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내가 하지 못하는 일들에 대해
상상한다.
예를 들어 내가 채식주의자가 되는 상상말이다.
내가 채식주의자가 되는 상상은
내가 미드로 영어공부를 해서
영어를 유창하게 하게 되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상상이다.
내가 채식주의를 하고 싶다는 것과
영어를 유창하게 하고 싶다는
목표에 이르고 싶은 점에서 동일하지만 그 과정에는 엄청난 차이가 존재한다.
‘영어’라는 목푯값에는 내가 하기 싫은
‘공부’라는 과정이 꼭 필요하지만
‘채식’이라는 목푯값에는
내가 채식을 하기 싫어하는 이유가 아닌
‘의지’가 없을 뿐이다.
내가 동물을 생각하는, 사랑하는,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이 채식이라는
결괏값에는 이르게 하지 못하는 의지를 가진 것뿐이다.
이는 다른 종류의 괴로움을 동반하기도 한다.
내가 동물을 생각하는 마음이 여기까지 뿐이구나 하는 나약함이다.
그때는, 우리 고양이를 생각해 본다.
우리 아이가 내가 자신의 친구를
먹는다는 사실을 알면 나에게 얼마나 실망할까?
“당신이 내 친구(친구는 고양이는 아니다.)들을 먹는다고?” 하면서
동그란 눈으로 눈물을 주룩주룩 흘릴 것만 같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우리 고양이도 육식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시 원점,
‘나는 우리 고양이가 육식이라고 해서 실망하지 않잖아. 그럼 나에게도 실망하지 않겠지?’
그럼 나는 이 무수히 많은 동물들에게
어떻게 또 사과해야 할까?
상상이라도 그 결말을 틀리지는 말자.
다시 내 의지가 약해지잖아.
여하튼 내가 하고 싶은 의지만 갖고 있을 때
이루지 못하는 것과
의지는 있지만 하기 싫음을 동반했을 때
이루지 못하는 목표의 차이는 크다.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