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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평김한량 Mar 25. 2016

자퇴를 하고 미국 유학을 떠나다.

중학교 자퇴 후 재입학 속사정.

 아내와 나는 오늘 길을 걸으면서 대화를 하기로 했다. 나는 아내와 매일 매일 산책을 한다. 고급스러운 취미는 아니지만. 아내와 내가 누리는 행복 중에 하나다. 함께 걸으며 나눈 대화는 스트레스 해소에도 도움이 된다. 


미국 유학은 얼마나 다녀왔어? 


사실 나는 미국 유학 기간이라기보다는 미국 유학을 준비하던 중에 되돌아 온 것이 맞다. 사람들에게 부끄러워서 그 속사정을 모두 이야기 하진 못했지만. 아내를 만난 이후 이 문제가 결코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IMF 시절에 돌아온 유학생은 나 혼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원래 6개월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다시 생각해보니 3개월이 맞는 거 같아. 


이렇게 현실과 내가 인식하고 있는 것의 괴리감은 무엇일까. 아마도 내 스스로가 그렇게 암시를 걸었던 것이 6개월. 실제로 되돌아 오는데 걸린 시간은 3개월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나는 미국 유학을 떠났다가 이렇게 빨리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97년. 나는 중학교 1학년이 된다. 


중학생이 되면서 가장 좋았던 것은 교복을 입는다는 사실이다. 물론 나중에는 교복이 지긋지긋 해지겠지만. 그 당시엔 집에 돌아와서 옷걸이에 단정히 걸어놓았다. 그 정도로 학교가 좋았고 교복도 좋았다.


반배치고사. 


기억에 남는 일은 반배치 고사였다. 요즘에도 그런 시험을 보는지 모르겠지만. 학교 반배정을 위해서 시험을 보고. 그 성적에 따라서 반장선거 기회는 물론이고. 여러 가지 아이의 실력을 테스트해보는 기초 자료로 활용되었다.


망했어 떡볶이 먹다 늦었잖아. 


친구와 나는 떡볶이 집에서 간식을 먹다가 반배치고사에 늦어버렸다. 완전히 늦은 것은 아니지만. 복도로 뛰어들어가니. 이미 학생은 아무도 없었다. 급한 마음에 자리를 잡고 시험을 보았다. 아마 다른 학생들은 미리 와서 마음을 정결케 하고 시험에 임했을 것이다. 


이 시험은 생에 최초로 가장 운이 좋은 시험이었다.


순위권 진입. 


나도 내가 시험에서 몇 점을 맞았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런데 웬일인지 내가 성적순으로 끊는 반장선거에 나갈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반장선거 후보를 성적순으로 끊는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지만. 나는 또 선거에 나가게 되었다. 


저는 공부는 잘하지 못하지만.. 


이것이 내 반장선거에 나가서 했던 첫마디였다. 


준태 너 인마 공부 잘하잖아. 


역시 이것도 선생님의 첫마디였다. 


나는 운 좋게 반배치고사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는데. 시험을 대비했던 것이 유효했다. 신기하게도 그날 푼 문제들이 익숙해 보였고. 왠지 시험이 어렵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 그대로 운이 좋았던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선거는 크게 치열하지 않았다. 나는 반장에게 2표에서 3표 정도 부족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6학년 당시에 21대 19 였던 상황과 크게 차이 나지 않았기 때문에 만족했다. 그리고 성적순으로 뽑는 학생회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 당시 학생회 정식 명칭은 '우애부'였다. 


처음 학기가 시작되었을 때. 나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공부가 너무 재미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공부를 손 놓기로 한다. 그곳 학교의 특징은 공부를 재밌게 하는 것이 아니라. 대학입시의 전초전으로 전쟁처럼 공부하는 스타일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보낸 고3 시절의 교실 분위기보다 몇 배는 엄숙하게 공부하던 것이 당시 그 반의 느낌이었다. 


방황의 시작. 


 처음 반배치 고사를 잘 보고 나서 성적이 뚝뚝 떨어지니 학교의 기대와는 반대로 달려가고 있었다. 결국 나는 병이 나고 만다. 위 내시경을 하고. 다니던 학원을 모두 끊고. 그냥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학교생활을 할 때. 친구들도 느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냥 패닉 상태였다. 시간은 그냥 흘러 보내기만 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교우관계에서는 좋은 친구들도 많이 생겼다. 각자 자신의 삶을 열심히 사는 것 같아서 나도 신기한 눈빛으로 보던 것이 기억난다. 만약 이 당시에 적응을 잘했다면. 나는 인생의 황금기로 보일 수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생각했던 중학교 현실과는 너무 달랐다. 이미 사회에서 시작되는 전쟁의 전초전을 보는 것과 같았다. 


학교를 다녀오면 그냥 집에서 게임만 했다. 나는 그래서 게임을 많이 하는 친구들을 이해한다. 현실적으로 답답함을 그곳에 녹아내는 것도 있고. 게임을 하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무언가 빨려 들어가는 느낌. 결정적으로 시간이 너무 빨리 간다는 점도 좋았다. 그렇게 하루를 보낸다는 것에 의미를 두었다. 


고백을 받다. 


야 김준태, 할 말 있어. 


예전부터 알던 똑똑한 여자 아이가 있는데. 그 친구가 어느 날 나에게 이야기를 했다. 


누구가 너 좋아한대. 

나는 그 친구를 향해 바라보았다. 신기한 일이다. 나를 좋아한다고 고백한 것은 그 친구가 처음이었다. 아직 나는 그 친구를 잘 모르던 터였다. 예전 같으면 여자친구가 생기는 것이 꿈이었겠지만. 그냥 그 당시엔 고맙기만 할 뿐 누구와 사귈 상황은 아니었다. 그래서 고맙다고 뜻을 전했다. 그 이상의 진전은 없었다. 


평균점수가 50% 하락하다. 

시험은 점점 하락하기 시작했다. 아마 앞에서 순위를 보이던 성적은 거의 꼴찌에 가까운 성적으로 떨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 이 학교에 다니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내린 결정은 미국으로 유학을 가는 것이었다. 미국 유학 결정. 97년 당시엔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이 부분에서는 부모님께 감사를 드린다. 왜냐하면 방황을 한다고 해서 미국으로 보내는 부모님의 노력은 쉽지 않은 결정이다. 그리고 지금 내 능력이라면. 내 자식을 미국에 쉽게 보낼 수 있을까 하는 고민도 해보게 된다. 그렇게 미국 유학은 결정되었다. 


그 당시 미국에 대해서 아는 것은 별로 없었다. 


도피처를 찾고 있었던 나에게 제공된 기회라고 여겼는지도 모른다. 공부를 하기 싫었던 것은 맹목적인 수업들에 대한 반항이었다. 공부를 한다는 것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면서 나는 그것을 할 수 없었다. 다행히 강제로 공부를 시키지 않은 어머니의 인내심 혹은 배려로 인해서 더 크게 엇나가지 않을 수 있었다. 





정말 어머니는 대단하시다. 


아내는 이야기를 듣다가 이렇게 감탄했다. 


다른 부모님들 같았으면 그렇게 놔두지는 않았을 텐데.. 


목적이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아들을 이해하는 부모님은 흔하지 않다. 울면서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하던 선배를 실제로 목격하기도 했다. 그리고 중간, 기말고사를 위해 밤을 새우던 친구들에 비해서 시험기간에 더 많이 놀았던 나는 특이한 케이스였다. 하지만 모두가 공부를 하는 분위기에서 혼자 논다는 것도 쉽지 않은 환경이다. 결국 비정상인 상태가 되어 버린 것이다. 


말을 우물까지 끌고 갈 수는 있어도 억지로 마시게 할 수는 없다. 


지금 이 생각은 변함이 없다. 우리 시대에 무엇이든 '그냥 하라'는 이야기와 사회 시스템을 거부하기 위해서는 도피를 하거나 그것을 극복하는 길 밖에 없어 보인다. 그러나 도피를 해도 불행하고. 극복을 해도 불행한 경우가 많았다. 중학교 3년과 고등학교 3년을 견딜 자신이 없었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인생은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 법. 그러나 미국 유학이 내 인생에 불러올 변화를 나는 감지하지 못한채 비행기 날짜만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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