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엄마는 아직도 이 일을 모르신다.
살면서 엄마한테 크게 숨기는 일은 별로 없었는데, 나는 중학교 때 한 번 '간 큰 짓'을 한 적이 있다. 학교에서 뭔가 잘못해서 학생부에 가서 혼났는데, 그 일로 학생주임 선생님께서 우리 집에 전화를 하셨다. 하교 후 나는 집에 와 있었고 엄마는 외출하고 안 계실 때라 내가 전화를 받게 되었다. (그 당시엔 집전화 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여보세요?"
"네 안녕하세요. 저는 **중학교 학생주임입니다. 은주 어머니 되시나요?"
'응? 은주 어머니시냐고? 내 목소리가 엄마 같은가?? 아 어쩌지?'
은주 어머니 시냐는 선생님 말을 듣는 순간 갑자기 머리에 번뇌가 일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이 순간을 잘 모면하면 엄마한테 안 들키고 끝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찼다. 머뭇거리다 걸리면 끝이었다. 그 당시 나는 뱃속에 용기가 빵빵한 중2병 환자였다.
에라 모르겠다. 한 번 저질러 보기로 했다.
"네... 아... 무슨 일로..."
나는 최대한 당황한 엄마의 말투가 이럴 것이라는 상상으로 선생님께 대답을 이어갔다. 전혀 눈치채지 못하시는 것 같았다. 담임선생님도 아니셨고 평상시에 뵌 적도 없는 분이라 아마 인지하기 어려우셨던 것 같다. 선생님은 오늘 내가 학생부에 갔던 일에 대해 말씀하셨고, 나는 정말 죄인 된 부모 같은 목소리로 '아, 네네 죄송합니다'를 연발하며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정이 이러이러 하니 학교에 한번 오시라는 것이었다.
'응?!? 학교에 오시라고?!?? 앗! 이러면 안 되는데...'
겨우 전화 수습했더니 이게 웬일인가. 머리가 핑핑 돌며 그때부터 나의 거짓말과 폭풍 같은 할리우드급 연기가 시작되었다. 일이 있어서 당분간 지방에 내려가야 한다며 무슨 핑계였는지 지금은 기억도 잘 안나는 핑계를 대가며 학생주임 선생님께 읍소를 하기 시작했다. 집에서 '은주'에게 단단히 일러 교육시키겠다고 죄송하다는 말을 연발했다. '은주'가 '은주'를 잘 가르치겠다며 앞으로 '다~~~ 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다며 전화기 너머 선생님께 허리까지 굽신거려가며 사죄를 했다. 도저히 방문할 여건이 안 된다는 우리 엄마(인척 하는 나)의 태도에 결국 학생주임 선생님께서 부모 호출을 포기하시고 그럼 집에서 잘 교육 부탁드린다며 전화를 끊으셨다.
그리고 우리 엄마는 아직도 이 일을 모르신다.
정말 별 것도 아닌 일로 학생부까지 끌려가고 생전 처음 선생님께 거짓말하고 엄마를 기만한 것 때문에 한 동안 들키는 건 아닐까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한 동안 집에 전화벨이 울려 엄마가 전화를 받으시면 학생주임 선생님이 다시 전화한 건 아닌가 걱정이 됐다. 긴장에 잠도 푹 이루지 못했던 것 같다. 심리적인 압박으로 사람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게 한 순간이구나 싶었다. 불안한 마음, 엄마한테 미안한 마음을 덮고자 그때부터 학생인 내가 열심히 할 수 있는 건 공부뿐이라는 생각으로 그냥 열심히 공부만 했다. (고1 중반 정도까지 이 약발이 유지되었고, 내 인생 최고의 성적들을 거두었다. 약발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 후엔 다시 노느라 정신없었다. 약발이 좀 더 오래갔으면 더 좋은 대학에 갔을 텐데 ㅎㅎㅎ)
캐서린 맥켄지의 '절대 말하지 않을 것'의 맥알리스터 가족은 모두 비밀을 품고 있었다. 어떤 비밀들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었고, 어떤 비밀들은 타인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들은 아버지가 유언장에 지시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로의 비밀에 대해 파헤치고 알아간다. 가족 간의 비밀은 그리 유쾌하지도 짜릿하지도 않다. 그래도 서로에게 숨기도 있던 비밀들을 짜 맞추어 가며 하나의 사실을 완성해 간다. 그리고 결국에 드러난 마지막 비밀, 그것을 앞에 두고 가족들은 이렇게 말한다. "절대 말하지 않을 것" 그들은 다시 새로운 비밀을 가슴에 묻고 절대 말하지 않을 것을 다짐한다. 사실을 알기 위해 20여 년을 돌아왔지만 결국은 다시 가족을 위해 비밀로 묻어둔다.
간단한 세 마디였다. 그녀 가족의 '모토' 말이다.
절대 말하지 않아.
'절대 말하지 않을 것' by 캐서린 맥켄지
나의 비밀이 맥알리스터 가족의 그것처럼 어마어마한 것은 아니지만, 무언가 마음속에 숨길 것을 가지고 있다는 건 별로 좋은 느낌은 아니다. 중학교 때 그 사건 이후 나는 비밀과 거짓말이 싫어졌다. 호기롭게 거짓말 쇼를 성공적으로 끝내긴 했지만 그 후에 겪는 마음의 풍파가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이제 아이들을 격려하기 위해 하는 하얀 거짓말 말고는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잘못한 것이 있으면 그냥 솔직히 말한다. 중학교 때는 들킬까 봐 걱정되는 마음을 이겨내고 '은주 엄마'인 척했던 게, 센 척하는 게 용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솔직하게 말하고 혼날 준비를 하는 것, 질책받을 준비를 하는 것, 사과하는 것 그게 진짜 용기였다. 제대로 된 용기가 있는 사람으로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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