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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평김한량 Dec 28. 2019

평범한 삶의 후회.

자신을 사랑하는 법

 자신을 사랑하는 법


어린 시절 가장 많이 들은 말이 평범해지란 말이었다. 학교는 물론이 친구, 지인들은 늘 말했다. 그리고 그렇게 나도 점점 평범해졌다. 남들 앞에서 생각을 이야기하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삼았고. 튀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 노력을 모두 함께 한 지인들은 결국 후회하게 되었다. 


청년의 시기에 평범할수록 시간이 흘러 후회할 가능성이 컸다. 왜냐하면 젊은 시절에는 자신의 인생을 돌릴 기회가 많았지만. 나이가 들 수록 이미 익숙해진 자신의 삶을 바꾸기란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에서 중요한 부분을 평범해지기 위해 노력했으니 앞으로의 특별한 삶은 없어 보였다. 


사람은 습관대로 살아가는 존재다. 그래서 습관은 무섭다. 무언가 자신이 하는 일들은 자신의 생각대로 한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하는 일들은 대부분 습관대로 하는 일들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신을 숨기는 습관을 갖고 살아간다. 


평범함은 시간을 낭비한다. 


 우리는 스스로가 평범하다 생각한다. 그러나 평범한 건 지구에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은 유전적으로 매우 유사하나 막상 만나보면 환경과 천성, 그리고 후천적 학습으로 인해서 매우 독특한 인격을 갖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틀에 가둬 구워놓은 붕어빵처럼 자신을 단련한다. 


이런 시간은 매우 헛된 시간이다. 만약 나에게 평범함을 가르쳤던 사람들의 삶을 되돌아보면 과연 그들은 행복했을까? 그렇지 않다. 나를 가르쳤던 선생님들 중에서 아이들의 개성을 충분히 살리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분들도 계셨다. 지인들도 평범하려 노력했으나 그게 불가능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퇴사 후였다. 


후회를 해도 이미 늦은 듯했으나 그렇게 평범해지려 했던 습관은 또 훗날 많은 시간을 낭비한다. 한국에서 평범한 것이란 무엇일까? 


좋은 대학 나와서 좋은 직장 다니고 결혼하고 은퇴 후에 안정적으로 노후를 꾸려가는 것. 


무사안일  한 삶을 꿈꾸지만. 평생 그럴 수는 없다. 사람에겐 굴국이라는 것이 존재하며 살아가다 보면 별에 별일을 다 겪는다. 그게 평균이다. 


이상을 평균으로 착각. 결국 우린 그게 평범한 줄 알며 시간을 낭비한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평범한 자신의 인생이 아닌 스스로의 인생을 되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루 이틀 시간을 보내다 보면 학교에서 직장에서 나를 끌어당긴다. 그리고 평범함을 강요하며 환상을 심어준다. 그들의 말대로 하면 모든 게 잘될 것 같지만. 5000만 인구 중에서 그런 사람은 없다. 결국 자신의 운명을 거스르지 못하고 자신의 개성을 찾기 위해 또 시간을 낭비하게 된다. 


평범한 것은 결국 나에게 해줄 것이 없다. 


한국의 평균 집값이 5억이라 하자. 


서울의 집값이 평균 9억이라고 하자. 


이 안에 들어가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또한 빚 없이 순수한 나의 자산일까? 아마 대부분이 이 사실을 알면 머리가 아플 것이고 자신에게만 충분한 자산이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기를 키우는데 대학까지 1명당 4억이 필요하다. 


아이에게 충분한 사교육을 위해선 1인당 매달 100만 원 이상 필요하다. 


여기서도 이걸 다 해낼 사람은 몇 명이나 되며. 현금을 4억을 쌓아놓고 애를 낳을 수 있는 사람은 누가 있을까? 


수많은 수치가 우리를 괴롭히고. 수많은 기준이 우리를 가둬놓는다. 그리고 노력할 것을 강요한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단순히 인생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학업 성적도. 대학도 직장의 연봉 또한 평범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기준으로 나를 스스로 평가하면서 과로할 필요는 없다. 


지극히 평범한 인생이라는 표현을 쓰기엔 이미 한국은 선진국이 되어 버렸다. 선진국은 모두가 잘 사는 것으로 착각할 수도 있지만. 선진국은 그런 게 아니다. 사회가 매우 안정되어 있고 경제적으로 고도의 성장이 멈춘 상태에서 복지와 같은 부분이 끊임없이 보완되는 과정에 있는 국가들이다. 


결국 우린 이런 안정된 상황에서 자신의 개성을 찾아야 한다. 이전에는 공장에서 찍어낸 듯한 교육이 진행되었다면. 이제는 더 이상 필요가 없다. 우리는 붕어빵 틀에 가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를 나타낼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언제 후회하나?


최근 들어 퇴사를 한다던가 여행을 떠난다거나 여러 가지 행위를 통해 자신의 답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이전에는 독특한 문화였으나 이제는 보편화되어가며 나이 불문하고 나타난다. 


자신이 후회를 하는 동시에 행동을 이처럼 하는 사람들은 답을 찾아간다. 한 번에 찾을 수는 없지만. 10년 20년 고민하고 행동하다 보면 자신이 생각한 답의 퍼즐이 완성되어 간다. 


책이라고는 문제지 밖에 풀어보지 않은 학창 시절에 깊은 고민 없이 선택한 진로. 이게 맞을 리 없다. 남이 정해준 진로는 100% 전공을 포기하거나 졸업 후 다른 전공을 찾게 된다. 그러니 깊은 고민을 위해서는 10년 이상은 필요하다. 


단지 앞선 선진국들은 공장에서 찍어낸 교육의 한계를 깨닫고 10년 20년을 고민하고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배려를 해주지만. 우리는 그것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다. 평균점 수라는 틀에서 모두를 괴롭혔을 뿐이다. 


중요할수록 시간이 필요. 


답을 달달 외우던 시대에는 모르면 맨 뒷장을 들추어 해답을 읽으면 됐다. 그리고 또 답을 외우면 됐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대학 역시 취업을 보장하지 못한다. 그건 인 서울도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학연을 내세울 수도 없다.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으나 아직 교육은 쉬쉬 할 뿐이다. 


내가 이걸 왜 하는지. 

내가 이걸 어떻게 했는지. 

내가 이걸 평생 할 생각이 있는지. 


등등. 정말 많은 고민 없이. 


단순히 연봉이 높아서. 

단순히 편하대서. 


여러 가지 이유로 우리는 너무 인생을 낭비한다. 사회는 이미 겁에 질렸다. 저성장에 대한 두려움에 대한 해답은 정부가 제시하지 못했다. 그리고 모두가 만족할만한 평균의 복지를 제시했으나 모두가 불만족한다. 그렇다면 답은 누가 제시해줄 수 있는 게 아니다. 내가 찾아야 하고 긴 시간이 필요하다. 인생엔 맨 뒷장의 해답 따위는 없다. 


점점 더 후회하는 사람이 늘어날 것이다. 


 자신의 사명을 찾았다는 사람은 점점 줄어들어 간다. 슬프지만 그들이 나이를 먹으니 이해할 수는 있다. 사회 전반에 퍼져 있는 '위로'는 우리에게 공감을 주는 듯 하지만. 내가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하지 않고 머무르게 한다. 결국 위로는 치유일 뿐 실행은 내가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위로에 기대 자신의 실천을 잊는다. 


후회를 하지 않기 위해서는 하던 대로 하는 자신을 철저히 내려놓아야 한다. 그리고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나에게 '왜'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해주지 못한다면 이 역시 긴 시간 고민을 해봐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다시는 내 인생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가 사라졌을 때야 후회한다. 이미 늦는다. 


조언도 필요 없다. 고민은 필요하다. 


 우리는 하지 않을 일들에 대해서 남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 않을 거면서 그냥 이야기한다. 불안해서 그렇다. 이야기하면 무언가 해소되는 느낌이 든다. 공감이 된다. 서로 웃으며 헤어지지만. 자고 일어나면 똑같다. 그리고 누군가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을 찾는다. 그렇게 하다 보면 주변엔 아무것도 안 하고 그대로 살아가는 사람들만 남게 된다. 


조언은 필요 없다. 고민은 필요하다. 그리고 실천은 자신이 할 수 있을 뿐이다. 평범한가 아닌가 고민할 필요도 없다. 어차피 평균값을 만들어줄 주변 사람들도 언젠가는 다 떠나갈 사람들이다. 졸업을 하던 퇴사를 하던 언젠가 다 사라질 사람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원한 평범함이란 없다. 


실천을 하면 우리는 깨닫는다. 그리고 자신의 방법을 공부하고 익히게 된다. 어떠한 요리법도 완벽히 똑같지는 않다. 모두가 자신에 맞는 레시피를 완성하고 실행하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 상황에 맞는 무언가를 실행하기 마련이다. 자신의 삶에서 중요한 결정은 남이 해줄 수 없듯이 다른 사람의 조언이나 눈 치르 볼 필요도 없다. 


평범은 허구다 잊어도 좋다. 


 어떻게 하면 '내가 평범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지 않게 된 건 언제일까? 나에게 평범함을 강요하던 사람들이 오히려 나에게 질문하기 시작할 때였다.


 '어떻게 하면 반복되는 삶에서 벗어날 수 있나' 


20년이 흐른 지금 그 고백 같은 질문을 받으면서 나는 그동안 나의 삶과 생각을 포기하지 않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만약 강요에 의해서 포기했다면 어땠을까? 어차피 강요한 이 조차 후회하는 '평범하고자 했던 삶'이 얼마나 무서운 기준이었는지.. 


아마 한국이 쉽게 바뀌진 않을 것이다. 한국은 남 눈치로 인해 모두가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서 자신의 삶이 자신답지 못했고. 자신 다움이 도대체 무엇인지 몰랐음에 많은 사람들이 후회하곤 한다. 


나 역시 나 자신이 누군지 모른다. 그리고 평범하진 않다. 


 맞으면서 큰 세대는 더욱이 자신을 알기 힘들다. 자신의 생각을 말하면 몽둥이가 날아왔던 게 초등학교 2학년 때다. 1학년은 어려서 안 때렸는지 몰라도 2학년부터 대학을 가기 전까지는 계속해서 맞았다. 맞으면 맷집이 늘기 때문에 각목으로 십 수대를 맞아도 끄떡하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맞을수록 내면에 깊숙이 잠가 버렸다. 


하지만 이제는 일제시대의 잔재였던 폭력에 의한 교육은 사라졌다. 그로 인해 90년대생부터는 더 자유로운 사고가 가능하고. 이전 기성세대에겐 '말세'라는 이미지를 띄워준다. 그들은 좀 더 자신을 표현하며 평범하길 거부한다. 하지만 옷을 보면 '유행'에 의해서 모두가 검은 롱 패딩을 입고 비슷한 머리를 하고 다니는 것에서 시간이 더 필요해 보인다. 아마 이다음 세대는 되어야 좀 더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온전히 스스로를 집중하지 않을까. 


나 역시 맞고 살았고. 교복도 입었다. 개성보다는 집단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강력한 리더십이 각광받았고. 어딜 가나 반장을 하거나 장학금을 받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했다. 그렇게 평범하게 살려고 발버둥 친 나는 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 시간을 보냈다. 모든 것은 낭비였고 온몸은 긴장 상태였다. 


신념은 곧 믿음. 


평범하게 살고자 한다면 그 생각은 버리길 바란다. 평범이란 기준은 누가 정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걸 정한 사람조차 평범하지 않은 사람이다. 


그 생각을 하기보단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키워야 한다. 종교를 믿는다면 종교에 대한 믿음. 선행을 제대로 베풀고 교리에 의한 사랑을 행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내가 지금 하는 일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최대한 빨리 그만두고 새 일을 찾자. 나의 일이 남에게 피해가 될 수 있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나에게 되돌아오기 마련이다. 


믿음은 배신을 하지 않는다. 고난 역시 자신의 버팀목이 되어 준다. 남이 만들어준 믿음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철저히 고민하고 긴 시간을 보내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자. 



마무리. 


 어떤 문제든 해답은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 답을 찾는데 익숙하지 않다. 남 눈치 보느라 긴 세월을 낭비했다. 우리가 눈치 본 그들이 정작 현재의 나에게 해줄 수 있는 게 무엇일까? 아무것도 없다. 


평범함은 모두를 갉아먹는다. 특별하지 않은 존재는 없다. 철저히 생명이 다 하는 날까지 자신의 사명을 깨닫고 그 사명대로 살다 가는 것이 중요하다. 


성의 없는 음식점의 음식처럼 사람을 열 받게 하는 건 없다. 그렇다면 과연 나는 얼마나 나의 일에 열중하며 살고 있을까? 결국 성의 없는 음식점과 나는 똑같은 서비스를 누군가에게 제공하고 있지 않을까? 


우리가 스스로 평범함의 함정에서 벗어날 때. 그 이후 단 1분이라도 소중한 보물처럼 사용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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