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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먹고, 잘 쉬기

어느 백수의 잘먹고 잘쉰 이야기.

by 손바닥

2025년 10월 23일이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고민을 한다면 "잘 먹고, 잘 쉬고"있다고 말할 수 있다. 지난 5월, 회사에서 크게 마찰이 있고 난 뒤 고민 끝에 회사를 나오기로 결정했다. 그 과정에서 힘든 것도 많았다. 사실 이 과정에 대해서 더 자세히 다루고 싶지만, 지금은 돌이켜 생각하기에 내 상처가 덜 아물어서, 이렇게 묻어놓고 지나가려 한다.


오늘 글을 쓴 건, 내가 잘 먹고 잘 쉬고 있다는 걸 기억하고 싶어서이다. 광고대행사, 화장품제조회사, 신용평가사, 의료스타트업을 거쳐, 맞이한 휴식은 불안감을 상쇄할 정도로 너무 달콤하다. 지금도 달달함에 취해있는 것만 같다.


아침에 일어나면 하고 싶은 운동을 1개 하고, 집에 와서 점심을 차려먹는다. 최근에 살이 부쩍 올라서, 가능하면 다이어트 식으로 만들어먹고 있다. 다이어트식이 맞나? 싶을 정도로 양은 많지만, 그래도 재료는 야채로 구성되어 있으니, 다이어트 식은 맞다. 점심을 먹은 뒤엔 보고 싶은 예능프로그램을 한편 본다. 거의 항상 그렇듯, 런닝맨을 틀어서 본다. 한편 보면서 스르륵 잠에 들고 나면 오후도 다 지나간다. 3시쯤 되면 노트북을 가지고 카페로 나선다.


카페에서는 오늘 뜬 채용공고를 한번 확인해 본다. 약간의 의무감을 가지고 채용공고를 매일 확인하지만, 더는 지원하고 싶은 회사가 없다. 조용히 노트북을 닫고, 카페 밖으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한다.

옷차림이 변한 걸 확인하며, 날씨와 시간이 무척이나 흘렀음을 실감한다.


재택근무를 하며, 더위와 싸움을 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다들 하나 둘 패딩을 꺼내 입었다. 옷차림에서 가을과 겨울 사이 어디쯤을 느낀다.


너무 평화롭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의 평화에 취해 남은 따뜻한 커피 한잔을 홀짝홀짝 다 마시곤, 노트북을 들고 다시 집으로 향한다.


거의 한 8년, 내 경력으로 치부하지 않는 광고대행사와 화장품제조회사의 이력까지 치면, 세월이 벌써 그렇게나 흘렀다. 연속적으로 회사를 옮겨가며 다닌 건 아니지만, 신입시절엔 회사를 옮기며 생기는 공백기마다 불안감이 너무 컸다. 다시는 회사로 돌아가지 못할 것 같다는 불안감, 사회의 일원에서 뒤처지고 있다는 생각들에 파묻혀 여기저기 이력서를 들고 기웃거리면서 시간을 보냈다.


8년이 지난 지금의 공백은, 신입 때의 공백과 약간 다르다. 누군가 보다 뒤쳐질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회사에 가보니, 우리 모두가 물경력이었고 (글: 우리는 모두 물경력이다), 모두가 다 원하는 방향의 커리어만을 쌓을 수 없다는 걸 알게 됐다. 전전긍긍한다고 나에게 좋은 기회가 오는 것도 아니고, 반대로 태만하게 굴어도 갑자기 좋은 기회가 생기기도 한다. 인생이란 알 수가 없다는 그 말을 30대 중반이 되어가니 어렴풋 이해가 간다. 결국엔 좋은 커리어라는 것도, 그저 내가 행복하게 살 수 만 있다면 그뿐이라는 걸 알게 된다.

좋은 회사에 가고 싶은 욕심이 없지는 않다. 대기업에 다니고 싶고, 누가 봐도 멋진 디자인을 하며 인정받는 커리어를 쌓고 싶다. 하지만 그 안에 괴로움만 남는다고 하면, 나는 차라리 백수인 지금이 낫다고 단언할 수 있다.


어린 친구들이 그렇게 '워라밸 워라밸' 할 땐, '신입이 워라밸 찾다가 뭘 배우려고?' 이런 생각이 들었는데, 이제와 생각해 보면 그 친구들이 나보다 훨씬 현명했음을 깨닫는다. 인생엔 균형이 참 중요한 것 같다. 나는 이제, 좋은 회사, 좋은 커리어만큼이나 내 휴식도 중요해졌다.


이런, 이제는 회사에 연봉과 커리어, 휴식까지 보장해 달라고 해야 한다. 얼마나 좋은 회사를 찾아야 할지 감이 오지 않는다. 모든 걸 만족할 회사를 찾을 수 없다는 걸 알지만, 모든 걸 만족시켜 줄 회사를 꿈꿔보며, 나는 오늘도 잘 먹고, 잘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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