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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주 Feb 06. 2021

김수영과 다원주의 : 성(性)

김수영과 다원주의 : 성(性)


김수영은 <반시론>에서 “「성」이라는 작품은 아내와 그 일을 하고 난 이튿날 그것에 대해서 쓴 것인데 성 묘사를 주제로 한 작품으로는 처음이다.”라고 하면서 <성(性)>의 시작 노트를 시작한다. 하지만 이 작품은 현실적 생활(=반시)과 초월적 정신(=시) 사이의 긴장을 사랑과 성행위에 빗대어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시가 “직설적인 언어로 성관계의 국면을 소상하게 그려냄으로써 작품은 시의 형상이 운동할 수 있는 여지를 완벽하게 박탈”하거나, “사상검열을 통해 반공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한편, 풍속검열을 통해 정권의 도덕성을 동시에 견인”하려고 했던 당시 통치체제를 “내파”하기 위한 반발과 저항이 아니라, <반시론>의 핵심 주제인 현실적인 생활과 초월적인 정신 사이의 긴장을 상징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는 해석이다.


<성(性)>에서 시적 화자는 “그것”과 하고 와서 첫 번째로 “여편네”와 하던 날 여편네가 만족하지 않는다고 고백하면서, 그 이유를 자신이 “섹스”를 “개관(槪觀)”, 즉 대충 살펴보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여편네’는 그의 다른 시들과 마찬가지로 현실적 생활을 상징하고, ‘그것’은 이와 대립되는 초월적 정신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 즉 초월적 정신을 “혓바닥이 떨어져나가게” 열렬히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여편네, 즉 현실적 생활을 위해 “어지간히 다부지게” 노력해도 생활난에 시달리고 있다는 뜻이다. 쉽게 말해 시인으로서 초월적 정신을 추구하다 보니 현실 속에서 생활난을 겪고 있다는 상징적 고백이다.


그는 가난한 생활이 섬찍해서 이전의 “둔감한” 생활인으로 다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다. ‘그것(정신=시)’을 추구하는 것이 “황홀(恍惚)의 순간”이지만, 현실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여편네(생활=반시)’를 위해 속아 사는 불쌍한 “연민(憐憫)의 순간”으로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비록 속아서 사는 연민의 순간일지라도 현실적인 생활난을 해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육체를 지닌 인간의 운명이라는 인식이 담겨 있다.


그는 보통 때보다 완연히 한참 더 오래 끌다가 쏟았다고 하면서 현실 생활에 더욱 철저하겠다는 의지를 행동으로 드러낸다. ‘그것’과 바람을 피우기 이전으로 돌아가서 조강지처인 ‘여편네’를 다시 사랑하는 것처럼 이제는 초월적 정신을 추구하기 이전으로 돌아가서 현실적 생활에 전념하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여편네는 “자본주의적 일상과 속물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존재”로서 “시적 주체로 하여금 자신의 민낯을 명증하게 대면하게 하는 부정적 계기”라기보다는, 어쩔 수 없이 긍정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자 연민의 대상인 현실 생활을 상징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가 <반시론>에서 “나는 프티 부르주아적인 ‘성’을 생각하면서 부삽의 세계에 그다지 압도당하지 않을 만한 자신을 갖는다.”라고 말하는 것도 현실적인 생활의 안정을 추구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현실적인 ‘성(性)=욕망’을 추구하는 소시민적인 ‘반시’도 초월적인 ‘정신=부삽’을 추구하는 ‘시’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말이다.


물론 그가 초월적 정신을 전적으로 부정하고 현실적 생활만을 추구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초월적 정신을 추구하는 것을 “황홀(恍惚)의 순간”이라고 긍정하는 반면에 현실적 생활을 위해 사는 것을 “연민(憐憫)의 순간”이라고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특히 그가 마무리 부분에서 “지독하게 속이면 내가 곧 속고 만다”라고 말하는 것은 현실적 생활만 지독하게 추구하다 보면 초월적 정신을 완전히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경고를 스스로에게 던지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는 비슷한 시기의 산문 <원죄>에서도 아내와 그 일을 하던 것을 생각하다가 우연히 “육체가 욕(辱)이고 죄(罪)”라는 생각을 하면서 희열에 싸였다고 말한다. 이것은 아내의 육체로 상징되는 현실적 생활을 욕된 것으로 죄악시해서는 안 되고, 성서에서 말하는 “원죄”처럼 인간존재의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이어서 그는 한 사람의 육체를 맑은 눈으로 보고 느낀 것을 “새로운 발견”이라고 하면서, “사람의 육체를 (그리고 정신까지도 합해서) 비로소 완전히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동안 육체를 부정하면서 정신만을 추구해 왔다면, 이제는 육체와 정신을 모두 긍정하면서 객관적으로 바로 보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시는 “에로티즘=신성한 노동=시”의 등식이 아니라, <반시론>에서 강조하는 대극의 긴장이라는 관점에서 현실적인 ‘에로티즘=반시’와 초월적인 ‘신성한 노동=시’의 긴장으로 볼 수 있다. 


요컨대 그는 <성(性)>에서 현실적 생활과 초월적 정신을 모두 긍정하면서 그 사이에서 긴장을 추구하겠다는 의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앞서 현실적인 <라디오계>와 초월적인 <먼지>의 긴장을 제시했던 것과 달리 여기서는 한 작품 내에서 현실성과 초월성의 긴장을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


성(性)(1968)


그것하고 하고 와서 첫 번째로 여편네와

하던 날은 바로 그 이튿날 밤은

아니 바로 그 첫날 밤은 반 시간이 넘어 했는데도

여편네가 만족하지 않는다

그년하고 하듯이 혓바닥이 떨어져나가게

물어제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지간히 다부지게 해줬는데도

여편네가 만족하지 않는다


이게 아무래도 내가 저의 섹스를 개관(槪觀)하고

있는 것을 아는 모양이다

똑똑히는 몰라도 어렴풋이 느껴지는

모양이다


나는 섬찍해서 그전의 둔감한 내 자신으로

다시 돌아간다

연민의 순간이다 황홀의 순간이 아니라

속아 사는 연민의 순간이다


나는 이것이 쏟고난 뒤에도 보통때보다

완연히 한참 더 오래 끌다가 쏟았다

한번 더 고비를 넘을 수도 있었는데 그만큼

지독하게 속이면 내가 곧 속고 만다


* 이건주, <김수영의 다원주의 시론 연구 - <반시론>에 나타난 긴장을 중심으로>, 《현대문학의 연구》 제73호, 한국문학연구학회, 2021, 7-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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