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한 벌/ 김석인

by 이광

삶 한 벌


김석인


보증서 한 장 없이 백년을 빌렸건만


빗물에 젖은 소매, 바람에 할킨 가슴


밤마다 다림질해도 잔주름만 하나 둘



삶이 결코 두 벌일 수 없으며 그 한 벌도 빌려온 것이고 기한은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백년 이내란 사실에 동의합니다. 여러 해 전 '천년을 빌려준다면'이란 대중가요가 유행한 적 있었는데 절절하지만 허황한 꿈이지요. 의학이 발달하고 생활여건 또한 이전보다 훨씬 향상되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백년을 채우지 못합니다. '보증서 한 장 없이' 빌린 삶이기에 절반을 채 못 넘겨도 호소할 데가 없습니다.


중장 '빗물에 젖은 소매, 바람에 할킨 가슴'은 몇 차례 풍상으로 편치 못했던 심신을 이야기합니다. 물론 옷소매 걷어붙이고 신나게 일하던 날도 있었을 톄고, 가슴에 꽃을 단 경사스러운 날도 있었겠지만 지금은 단벌 삶에 드리워진 자국과 대면하는 시간입니다. 옷을 오래 입다 보면 구김살이 자주 생기는 부위는 주름이 무늬처럼 자리 잡아 웬만해서는 잘 펴지지 않습니다. 시인은 이 대목에서 옷이 아니라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을 것 같습니다.


쇼펜하우어가 그랬던가요. 죽음은 의복의 교체에 지나지 않는다고. 시인은 염세주의자의 입장은 아닌 듯합니다.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빌려온 삶일지라도 밤마다 주체적인 다름질이란 행위를 통해 성찰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깊어지는 이마의 주름살은 바로 그러한 한 벌 삶이 쌓아온 연륜이겠지요. 내일이 설입니다. 잘 다림질한 삶을 걸치고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해야겠습니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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