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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에서 결혼하면 무엇이 다를까

명동성당에 결혼합니다

남자친구와 성당에서 결혼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비신자였던 남자친구는 세례까지 받았다. 원하지 않으면 굳이 성당에서 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의외로 남자친구는 성당에서 결혼하는 게 더 의미 있을 것 같다며 자진해서 세례를 받았다.


결혼할 성당은 유아세례를 받고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다닌 동네 성당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코로나로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 상태였고 모든 혼배미사는 중단된 상황이었다. 코로나로 모든 것이 불투명해지자 명동성당, 가회동 성당, 약현성당 등 다른 곳도 알아보기 시작했다. 동네 성당은 9월쯤에 선착순으로 혼배미사 희망자를 받는다. 하지만 명동성당, 약현성당은 하루 날 잡아서 내년에 있을 혼배미사 날짜를 추첨으로 정한다.


약현성당 홈페이지 공지사항에 10월 초 추첨일이 떴다. 약현성당 추첨하는 데 가볼까 하다가 명동성당을 떠올렸다. 아빠가 가톨릭 재단 학교에 근무하셔서 명동성당 바로 옆에 있던 학교에 갈 일이 더러 있었다. 어릴 적 아빠를 찾아 학교 비탈길을 달렸던 기억, 교장 수녀님을 만났던 기억, 학교 언니들이 귀엽다며 나와 놀아주던 기억이 있는, 명동성당이 눈 앞에 아른거렸다. 결국 약현성당은 포기하고 명동성당 추첨일인 10월 23일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명동성당 대성전 내부

추첨 시간은 10월 23일 오후 2시였다. 준비물인 교적증명서와 예약금 50만원을 넣어둔 가방을 품에 안고 명동성당 입구에 섰다. 봉사자 분들이 교적증명서를 확인하며 내 이름에 동그라미를 치고 서류가 든 봉투를 건네주면서 손소독제를 뿌려주셨다. 1시 45분쯤 도착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미 앞자리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띄엄띄엄 앉아 있었다. 맨 앞을 보니 2021년 3월부터 12월까지 달력이 그려져 있고 기둥에 설치된 스크린TV는 달력을 비추고 있었다.

(참고로 1, 2월은 니즈가 많지 않은 달이라 추첨이 아닌, 선착순으로 예약일을 정한다)


명동성당은 장소를 대성전, 파밀리아 채플관 이렇게 2개로 나누어 추첨을 진행한다. 파밀리아 채플관은 명동성당이 보수공사를 하면서 리뉴얼될 때 생긴 곳으로, 결혼식을 위해 최적화하여 설계한 곳이다. 하지만 단연 인기가 많은 장소는 대성전이다. 일요일에는 미사가 있기 때문에 대성전에서 결혼 가능한 날짜는 금, 토뿐이다. 보통 결혼식을 토, 일에 많이 하므로 사실상 토요일만 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그마저도 축일 행사 등으로 성당을 사용해야 되는 날은 결혼식이 없기에 추첨 경쟁이 치열하다.


달력이 잘 보이지 않는다

스크린TV가 달력을 비추고 있지만 글씨가 너무 작아 보이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앳되어 보이는 남녀 커플이 많이 보였고, 부모가 대신 오거나 혼자 온 사람들도 보였다. 내가 원하는 날은 인기 폭발인 3~5월 사이. 4, 5월은 인기가 많은 달이라 3월을 노려보기로 했다.


2시가 되고 신부님이 나와 봉투에 있는 안내문에 대해 설명해 주신다. 바로 추첨을 할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설명 시간이 30분 정도 걸렸다. 주의사항을 알려주신 뒤, 앞 줄부터 차례대로 나가 공을 뽑았다. 기회는 단 한번, 초조하게 차례를 기다리다 바구니에서 공을 꺼냈다.


83번. 봉사자 분이 들고나간 교적증명서에 크게 83을 써주신다. 나는 83번째로 원하는 날짜를 뽑을 수 있다. 지금 약 156쌍이 있다고 하니 나쁜 번호는 아니다. 중간중간 신부님이 응원의 말을 건넨다. 중간에 안 뽑히는 공이 있으므로 허수가 존재한다. 뒷번호라고 좌절하지 말자. 좋은 날짜란 없다. 여러분이 결혼하는 날이 좋은 날이다. 등등 좌절한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신다.


공을 다 뽑자 1번부터 20번까지 차례로 나가 줄을 선다. 분명 스크린TV가 달력을 보여주고 있는데 어떤 날이 남았는지 잘 보이지 않는다. 고개를 빼고 요리조리 살펴보다 포기하고 차례를 기다렸다. 80번대부터 불러서 나가서 봤더니 시간대는 12시, 3시가 있는데 4, 5월은 이미 모든 날이 매진이다. 뒤에서부터 3월을 눈여겨보고 있던 나는 3월에서 딱 한 개 남은 날짜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초조하게 내 차례를 기다리는데 바로 앞에 노부부가 5월 이후의 날짜를 고른다. 내 차례가 되자 신부님이 언제로 할 건지 물어보신다. 속으로 탄호성을 지르고 바로 3월 중 마지막으로 남은 날을 가져간다.


앞에 앉아 있는 봉사자 분이 한 번 더 날짜와 시간을 확인한다. 그런 다음 다른 봉사자 분께 예약금 50만원을 건네고 예약증을 받았다. 예약증은 잃어버리지 말고 잘 갖고 있으라는 안내와 함께, 추첨은 끝이 났다. 아직 추첨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뒤로한 채 대성전을 나왔다.


명동성당 대성전 외관

10월 22일은 경매 낙찰을 받았는데, 10월 23일은 결혼할 곳이 정해지다니. 갑자기 결혼 준비가 급물살을 탔다. 드디어 결혼을 하는구나. 3월에도 지금처럼 쌀쌀한 바람이 불까. 대성전 문을 열자마자 차가운 바람에 얼굴이 시렸지만 마음만은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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