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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워킹맘다해 Dec 12. 2020

젖이라도 물려야
한 입이라도 먹을 수 있었다.

눈물과 수유로 인한 메스꺼움으로 아무 맛도 느끼지 못하더라도...

나는 첫 아이를 미국 시골 깡촌에서 출산했다. 한국사람은 구경도 하기 어렵고 한국 마트는 고속도로로 3시간은 가야 있는 그런 곳이었다. 한국과 달리 집들이 뚝뚝 떨어져 있는 시골 마을이었고 차는 한 대 뿐이라 남편이 학교에 가고 나면 하루 종일 앵앵 우는 아이와 나만 집에 갇혀있어야 했다. 우리가 살던 집은 역사 보존 구역 내에 있어 집 외관을 마음대로 바꿀 수도 없는 100년 된 집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사실 100년 된 '집'이 아니라 100년 된 큰 저택 옆에 딸려있는 말과 마부가 지내던 헛간을 살림집으로 개조한 곳이었다. 세탁실은 거의 토막살인사건이라도 날 것 마냥 으스스하고 다락은 어두침침해 무서워 올라가 볼 수도 없었다. 이런 집에서 난생처음 겪어보는 엄마라는 삶은 녹록지가 않았다. 평생 살던 한국의 익숙한 환경에서 처음 겪는 출산, 육아도 쉽지 않았을 텐데 자유의 나라 미국에서 겪는 감옥살이 같은 육아는 정말 우울증을 불러오기 충분했다.  


어느 날 하루는 이 창살 없는 감옥을 정말 너무 탈출하고 싶었다. 창 밖에 파릇파릇한 새싹들도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들도 나를 유혹하는 것 같았다. 나는 용감하게 유모차에 아이를 태우고 시내 쪽으로 걸어 가 보기로 했다. 혼자 남편과 일전에 가보았던 이태리 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기로 결심했다. 혼밥이라는 말이 있지도 않을 때였지만 그런 것 따위 신경 쓰지 않았다. 사실 혼밥이었으면 더 행복했겠지만 나에게는 젖먹이 아이가 달려있었다. 


그 동네엔 사람들이 대부분 차를 타고 다니기 때문에 도로 옆에는 인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 그나마 걸을 수 있는 길은 강변 옆 산책로였다. 강변길로 시내를 가려면 빙 둘러가야 했지만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유모차를 밀고 한 20-30분 정도 걸렸던 것 같다. '강변' 이러면 뭔가 좀 한적하고 예쁜 꽃이 만발한 강변도로를 상상을 할지 모르겠지만 1920년대 공업도시로 부흥하다 망한 도시 곁에 난 강변길은 벗겨진 페인트, 갈색의 녹슨 빛으로 망한 공장이 강변에 늘어서 있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풍경과는 느낌이 사뭇 살랐다. 


걷는 동안 유모차의 적당한 흔들거림 안에서 아이는 잠이 들었다. 조용히 식당에 들어가 재빨리 주문을 했다. 제발 내가 스파게티 한 그릇을 먹을 때까지만 조용히 있어주길 바랬지만 엄마의 바람은 그저 바람일 뿐이었다. 주문한 스파게티가 나와 한 입 뜨려는 순간 아니나 다를까 아이가 꼼지락꼼지락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기어이 시끄럽게 울기 시작했다. 공갈 젖꼭지를 물리며 아무리 달래도 아이는 울음을 멈추질 않았다. 아이는 초보 엄마를 봐줄 생각이 없었다. 결국 수유 커버를 뒤집어쓰고 아이를 안아 젖을 물리자 그제야 아이는 조용해졌다. 난 왼손으로 아이를 안고 수유를 하며 수유 커버가 냅킨인듯 온 상체에 뒤집어쓴 채로 오른손으로 스파게티를 먹기 시작했다. 


이건 눈물 젖은 건빵도 아니고 눈물 젖은 스파게티였다. 기분 전환을 위해 나온 외출에 오히려 내 처지가 더 암울하게 느껴지고 나를 우울의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첫 손주를 보러 엄마가 다녀간 지 얼마 되지 않은 때라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남이 차려주는 밥 한 끼도 편하게 못 먹는 내가 그렇게 불쌍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눈물의 찝찌름한 맛과 수유로 인해 올라오는 약간의 메스꺼움으로 스파게티에서는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오늘 '스테이트 오브 더 유니언'을 읽는데 주인공 한나가 시골 깡촌에 갓 출산 아이를 데리고 이사 간 이야기가 나왔다. 한나의 이야기를 읽으며 숨이 막혀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소설을 읽으며 너무 동화되어 내 기분까지 다운되는 기분이 들었다. 소설 속 한나는 60년대 시골에 살고 있는데 나는 내가 얼마 전 겪은 이야기인 것처럼 느껴졌다. 출산 후 정신 못 차리는 호르몬 때문에 기분이 널 뛰어 작은 일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게 되고, 왜 이렇게 말하지 싶을 정도로 쏘아붙이기도 했다. 별 것 아닌 일에 언성이 높아지고 아무것도 아닌 일에 너무 서운해졌다. 나도 한나도 모두 말이다. 출산 후 큰 어려움을 겪지 않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는 정말이지 그때로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


인구 절벽을 마주하며 사람들은 여성들에게 출산을 장려한다.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여러 제도로 지원을 해주면서 아이를 낳으라고 한다. 그런데 아무도 이런 이야기는 해 주지 않는다. 아기를 낳고 내 몸과 내 마음에 어떤 일이 생기는지는 정말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사실 이런 모성 교육도 정말 중요한 출산, 육아 지원사업인데 모두들 눈으로 보이는 현금 지원에만 귀를 기울인다. 주변에서 나를 보고 아이를 셋이나 나서 키운다고 정말 힘들겠다고 대단하다고들 말한다. 가끔은 애국자라는 소리도 듣는다. 그런데 아이는 셋을 낳아서 키우는 것만 힘든 게 아니다. 하나든 둘이든 아이를 낳아 키우는 엄마는 다들 힘들고 다들 대단하다. 하나면 하나인대로 둘이면 둘 인대로 다 모든 힘겨운 과정을 거쳐 아이들을 키워낸다. 개인적으로도 내가 가장 힘들었던 것은 아이가 셋인 지금이 아니라 첫 아이를 낳았을 때, 아이가 하나였을 때였다. 모든 초보 엄마들에게 큰 응원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 또 그때의 나에게도. 그리고 상투적인 이 말을 꼭 붙들라고 하고 싶다. ' 이 또한 지나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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