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실 속의 화초는 나를 병들게 한다.

by 김준태의 인사이트

우리는 온실 속의 삶을 상상한다.


안정적이고

안전하고

보통적인 삶.


그러나 그런 삶을 추구하면 할 수록 우리는 본연의 삶을 살 수 없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끊임없이 보통적이며 평범한 삶을 강요 받았다. 그 평범한 삶이라는 것은 사실 다른 사람을 위한 상상의 삶이었을 뿐. 나에겐 맞지 않는 삶일지도 모른다.


온실 속의 화초는 참 예쁘다. 그런데 그 온실을 나오면 죽는다. 그것은 자연의 이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모른채 살아가는 온실 속의 삶을 꿈꿔야 할까?


우리를 성장시키는 것은 어디까지나 현실이다. 우리가 아무리 스마트폰 속 게임을 잘한다고 하더라도 현실에서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 처럼. 마찬가지로 현실적이지 않은 이상은 나의 삶에서 변화할 기회조차 앗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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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한다는 것.


과거엔 너무 큰 고통이 있었다. 전쟁, 기아, 그리고 어딜가나 위험이 도사리는 치안문제. 하지만 세상은 이제 너무 안전하게만 보인다. 전쟁도 없고, 기아도 없으며. 이제 우리는 안심하고 길을 걸어갈 수 있다. 더이상 산적이나 강도가 우리를 해치지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렇게 안전한 상황에서도 우리는 더 안전한 것을 바라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상의 안전 혹은 안정적인 삶엔 답이 없다. 우리가 살아가는 곳은 자연이고. 그곳에 살고 있는 우리는 동물이다. 각자마다 갖고 있는 특성이 있는 인간인 것이다.


인간의 삶은 다양하다. 개, 고양이, 사자 등과 비교했을 때. 인간의 색깔은 각양각색이다. 한가지로 정의되기엔 너무 다양하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삶에서 그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 그저 '평범한 삶'을 바란다.


도대체 평범한 삶이란 무엇인가?


좋은 대학에 나와서 좋은 곳에 취업해서 안정적인 노후를 즐기는 상상. 그 상상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은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 그리곤 그 박탈감으로 인해서 삶을 포기하는 단계에 이른다. 각자마다 갖고 있는 인생의 사명에는 다가가지도 못한다.


평범한 삶이 최고라고 외치는 사람에게 물어보자.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 것인지? 마땅한 대답은 없다. 그저 살아간다는 말만 나올 뿐이다. 그리고 평범한 삶을 누군가가 강요한다면 반대로 물어본다. 그럼 나는 어떻게 평범하게 살면 되는지? 하지만 마땅히 대답을 못한다. 왜냐하면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평범한 삶이라는 것은 없다. 누군가가 만들어서 프레임을 씌웠을 뿐이다. 그리고 책상에 앉아 있는 우리에게 그것을 주입시켰을 뿐이다. 각자마다 생긴 모양이 다른데 붕어빵 틀에 짜 맞춰서 구웠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작 자신이 무엇 때문에 이 형상이 되었는지 모른다. 삶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모른다. 남의 이야기를 따른 부작용이다.


자신의 삶을 산다는 것.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은 일종의 어드밴처다. 그러나 우리는 어드밴처가 두렵기만 하다. 온실 속의 화초처럼 살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아니다. 나는 정말 열심히 살았다!' 라고 외칠지 모르지만. 다시 한번 물어보자 그것이 내가 만든 도전인지. 아니면 남이 꾸며준 환경에서 그저 열심히 한 것인지. 만약 내가 만들어간 모험이 아니었다면 그건 온실이었던 것이다.


삶에는 자극이 있다. 모험이기 때문이다. 안정적인 삶에는 자극이 없다. 온실도 자극이 없다. 자극이 없기 때문에 생존에 대한 고민도 할 필요가 없다. 그 온실이 평생 안전하기만 꿈꿀 뿐이다. 하지만 세상에 어디도 영원한 온실은 없다.


만약 누군가가 나의 삶이 모험이다라고 가르쳐 준다면. 그것은 엄청난 기회다. 왜냐하면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눈을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만 해결되면. 이것만 통과되면 모든 것이 해결 될 것 같은 환상을 주는 사람이 있다면 나에게 환상을 덧씌워주는 것이다. 현실은 온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끊임없는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이며. 그 속에서 의미를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온실엔 그런 문제는 발생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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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언젠가는 온실에서 나오게 된다.


온실에서는 나오게 된다. 왜냐하면 온실은 생태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너무 작다. 새로운 것이 들어오기 위해서는 기존의 것이 나올 수 밖에 없다. 운이 좋으면 봄, 여름에 나오겠지만. 운이 없다면 가을, 겨울에 나오게 된다. 그곳에서 나올 수 있는 시기를 내가 스스로 결정한다면 대비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혹독한 겨울을 맞이하게 된다.


경험해보지 못한 온실 속 밖. 겨울의 현실은 암담하다. 그래서 그 현실을 배우고 단련하려면 조금이라도 빠른 것이 낫다. 온실의 기온과 밖의 기온이 비슷한 상황이라면 다행이겠지만 너무 큰 온도차가 나게 된다면 그것을 견뎌야 하는 것은 나이다.


내가 현재 온실에 있다고 해서 누군가에게 자랑할 필요도 없다. 언젠가는 나도 그 밖으로 나가 자연 속에서 모험을 해야하는 상황이 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밖에서 단련하고 있는 이를 비웃을지도 모른다. 그게 내 미래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모험은 축복이다.


동물에게 모험이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진화했다. 생태계 안에서 자신의 영역을 만들었다. 만약 이 지구가 완벽한 온실이었으며 기후변화나 자연재해가 없었다면 지금과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아마 진화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늘에 새가 날고. 물 속에 물고기가 돌아다니며. 인간이 기구 도구를 사용한 것 역시 이렇게 모험을 할 수 있는 환경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약해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해서 심각한 두려움에 싸여 있다.


자신이 그 문제를 기꺼이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믿기만 한다면. 누군가에게 삶을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 나 대신 누군가가 나의 꿈을 정해줄 필요도 없다. 그것은 부모 형제, 가족은 물론 누구도 나의 미래를 결정해줄 수 없다는 것에 눈을 뜨기만 하면 된다.


하고 싶은 것을 하다가 실패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실패인지는 10년, 20년 뒤에 아는 것이 부지기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견디지 못한다. 조금만 하다 안되면 주변의 비웃음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원래대로 돌아간다. 하지만 막상 돌아오면 그것이 행복도 아닌 것을 깨친다. 그러나 실패로 인한 두려움 때문에 다시 시작할 엄두도 내지 못한다.


그리고 다음 세대에게 두려움을 전수시킨다. 꿈보다는 안정을 가르치고. 평범한 삶에 대한 환상을 심어준다. 그 환상을 보고 배우고 자란 사람은 자신의 특수한 삶. 그리고 삶의 모험을 모른채 안정적인 삶이라는 꿈을 꾸며 긴 시간을 보낼지도 모른다.


행복.


누군가 행복을 '물질적 만족'으로 정의를 했고. 또 누군가는 '조건적 행복'을 정의해 버렸다. 하지만 그렇게 행복을 찾은 사람들에게는 훗날 큰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물질은 결국 만족보다는 공허함을 줄 것이며. 이러 이러하니 행복하다는 조건적 행복은 결국 부족한 것만 찾는 눈을 만들어 버릴 것이다.


행복이라는 것은 각자의 몫 안에서 찾는 것이다. 배움의 기쁨. 종교적 신앙. 가족으로부터 얻는 안정. 따듯한 햇빛의 느낌. 등. 행복감은 잠시 스쳐가고 추억을 만들어준다. 엄청나게 대단한 것이 아니라 잠시 스쳐가는 감정이다. 아무리 뜨거웠던 종교의 기쁨도 오늘, 내일, 모레 시간이 흐르게 되면 조금씩 식는다. 햇빛의 느낌 역시 밤이 되면 온데 간데 없다. 그저 스쳐 지나간다. 평생 그것을 매순간 유지시키려고 하는 것은 무리다. 비현실적이다.


그러니 행복감이라는 것을 스쳐지나가는 것을 받아들이고 그 순간에 감사해야 한다. 그러다가 힘든 날이 오면 행복만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과거를 회상하며 견뎌내고. 힘든 날이 해결될 때. 또 스쳐가는 행복감을 누리고 주변에 함께 나누면 그만이다. 행복은 평생추구해야 할 가치가 아닌 매순간 찾아오는 바람과 같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이 완벽한 환경의 산물인줄 알고 오늘도 많은 노력을 한다. 그러나 그런 삶은 평범한게 아니다. 어떻게 사람이 매순간 노력만 할까. 온실처럼 완벽한 환경을 갖추기 위해 평생 노력을 바칠 수 있을까. 삶은 모험이기 때문에 행복 역시 온실의 완벽한 환경 안에서 꿈꿀 것이 아니라. 모험 안에서의 행복을 꿈꾸는 것이 차라리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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