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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해 Oct 27. 2015

베테랑

베테랑이시네 베테랑

<베테랑>은 류승완 작품중에 가장 활기차고 신나는 영화이다. 하지만 전작보다는 액션의 빈도나 밀도가 높지 않고, 처음 중고차 절도단을 체포하는 과정을 빼고나면 웃음기 없는 장면과 오락 영화로서 아주 쉽게 접할 수 있는 단순하고 평이한 서사구조(강자와 약자의 대결)를 이루고 있다. 그럼에도 관객들이 이 영화를 '통쾌하다, 시원하다, 액션과 유머가 아주 적절히 조화 되었다.' 라는 평을 남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처음 중고차 절도단을 검거하는 과정의 잔상이 꽤 깊게 남아 있어서 일 것이다. 오프닝 중고차 거래 시퀀스, 창고 슬랩스틱 액션 시퀀스, 부둣가 밀거래 검거 시퀀스를 매치컷으로 연결시켜 속도감 있게 편집하면서 공간과 공간, 상황과 상황의 단절감을 최소화 시킨다. 이로 인한 효과는 <베테랑>이 본격적인 이야기를 전개하고 이것의 주제를 파고 들어가기 전에, 관객들로 하여금 서도철 수사팀의 앙상블을 맛보고, 공감할 수 있도록 해준다. 팀으로 활동하는 각 인물들의 특성을 (과장된 유머와 몸짓을 즐기면서) 알아가고 그들의 세계를 잠깐 맛 보는 데에 아주 경쾌하고 확실한 방법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보편적인 여름 극장가에서 볼 수 있는 액션 오락 영화의 장르적 쾌감을 곁들여서 말이다.


"호의가 계속되면은, 그게 권리인 줄 알아요."

<주먹이 운다> <부당거래> <죽거나> 등이 비극적 세계관에서 동세대 혹은 윗세대에게 내지르는 객기의 형태였다면, 이번 <베테랑>에서는 뒷세대, 혹은 그다음 세대에게 전달하는 희망의 판타지이다. 예컨대 류승완 영화에서 -쉴 새 없이 터져나오는 대사부터 시작해서, 시시껄렁한 농담이나 개인적인 취향이 가득 담긴 유머, 심지어 몸개그 스턴트까지- 이런 유쾌한 요소들을 듬뿍 담은 채로, 클라이맥스에 도달해 처음으로 회한없이 승리하는 이야기는 드물었다. 자신의 필모그래피에 어떠한 전환점을 갖고자 상당히 가볍고 유쾌한 마음으로 만든 것도 있겠지만, 그 외의 요소들도 상당하다고 본다.


그러니까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하염없이 영화를 즐기고 향유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 감독을 꿈꾸기 이전 애호가적 입장에서 보았던 꿈의 영화, 류승완의 어린시절 영웅들이 많이 나오는 영화들이 특히 이번 <베테랑>이 색다른 작품이 될 수 있도록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그럼 영화 속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부둣가 검거 씬에서, 컨테이너 박스에 머리를 깡 하고 박은 미쓰봉을 왕형사(오대환 역) 가 부여잡고 '미쓰 봉~' 하는 장면이나, 열심히 도망가고 있는 중고차 절도단 보스의 옆에서 여유롭게 차를 타고 가며 능청스럽게 물 한잔과 수갑을 건네는 오달수의 연기. 또 서로 저마다의 상처를 내보여 형사 생활의 섭섭함을 공감해주길 바라는 (바지 벗는 서도철, 배를 내보이는 오팀장) 장면들이 그렇듯이. 살짝 비현실적으로 과장되거나 편안한 상황에서 터져나오는 웃음이 존재한다. 이러한 것들이 모두 류승완이 영화감독의 꿈을 갖기 전 애호가적 입장에서 보았던, 80년대 홍콩과 미국 형사영화들의 잔상이자 그 영화들에 대한 류승완 나름의 오마주라는 것이다.


<베테랑>의 액션과 흥은 80년대 형사 영화의 특징만을 포함한 것이 아니다. 먼저 중고차 절도단을 서도철 형사가 혼자서 처리하는 장면을 보면, 주변 사물을 끊임없이 이용하는 20년 대 무성 영화의 특징- 그중에서도 버스터 키튼의 슬랩스틱 스턴트 공식이 단연 돋보인다. 카센터 액션 뿐만이 아니라 명동의 카체이싱 장면 또한 이러한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명동이란 공간, 카센터라는 공간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박인채 정해진 컨셉에 따라 어떤 소품을 이용해서 어떤 동선으로 어떤 액션을 보여줄지 디테일하게 합을 만들어냈다. 구성을 완벽하게 꿰고있으면서, 거기에 치밀한 합을 맞추면서, 카메라에 완전한 전지적 시점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공간에 대한 이해도와 다양한 소품, 그리고 치밀한 합으로 만들어진 카메라의 전지적 시점은 개인적으로 버스터 키튼의 짧은 단편 <이웃>과 같은 맥락을 하는 것 같다. 때문에 동영상 콘티후 그림 콘티, 그다음에 촬영에 들어간다는데 실제 촬영 때 카메라 공간이 나오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명동 액션신에서 볼 수 있는 '류승완의 액션 공식' 아니 이것보단 (물론 이것도 맞는 말이지만) '류승완이 다루는 액션의 쾌감과 정서' 쯤으로 여겨도 될 것 같다. 대표적인 예를 들어보자. <베를린>에서부터 드러나기 시작한 모서리 공식- 서도철이 소화전에 가슴팍을 쿵 하고 부딪치는 장면이나, 위에서 언급을 했듯이 미스 봉이 머리를 깡 하고 부딪치는 장면이나, 단단한 쇠로 만들어진 출입문의 모서리를 휘갈기는 조태오의 정강이나, 때리는 쾌감보다는 맞는 고통을 잘 전달할 줄 아는, 더 전달하고 싶어하는 류승완의 장기가 여기서 나타난다. 전반적으로 가볍고 경쾌한 영화의 리듬 때문에 <베테랑>이 상당히 진지한 액션과 그것의 감정을 다루는 것 처럼은 보이지 않지만, 명동 신에서 만큼은 그러한 것들이 꽤 나타나는 듯 하다. 현란한 액션 기교보다는 서로 뒤엉켜 바닥에서 뒹구는 처절한 스턴트, 이 장면에서의 액션은 오락적 쾌감보다는 정서적 에너지에 충실한 폭력의 묘사라 말할 수 있다. 참 좋은 에너지의 묘사다. 실컷 처맞다가 "이제부터 정당방위야 이xx 야" 하곤 발차기를 날리는 서도철과 함께, 우리 역시 통쾌함과 카타르시스를 느끼기 때문이다.


언젠가 류승완 감독이 한 번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지승호 인터뷰집에서 본 기억이 있는데, 아마 내용이 이러하였을 것이다. "저는 상식적인 사람이에요. 힘센 사람이 이유없이 약한 사람 때리는 게 싫고요, 많이 가진 사람이 적게 가진 사람의 것을 빼앗는 게 싫고, 불합리한 일들이 싫고, 저는 이렇게 너무나도 상식적인 사람이거든요." <베테랑>에서 류승완은 이 단순한 상식 하나를 영화의 기둥으로 삼고, 이 단순한 상식을 극의 동력으로 삼는다. 이 상식에 대한 감독의 최소한의 믿음을 관객에게 시험하는 장면이 있다. 바로 명동 신이다. 스크린 밖에서 영화를 관람하는 관객의 입장에서, 서도철은 철저히 정의의 인물이고, 조태오는 공공의 적이다. 허나 스크린 안의 관객들, 서도철 형사와 조태오가 싸우는 모습을 스마트폰으로 담고 있는 이 방관자들은 이들중 누가 나쁜 놈인지 모른다. 방관자들은 그 누구의 편에 편중되어 있지 않으면서도 피투성이가 된 서도철을 일으켜 세워 준다거나 앞으로 가려는 조태오를 막아선다. 어리둥절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 또 하나의 관객을 통해 이런 상식에 기초한 우리의 행동을 확인하고, 아트박스 사장님을 통해 이렇게 응징할 수도 있다는 것을 각인시킨다. (결국 동석씨는 조태오에게 한소리만 하고 물러났지만)


서도철은 서민을 상징하는 '우리편'이고 조태오는 권력의 횡포와 갑질을 상징하는 '공공의 적'이다. 영화 속 서도철이 조태오를 때려잡는 것이, 바로 영화를 관람하는 관객과 영화를 만드는 창작자의 정의 의식이다. 기존의 영화라면 이러한 창작자의 정의 의식을 관객이 직접 보고 판단하는 데 분명한 딜레마가 발생할 수밖에 없지만, <베테랑>은 아주 단순하고 확고부동한 가치관으로 이를 무마시킨다. '사람이 사람에게 해선 안되는 짓' 이것은 개념이고 상식이다. 위에서 언급을 했듯, 감독은 이러한 상식에 대한 믿음을 관객에게 시험하고 인지시키면서, 서민의 바닥 정서와 보편적 정의 의식, 그리고 연대를 형성한다. 이를 바탕으로 클라이막스까지 영화를 자신있게 우당퉁탕 밀고나간다. 이것이 <베테랑> 이라는 영화가 가진 하나의 톤이며, 감독의 얼굴이다.


<베테랑>은 판타지 영화다. 비폭력으로 끝까지 싸웠던 배기사가 깨어나는 화면으로 영화는 끝이 나는데 이는 곧 배기사가 상징하는 소외되고 어려운 우리 서민의 삶, 자본주의 대기업의 권력에 억눌려있었던 우리 서민들이 승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영화이기에 가능한 이야기고, 영화이기에 가능한 결말이다. 어떻게 보면 제멋대로 구현한 정의 의식이라 말할 수 있다. 그저 표면의 영화에서, 표면적 차원으로, "우리가 이렇게 행동해야 한다" 라기보단, "우리가 이렇게 행동하면 좋을 것 같다" 라는 양식을 나열한다. 세부적으로 더욱 깊게 파고들면 결국  <부당거래> 같은 농도가 짙은 냉소극이 나오기 마련인데 <베테랑>은 수박 겉핥기 식으로 우리 사회의 문제를 응시한다기 보단 그것을 인정하고 하나의 유쾌한 극으로 만들어보인다. 관객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마당놀이 처럼 말이다. 진지하진 않아도 나는 이것 하나만으로 충분하다고 본다. 나 역시 재미있게 참여했으니까.


평점 4.0


+일부 내용은 김혜리 기자의 <베테랑> 평론-마당놀이 베테랑 뎐, 그리고 류승완 감독 인터뷰에서 따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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