의 자유”의 감각을 맛본다고 말하는 것, 그리고 머리가 훨씬 단순해지고 성스러워지기까지도 한다고 밝히는 것은 “자본주의의 사회”에서 생활난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자유가 무엇보다 절실하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그가 등굣길에 나온 여학생 아이들을 만나도 부끄럽지 않고 오히려 이것을 “격의 없이 애정으로 바라볼 수 있는 순간, 때묻지 않은 순간, 가식 없는 순간”이라고 강조하는 것도 생존을 위해 순결을 팔아야 하는 비인간적인 자본주의의 문제를 있는 그대로 바로 보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그는 이런 휴식의 기회가 요즘에 와서는 놀라울 정도로 이용하는 도수가 적어졌다고 하면서, 이를 “생활이 안정된 탓”이라고 보다 직접적으로 말한다. 그리고 생활이 안정되고 여유가 생기면 둔해지지만 이조차도 “무한대로” 좋다고 하면서 생활의 안정과 여유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한다. 창녀처럼 순결을 잃고 살아야 하는 인간존재가 사라지도록 현실적인 생활난을 해결하는 일이 급선무라는 것이다.


이어서 그가 “책이 선두가 아니다. 작품이 선두다.”라고 말하는 것도 현실적인 생활에 대한 강조로 보인다. 현실 생활을 노래하는 작품이 먼저 나오고 나서 책이 정신적인 위치를 선사해 줘야지, “정신”이 과도하게 살이 찌면 “목”의 심줄에 “경화증”이 생겨서 먹고사는 생활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는 <라디오계>가 ‘책=정신’만을 추구하다가 경화증에 걸린 상태에서 ‘목=생활’을 추구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는 “배부른 시”라고 설명한다.


곧이어 그는 “잡음은 인간적이다. 그것은 너그러운 폭을 준다.”라고 하면서, 잡음이 오히려 “약”이 되고, 작품에 뜻하지 않은 “구명대”의 역할을 해주기도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일부로 책이 있는 “서재”로 쓰던 방을 내놓고 생활을 하는 “안방”에서 일을 한다고 밝힌다. 이것은 “밥을 먹거나 무엇을 씹는 소리”, 즉 먹고사는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운명을 지닌 인간은 현실 생활의 안정을 추구하는 ‘잡음’과 ‘배부른 시’를 거부하지 말고 너그럽게 긍정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그가 요즘의 강적이 하이데거의 「릴케론」이라고 하면서, 이런 너그러움은 “시를 못 쓰는 한이 있어도 지켜야 할 것”인지도 모르며, “새로운 시를 개척해 나가는 무한한 보고(寶庫)”가 거기에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현실 생활을 추구하는 배부른 시의 가치를 긍정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현실 생활의 안정을 추구하다 보면 과거 릴케와 같은 초월적인 “시”를 쓰지 못할 수도 있지만, 미래의 새로운 시를 개척해 나가는 보물 창고인 현실 생활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물론 그가 말하는 ‘배부른 시’가 ‘참여시’와 동일한 개념인 것은 아니다. 그는 <반시론>의 마무리 부분에서 당시의 참여시가 “문화적 쇄국주의”나 “편협한 민족주의”에 사로잡혀 있다고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리고 “천년 후의 우주탐험”을 그린 “미래의 과학 소설”, “거대한 스케일의 과학시”, “미래의 과학 시대의 율리시즈”를 거듭 제시하면서, “지구를 고발하는 우주인의 시”, 성서에 나오는 아담과 이브의 최초의 눈물과도 통하는 “지구인들의 눈물”을 그리는 인간적인 시를 강조한다.


그는 민족 통일이 “참여시의 종점이 아니라 시발점”이라고 하면서, 이제는 참여시의 시발점인 민족의 정신만을 강조하지 말고, 참여시의 종점인 인간적인 생활의 안정을 추구하는 배부른 시로 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반시론>의 반시는 “하이데거에 의한 것처럼 기술문명시대에 대응하기 위한 ‘참다운 입김’, 새로운 시”로서 “주체와 객체가 모두 사라지고 언어만 남은” 시이거나, “비진리를 폭로하는 전략”을 통해 “거짓을 깨고 진리로 향해가는 실험시”가 아니라, 지구적 차원에서 전개되는 자본주의로 인한 인간의 생활난을 극복하려는 ‘인간시’라고 볼 수 있다.


요컨대 그는 <라디오계>에서 당시 민족과 인간의 과제를 모두 인정하면서도 인간의 현실적 생활을 보다 강조하는 반시를 제시하고 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그가 말하는 ‘반시’는 릴케처럼 초월적인 정신을 추구하는 ‘시’나 편협한 민족주의만을 강조하는 ‘참여시’가 아니라, 인간적인 차원에서 배부른 생활을 추구하는 ‘둥근 시’, ‘배부른 시’인 것이다.


***


라디오계(1968)


6이 KBS 2방송

7이 동 제1방송

그 사이에 시시한 주파(周波)가 있고

8의 조금 전에 동아방송이 있고

8점 5가 KY인가 보다

그리고 10점 5는 몸서리치이는 그것


이 몇 개의 판테온의 기둥 사이에

딩굴고 있는 폐허의 돌조각들보다도

더 값없게 발길에 차이는 인국(隣國)의 음성

- 물론 낭랑한 일본 말들이다

이것을 요즘은 안 듣는다

시시한 라디오 소리라 더 시시한 것이

여기서는 판을 치니까 그렇게 됐는지 모른다

더 시시한 우리네 방송으로 만족하는 것이다


지금같이 HIFI가 나오지 않았을 때

비참한 일들이 라디오 소리보다도 더 발광을 쳤을 때

그때는 인국방송이 들리지 않아서

그들의 달콤한 억양이 금덩어리 같았다

그 금덩어리 같던 소리를 지금은 안 듣는다

참 이상하다


이 이상한 일을 놓고 나는 저녁상을

물리고 나서 한참이나 생각해 본다

지금은 너무나 또렷한 입체음을 통해서

들어오는 이북 방송이 불온 방송이

아니 되는 날이 오면

그때는 지금 일본 말 방송을 안 듣듯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아무 미련도 없이

회한도 없이 안 듣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써도 내가 반공산주의자가

아니 되기 위해서는 그날까지 이 엉성한

조악한 방송들이 어떻게 돼야 하고

어떻게 될 것이다

먼저 어떻게 돼야 하고 어떻게 될 것이다

이런 극도의 낙천주의를 저녁밥상을

물리고 나서 해본다

- 아아 배가 부르다

배가 부른 탓이다


* 이건주, <김수영의 다원주의 시론 연구 - <반시론>에 나타난 긴장을 중심으로>, 《현대문학의 연구》 제73호, 한국문학연구학회, 2021, 7-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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