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2/13 적당한 거짓말

나름의 정직, 적당한 거짓말의 타협.

by 손바닥

공개적인 공간에 사적인 감정을 담은 글을 쓴다는 게 어쩌면 좋지 못한 습관일 수 있다. 나는 일기를 즐겨 쓰는 편은 아니었다. 초등학교 방학 일기를 써야 할 때면, 하루 전날 몰아서 일기를 쓰곤 했다.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니 갑자기 생각나는 일이 하나 있다. 방학숙제로 독후감 10편을 적어야 했다. 평소 글쓰기도, 독서도 즐겨하는 편이 아니었던 나는, 미루고 미루다 하루 전 몰아서 책을 읽고 독후감을 썼다. 문제는 독후감 공책 위 날짜였다. 날짜를 보고 한참을 고민에 빠졌다.

'열 편의 모든 독후감에 다 같은 날짜를 적어도 될까?'

마음속 천사와 악마가 다투기 시작했다. 악마가 먼저 입을 뗐다.

'하루에 몰아서 숙제를 했다는 사실을 굳이 선생님에게 알릴 필요는 없어! 적당한 날짜를 골라, 적어. 어차피 방학 숙제는 방학 동안에만 했으면 된 거야.'

독후감 공책과 달력을 번갈아 보면서 적당한 날짜를 찾기 시작했다. 공책 위에 날짜를 적으려는 순간, 이번엔 천사가 나섰다.

' 속이면 안 돼. 거짓말은 나쁜 거야. 독후감을 전부 오늘 쓴 거면 오늘 날짜를 전부 적으면 돼. 아무도 네게 독후감 위 날짜가 전부 같다는 이유로 손가락질하지 않을 거야.'

결국 손에 들었던 달력을 내려놓고, 독후감 위 날짜에 전부 같은 날을 적었다. 개학 하루 전, 방학숙제를 하루에 몰아서 했지만 내겐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 뿌듯했다.

다음날, 나는 학교에 방학숙제를 제출했다. 그 사이 수십 번 독후감 날짜를 바꿀까를 두고 고민했지만, 혼자 '나름의 정직'이라는 생각에 날짜를 고치지 않았다.

결국 그 독후감 때문에 사단이 났다. 선생님은 종례시간 아이들이 전부 모여있는 교실에서 내 이름을 부르셨다.

' 너는 독후감을 하루에 다 썼니? 독후감 열 편 날짜가 다 똑같잖아? 방학숙제를 누가 이렇게 하니?'

선생님이 하셨던 말씀 전부가 기억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아직도 나는 그날의 기분이 꽤 정확하게 기억난다. 아이들이 전부 앉아있던 교실에서 선생님이 하신 날짜에 대한 핀잔은, 순식간에 모든 이목을 나에게 집중시키기 충분했다. 그 뒤로 정말 책을 전부 읽은 거냐, 왜 날짜를 이렇게 쓴 거냐 등 많은 이야기를 들었고 교실은 나 때문에 주변 친구들의 웃음소리로 가득했다.

나는 그 속에서 무척이나 창피했다. 방학숙제를 미리 했어야 한다는 생각보단, 날짜를 바꾸지 않은 멍청한 아이로 비웃음을 당한 기분이었다.

그 교실 안에서 내 나름의 정직은 깨졌다. 내가 앉아 있던 교실에서 나처럼 하루에 몰아서 독후감을 쓴 친구가 없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선생님의 말씀에 비웃음을 보냈던 교실 속 그 친구들 중 분명 하루에 몰아서 일기를 전부 쓴 친구, 하루에 몰아서 독후감을 전부 쓴 친구가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자리에 앉아서 선생님이 그 말씀을 하셨을 때 속으로 날짜를 바꿔 다행이다 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여하튼 그 사건을 뒤로, 나는 몰아서 방학숙제를 할 때면 먼저 달력부터 찾는 습관이 생겼다.


나이가 들고 이제는 살아가는데 나름의 정직보단 몰아서 숙제를 할 때 찾았던 달력처럼, '나름의 거짓말' 이 더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

독후감을 써도 일기를 써도 적당히 감출 부분은 감추고, 나타내야 할 부분은 조금 돋보이게 적는다.

내가 공개적인 장소에 일기를 쓰면서도 내가 누구인지 모르게 적당히 감추는 것 역시 '나름의 거짓말' 일지 모른다.

어린 시절 내게 말을 걸어주었던 천사도, 거짓말은 바르지 못한 행동이다 라고 느꼈던 내 양심도,

이제는 '적당한 거짓말은 필요하다'는 편을 들어준다.

아마도 지금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독후감의 날짜를 바꾸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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