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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머머 Aug 15. 2021

할머니의 나라

새벽의 고요함은 평안을 준다. 고요한 적막을 깨는  불안감이다. 이른 새벽의 전화벨 소리는 불안감을 타고 흐른다. 이를 증명하듯 새벽의 전화벨이 울렸다. 시골에 사시는 할머니가 중환자실에 계시다는 삼촌의 전화. 냉장고 앞에 잠자듯이 누워 계시는 할머니를 이웃집 할머니께서 발견하셨다. 언뜻 보면 단잠에 빠진 모습이었지만 할머니의 축축해진 바지와 바닥에 흐르는 오줌이 할머니를 렸다. 할머니는 병원에 도착해서도 깊은 잠에 빠져 일주일을 중환자실에서 보냈다. 병원에서는 할머니가 쓰러지신 이유를 정확히   없다고 했다. 의식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할머니의 의식이 돌아 일주일 정도 지난 뒤였다.  끝을 미세하게 움직여 잠에서 깨어났다는 신호를 보냈고, 할머니를 집으로 모셨다. 할머니는 딸인 엄마를  알아보기도 하고, 내가 묻는 간단한 질문에도 정확한 답변을 하지 못하셨다. 생전 처음 보는 할머니의 모습이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첫 만남에 결혼을 약속했다.

어떻게 처음 보는 사람이랑 평생을   어?

나는 할머니를 놀리듯 되물었다.

할머니는 처음 보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퍽이나 마음에 드셨는지.

그때는  그렇게 결혼을 하는 거야.

할머니는 수줍지만 담담하게 답했다. 할머니는 첫눈에 사랑에 빠졌다. 내가 기억하는 할아버지는 항상 멀끔하고, 정돈된 모습이었다.


할머니는 평생을 자라온 고향을 떠나 가족들과 생이별을 해야 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시골 동네를 벗어나 버스를 타고, 할아버지의 집으로 향했다. 할머니의 꽃길은 고속도로였으며, 버스는 신부 가마였다. 할머니는 가마 한번 타지 못하고, 시집을  것이 평생의 한이었다. 하지만 그도 그럴 것이 할머니의 고향에서 할아버지의 집은 가마를 타고는 갈 수 없는 거리였기 때문이다. 할머니의 로망은 순백의 웨딩드레스도 아닌, 크디큰 알이 박힌 프러포즈링도 아닌 누가 봐도 어린 신부가 타고 있다는  알려주는 꽃가마였다. 하지만 가마는  후로도 할머니의 인생에서 평생 동안   없었다. 가마만큼이나 할머니에게 그리운 존재는 가족이었다. 할머니는 결혼이 가족과의 이별을 뜻하는  꿈에도 몰랐다.

이럴  알았으면  버스에 오르지 않았을 텐데.

할머니는 말끝을 흐렸다.


할머니가 결혼 , 처음으로 가족을 만난  2 뒤의 일이었다. 할머니의 둘째 언니가 찾아왔다. 할머니의 언니는 돈을 벌기 위해 대도시로 간다고 했다.

네가 원하면 같이 가고 싶어.

언니의 물음에 잠시 고민하던 할머니는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자매가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할머니의 언니는 도시로 떠났고, 훗날 전해 듣기로는 가족들에게 매달 생활비를 보내다가 후에 연락이 끊겼다고 한다.


마냥 아기 같은 스무 살의 나이에 할머니는 결혼을 하고, 3년이 지나 큰외삼촌을 낳으셨다. 23살의 할머니에게는 모성이 필요했고, 어린 아기를 돌봐야 하는 책임감이 생겼다. 다음으로 엄마가 태어나고, 삼촌들이 태어났을 때도 할머니는 아기를 먼저 안아본 적이 없다. 언제나  품은 증조할머니의 차지였기 때문이다.


삼촌들과 엄마의 입학식, 졸업식, 소풍 사진의 옆자리에는 언제나 증조할머니가 있었다. 옆집 잔칫날에도 아이와 함께 잔치 음식을 배불리 먹고, 배를 퉁퉁 치고 들어오는 것도 증조할머니의 몫이었다. 증조할머니는 10남매  8명의 자식을 잃고, 2명의 아들(그중  명은 우리 할아버지이다.) 남았는데 본인의 자식들에게 주지 못한 사랑을 본인의 손자, 손녀에게 주고자 엄마 역을 자처했다. 할머니는 자식들을 품에 품지 못하고, 옆자리에 두지 못했지만 차마 큰소리   없었다. 할머니는 목소리를 점점 잃어갔다.


할머니는 고향에서 알아주는 물개였다. 할아버지의 고향은 바닷가를 앞에  작은 마을이었는데 할아버지는 특이하게도 농사를 지으셨다. 바다로 나가는  할머니의 몫이었다. 처음에는 바다 앞에서 따개비 등을 주우시던 할머니는 본격적으로 해녀옷을 입고, 바다로 나섰다. 할머니는 뭍에서보다 물에서 자유로웠고,  멀리 앞으로 나아갈  있었다.  


증조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엄마 노릇하지 못한 지난 시절을 할아버지에게 분풀이할 때면 할아버지는 시끄럽다며, 할머니에게 되려 큰소리를 쳤다. 그러면 할머니의 화는 가슴속으로 계속 가라앉았다. 할머니는 또다시 목소리를 잃었다.


할머니가 의지할 곳은 바다뿐이었다. 바닷속을 자유롭게 헤엄치며, 물질을  때면 할머니는 온전히 본인이 되었. 할머니의 마음속 깊은 병은 넓은 바다에 흘려보냈다.


언제나 무신경하고, 무뚝뚝한 남편이었지만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사랑했다. 직접 만든 감주를 처음 맛보게 한 것도 할아버지였고, 더운 여름 머리가 깨질 듯 차가운 하드도 본인보다는 할아버지의 입에 내주었다. 할아버지는 고마운 줄 몰랐고, 할머니는 본인을 사랑하는 법을 몰랐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할머니는 더는 바다에 나가지 않으셨다. 더 이상 바다에 나갈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자녀들은 장성했고, 항상 뜨신 밥을 만들어 먹을 필요가 없었으며, 갓 잡아온 생선을 구워 생선살을 발라줄 사람도 없어졌다.


할머니는 그저 멀찌감치 태양 아래 부서지는 바다를 바라볼 뿐이었다. 바다를 바라보거나 TV 보거나  마당에 들어온 고양이들에게 생선 부스러기를 던져주고는 그저 바라보았다.


할머니가 우리 집에 오신 , 벌써 며칠이 지났다. 아직 잠을 자는 것인지 잠이   상태인지 알지 못했다. 할머니는 쏟아지는 햇살을 따라 눈부신 창문 너머의 세상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창문을 바라보할머니는 갑자기 잠에서   또박또박 말을 이어갔다.


바다에 가고 싶어. 바다에 가야 해.


할머니의 인생은 바다에 있다. 할머니의 전부는 사랑이었다. 할머니의 사랑은 바다에 있다.  누구도 할머니의 마음을 헤아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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