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0월, 가족 여행을 다녀왔다.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로, 토요일부터 수요일까지 5일간.
가족여행은 머리가 크고 나서는 처음이라, 게다가 해외로, 게다가 가족 구성원 네 명 전부가 다 같이 가는 것은 더더욱 처음인지라, 설렘 반 걱정 반이었다.
엄마 역시 여행 날짜가 다가올수록 주체할 수 없이 설레는지 출발 전날에는, '얘들아 출발 전날이다!', 라며 단체 톡방에 잔뜩 눌러 담은 기대를 보이기도 했다.
그에 반해 아빠는 티를 안 내려고 노력하는 듯했지만, 여행 전 우연히 백종원 아저씨가 출연하는 스트리트 푸드 파이터 2에서 하노이 편을 방영한다며 나더러 본방을 놓치지 말고 꼭꼭 보라고 신신당부까지 하더랬다.
나는 그냥 알았다고 하면 됐지 굳이 꼭 토를 달면서, 본방 놓치면 재방 보면 되지 뭘?, 했지만,
아빤, 그래도 본방을 봐야지 꼭 본방 챙겨봐, 했다.
덕분에 처음으로 음식 프로를 보고 메모까지 하며 집중했다.
여행에 대한 아빠의 기대감과 열정은 여행 중에 가감 없이 더 드러났다.
베트남에 대해 모르는 게 없는 것 같았달까.
여기는 오토바이가 경적 소리를 내는 이유가 피하라는 게 아니라 자기들이 여기 있다는 걸 알리는 거야, 라던가,
오빠가 노이바이 국제공항에서 처음 부른 그랩 택시를 보고는, 이거 진짜 택시 맞아? 진짜 택시는 파란색일 텐데?, 라던가,
백종원이가 먹던 곳이 여기야 이 길로 가야 돼, 라던가,
14만 동? 아니 조금만 더 깎아봐, 라던가.
뭐든 본인이 좋아하는 것에는 열정을 다 하는 아빠의 모습이 물씬 드러나는 시간들이었다.
물론 그 덕분에 우리 부녀가 박 터지게 싸우긴 했지만.
아빠와 나는 성격은 극도로 비슷한데 반해 성향이 극도로 반대라서, 한번 말싸움을 시작하면 끝이 없었다.
이를테면, 14만 동이라고 떡하니 적혀있는 기념품을 자꾸 10만 동으로 자꾸 깎으라는 아빠 말에,
깎는 게 아빠 방식이면 아빠가 해, 아빠 방식 강요하지 말고, 라고 나는 아주 모질게 말했고,
여행 마지막 날 짐은 이렇게 이렇게 싸는 거라는 아빠 말에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하니,
사람이 뭔 말을 하면 받아들일 줄도 알아라, 라고 아빠는 본인 얘기를 나한테 하듯 했다.
어릴 땐 늘 제멋대로에, 불평불만 많고, 말도 늘 모질게 하는 아빠의 모든 모습이 완벽히 싫었다.
어쩐지 아빠랑 얘기도 하기 싫고 말도 섞기 싫더라니, 그게 왜 그런가 곱씹어보니, 웬걸, 그게 내 모습이었다.
누군가 그랬지, 상대에게서 보이는 싫은 점은 내 안에 있는 단점이라고.
내가 싫어하고 미워하던 아빠 모습이 결국은 내 모습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뒤로 난 아빠를 미워하는 게 아니라 동정하고 사랑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사랑해야 아빠를 이해하고 나아가 나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을 테니까.
어쨌거나 우리는 5일을 크고 작게 다퉜다.
기대를 안고 도착한 그 도시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 우기가 끝날 무렵이라 그런지 덥고 습하고 여러모로 힘들었다.
소문대로 오토바이는 너무너무 많았고, 그 규모는 상상 이상이었다.
위협적인 오토바이 때문에 우리 가족은 꼭 붙어 다녔다.
종으로 횡으로 오가며 서로에게 의존했다.
게다가 그 누구도 신호를 지키지 않아서 길가에 서있는 신호등의 의미가 너무도 무색해져 내가 다 뻘쭘할 정도였으니까.
내 몸은 하필이면 또 그때 컨디션이 영 저조했던지라 더욱 고되고 민폐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최악인 것은 하롱베이 투어였다.
고속도로에서도 시속 5-60km로 달리는 통에 배를 타러 가기까지 장장 3시간이 걸렸다.
게다가 아무래도 투어이다 보니 중간에 잠시 들르는 휴게소에서는 쉴 자유 없이 모두 자다 깨서 의무적으로 버스에서 내려 2-30분가량을 의미 없는 기념품 가게에서 목적 없이 배회해야만 했다.
도착해서 본 하롱베이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없었다. 선상에서 하는 식사는 이게 밥인지, 냉동식품 인지도 모를 만큼 맛이 영 아니었다. 뭐든 안 남기고 다 먹는 우리 아빠가 고개를 저으며 접시를 밀어둘 정도였으니까.
허기나 대충 때우고 동굴을 한 바퀴 재빠르게 돌고 나서 배로 다시 이동을 하니 카약을 타는 곳에 다다랐다.
나는 몸이 안 좋아서 사양했고 오빠도 타지 않는다기에 2인용 카약에 몸을 실은 건 엄마와 아빠였다.
두려움 반 설렘 반으로 엄마는 배 앞쪽에 몸을 실었고 아빠는 뒤쪽이었다.
둘이 그렇게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카메라 셔터가 절로 눌렸다.
그림 같은 산수를 배경으로 구명조끼를 입은 채 브이를 하고 있는 엄마와 그 뒤에서 듬직하게 노를 젓는 아빠의 모습을 사진으로, 그리고 눈으로 담았다.
그래도 일정이 끝나기 하루 전 날은, 그러니까 실질적인 관광의 마지막인 넷째 날은 너무너무 완벽했다.
눈시울이 붉어지도록 푸른 하늘, 손으로 차양막을 만들게 하는 햇살.
그 날 처음으로 둘러본 곳은 호찌민 광장이었는데, 처음에 도착했을 때에는 그랩 기사가 엉뚱한 곳에 우리를 떨궈버리는 바람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돌아가야 되나 보다 싶었다.
광장의 모서리마다 서있는 국방색의 공안들은 본인들의 언어로 소통하며 화가 난 듯이 손사래를 치며 저리 가라고만 했다.
게다가 안내문에는 옷차림 제한이 적혀있었기에 엄마를 제외하곤 모두 짧은 차림이었던 나와 오빠와 아빠는 이대로 못 들어가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성 요셉 성당에 갔을 때에도 의복 제한이 있어서 엄마만 들어갔다 나왔기 때문이다.
(베트남에 있는 내내 느낀 것이지만, 꽤 유명한 관광지마저도 관광객을 위한 편의 시설이나 안내문이 잘 구비되어 있지 않는 느낌이었다. 관광객이 관광을 하기에 불편하달까. 이 때문에 아빠도 또한 어김없이 불만을 토로하긴 했다.)
그렇게 아쉬움에 배회하고 있다가 안내문을 읽어보니 입구가 이 쪽이 아닌 것 같기에 반대쪽으로 가보자고 제안을 하였다.
반대쪽 입구로 이동해보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듯 대기하고 있었다.
오빠가 옆에 있던 할아버지에게 물어보더니 그 할아버지 말로는 잠시 후 11시 정각에 문이 열릴 거라고 했단다.
엄마가 오고 싶었던 곳이었기에 특히 더 좋아하면서 그럼 우리 딱 맞춰 왔네, 했다.
정각이 가까워오자 입장이 시작됐고, 여느 큰 관광지가 그렇듯 출입국 심사대에 온 듯 엄격한 심사가 이루어졌다.
가방은 벗어서 올려두고 수색대를 걸어가야 했다.
엄마와 아빠가 그 모습을 보고 꽤나 놀란 것처럼 보이기에, 미국에서도 자유의 여신상이나 국립 도서관 같은 큰 관광지는 저렇게 검사를 철저히 해 다 그런 거야 사람들이 많이 오니까, 라고 내가 알은체 했다.
그렇게 어렵게 어렵게 들어간 호찌민 광장의 첫인상은, 넓었다. 정말이지 넓었다.
그렇게 방대한 공간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햇살이 공평하게 내리쬔다는 것이 신기할 만큼 넓었다.
호찌민 묘소 앞에는 공안들이 서있었고 어떤 제한선을 침범하면 공안들이 손톱깎이처럼 딱 잘라서 소리를 지르며 손사래를 쳤다.
그 모습에 놀라 우리 가족은 멀찌감치 떨어져서 구경을 하였고 나는 그 완벽한 날씨와 속이 트이는 공간을 배경으로 엄마 사진을, 엄마와 아빠 사진을, 그리고 엄마와 아빠와 오빠의 사진을 담았다.
바로 옆에는 한기둥 사원이 있다기에 광장을 한 바퀴 둘러보고 한기둥 사원 쪽으로 향했다.
사실 아빠는 식물을 참 좋아해서 묘소를 기준으로 양 옆에 울창하게 자라고 있던 대나무 숲에 가고 싶어 했다.
우리가 들어온 곳과는 반대쪽에 위치한 대나무 숲에 사람이 없어서 그쪽으로 가고 싶어 했지만, 그곳은 제한구역인 듯하였다.
결국 입구 쪽에 위치한 대나무 숲 앞 쪽으로 이끌어 그 앞에서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했다.
엄마가 아빠 사진을 찍어주려는데 영 구도나 비율이 별로이길래, 사진은 모름지기 정방향이고 발끝을 밑에 맞춰야지, 라고 내가 장난스럽게 사진에 대해 다 아는 척하며 열정적인 포토그래퍼의 자세를 취했다.
이렇게 하면 짧뚱인 아빠가 더 짧뚱으로 나오잖아 엄마, 이렇게 찍어야 그나마 길뚱으로 나오지, 라고 했더니 엄마와 아빠가 웃는다.
길뚱으로 나오게 해 줘서 고마워, 라고 아빠가 말했다.
사진을 찍고는 한기둥 사원 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가면서 아빠는 또 공부한 것들을 설명했다.
한기둥 사원이 왜 한기둥 사원인 줄 알아? 물 위에 떠있는 사원인데 기둥이 하나밖에 없어서 그래, 라고 말하며 우리를 끌고 신나게 설명한다.
한기둥 사원의 기둥이 정말 하나인 것을 확인하고는 그 앞의 벤치에 앉아 숨을 돌렸다.
나랑 아빠랑 오빠는 한숨 돌리고 있는데, 엄마는 사원 쪽으로 올라가 기도를 드리고 싶다고 했다.
엄마는 종교도 없으면서 사원이나 성당 구경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곤 평소에 믿지도 않는 신에게 기도를 드리곤 했다.
드릴 기도가 무어가 그렇게 많기에 성 요셉 성당에서도, 지나가던 이름 모를 사찰에서도, 이 곳 한기둥 사원에서도 기도를 할까, 라고 생각을 하며 햇살을 맞았다.
조용히 기도를 드리고 온 엄마는 우리 옆에 앉아 가만히 사원을 바라보았다.
엄마더러 사원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앉으라고 했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우리 엄마 아빠 세대는 사진 찍는 법이 우리와 참 다르다.
엄마 사진을 먼저 찍어주고 나를 찍어달라고 하면서, 이 구도로 이렇게 이대로 들고 찍는 거야 엄마 알겠지?, 라고 하며 기둥 근처에 걸터앉았다.
결과물을 보니 꽤나 만족스러웠다. 잘하고 있군.
여담이지만, 사실, 나는 사진 찍는 것을 별로 안 좋아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인물 사진에는 관심이 없거니와 내 사진이 찍히는 것에는 약간의 혐오까지 생기는 지경이다.
그런데 내가 이토록 사진에 열광한 이유는, 게다가 여행 마지막 날, 글쎄, 모르겠다, 계속해서 내 카메라에, 내 기억에, 내 눈에 엄마 아빠의 모습을 담아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시간이 지나면 언젠간 분명히 아빠에게 못 되게 말한 것도, 몸이 안 좋아서 짜증을 낸 것도, 기대에 못 미친 여행지 때문에 비협조적으로 군 것도, 그 모든 내 모습이 다 후회가 될 테니까.
그 후회마저도 기억으로, 사진으로 남겨두고 싶었다. 그래서 그렇게 마지막 날에는 엄마 보고 저기 서있어라 사진을 찍어주겠다, 했고 아빠가 싫어해도 아빠랑 엄마를 나란히 세워두고 사진을 찍어주고 싶었고, 거의 나만큼이나 사진에 혐오를 느끼는 오빠는 뒷모습이라도 담은 것이다.
나중에 돌아보면 모든 게 추억이라는 말은 거짓이 아니다.
그 당시에는 정말 모든 일들이 감당하기 어려웠고, 이렇게 온 가족이 부대끼며 한 방에서 다 같이 모여 자는 게 너무 불편했다.
어릴 때부터 엄마 아빠가 맞벌이를 한 탓에 친구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간 유치원 종일반에 혼자 남아 나머지 공부를 하며 엄마의 퇴근시간을 기다렸고, 친할머니 손에 자랐기에 가끔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는 105호 할머니나 203호 할머니에게 맡겨질 때에도 나는 할머니들 틈에서 혼자 노는 법을 익혔다. 으리으리한 2층 집으로 이사를 했을 때에도 거짓말 좀 보태면 집이 너무 커서 가족 넷이 살아도 서로 마주치지 못할 때에도 있을 지경이었다. 그래서 지금은 아빠 말로는 우리가 어릴 때 살을 부대끼며 살지 않아서 그게 한이 된다기에 극도로 작은 집으로 이사를 하긴 했지만, 아무튼. 학창 시절에도 인생은 혼자라고 생각을 하기도 했고 공부는 혼자 하는 거라는 아빠의 말에 세뇌를 당해 다른 친구들은 독서실에 다 같이 몰려다닐 때에도 나는 혼자 다니곤 했다. 대학에 들어오면서부터는 줄곧 혼자 살았으니 완전한 독립도 7년 차, 그러니 혼자에 익숙해지다 못해 도가 틀 지경이지.
그러다 보니 가족 넷이서 한 방에 자는 게 이상할 만도, 가족 넷이 다 같이 몰려다니는 게 스트레스가 될 만도 했다.
그건 아마 엄마 아빠도, 오빠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다만 그냥 내 성격이 넷 중에서도 최고로 지랄, 아니, 지랄을 넘어서 괴랄 맞고 까칠하기 때문에 나만 유독 그렇게 예민하게 굴었다. 막내 티 안 내려고, 이번에는 엄마 아빠 모시면서 다녀와야지, 다짐을 했는데도 나는 여전히 우리 가족 구성원 안에서 막내였고 아기였다.
여행 마지막 날에는 롯데마트에 가서 기념품을 왕창 구입했다. 베트남의 롯데마트는 정말 싸다기에 가서 초콜릿을 대량 구매해왔다. 같이 일하는 선생님들이랑 학생들한테도 줄 생각으로 20박스를 샀다. 엄마도 사무실 사람들에게 돌리겠다고 20박스를 샀다.
그렇게 돌아오는 길에 아빠가 배가 고프다기에 '또' 국수를 먹으러 갔다. 이번엔 그냥 길거리에 위치한 음식점에 들어갔는데, 정말 그곳은 현지인만 오는 곳인지 아무도 영어를 하지 못했고 (물론 베트남에서 베트남어가 아니라 영어를 하는 것은 실례지만) 선풍기는 가게가 문을 열고 한 번도 청소하지 않았는지 먼지가 그득 앉아있었다. 아빠는 그 모습을 보고는 선풍기를 틀어준다는 주인의 말에 손사래를 쳤다. 괜찮다고 말하면서.
아무튼 그곳은 맛집 느낌이 물씬 났고 메뉴도 딱 하나뿐이었기에, 넷이 다 똑같은걸 시켰다. 이윽고 음식이 나왔고 첫 술을 뜬 나는 바로 숟가락을 내려놓고 싶은 심정이었다. 최근 몇 달간 나는 입맛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커피를 제외하고는 모든 음식을 잘 먹지 못하고 있던 터였고, 더군다나 베트남 음식은 예상과는 다르게 입에 맞지 않아 고생 중이었다. 사람들이 흔히 힘들어하는 향 때문이라기보다는 맛 자체가 거부감이 들었달까. 아니야, 사실 거부감이라기보다는 그냥 입맛 자체가 없었고 먹는 일엔 통 흥미를 찾을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왜 먹는 것에서 기쁨을 느끼고 즐거움을 느끼는지 모르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울며 겨자 먹기로 먹어봤지만, 이내 숟가락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고 나는 몸이 안 좋아서 그렇다는 핑계를 댈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내가 무언가를 남기면 그 음식은 아빠의 그릇으로 그대로 돌아간다. 내가 거의 전부를 남긴 그 국수를 음식 남기는 꼴을 못 보는 아빠는 싹싹 긁어먹었다. 엄마도 나와 입맛이 똑같고 입이 짧아 많이 먹지 못하는 탓에, 최선을 다해 먹었다고 자랑은 했지만 아빠의 성에는 차지 않았나 보다. 엄마와 내가 시원찮게 먹는 것을 보고는 기분이 상해서는 잠깐의 관광을 마친 뒤 다시 출출해진 나와 엄마가 숙소에 들어가기 전에 반미를 사 가자고 했더니 화를 꾹꾹 참고 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아까 먹을 때 그렇게 성의 없게 먹더니 이제는 배가 고파서 반미를 먹고 싶냐고 물었다. 하나를 사서 나눠 먹을 생각에 하나만 포장해서 숙소로 가져왔고 아빠는 그 일로 단단히 화가 나서는 앞으로 본인 눈 앞에서 음식 남기는 꼴을 보여주기만 하라고 으름장을 놨더랬다. 그게 뭐 그렇게 화날 일인가 싶다가도, 나와 같이 밥을 먹는 친구들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보니 이해가 되기도 했다. 뭐든 음식을 먹으면 깨작깨작, 뭘 먹어도 맛있어하지 않는 모습에 여간 질렸을 테지.
언짢은 채로 잠에 일찌감치 든 아빠를 선두로 엄마가 잠에 들었고 나는 새벽까지도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오빠는 밤에도 외출했다가 새벽에 돌아오곤 했고 그런 패턴에 익숙해질 때쯤 여행이 끝나갔다.
다음 날 아침에도 아빠는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고 나는 진정 마지막 날이라는 생각에 한 바퀴 돌고 오고 싶어 일찍 준비를 하고 조식을 간단히 먹고 나가려고 했다. 엄마는 같이 나가자며 조식을 함께 먹으러 내려갔지만, 밥을 먹는 내내 아빠가 신경에 어지간히 쓰였던지 단톡방에 계속해서 아빠에게 톡을 남겼다. 같이 나가자는 엄마의 톡에 답이 없었던 아빠는 분명 화장실에 있을 터였는데, 문제는 우리 숙소는 사람은 넷인데 카드키가 하나뿐이라 누군가가 카드키 없이 나갔다가 문을 두드리면 반드시 안에 있는 다른 이는 문을 열어주어야 하는 것이었다. 굳이 굳이 아빠를 신경 쓰는 엄마에게 그냥 혼자 내버려 둬라, 지금 화장실에 있을 테니 올라가지 마라, 라고 일렀음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굳이 굳이 올라가서 문을 두드렸다. 당연히 안에 있는 아빠는 화장실에 있다가 나와서 문을 열어주었어야 했을 거고 그 일은 싸움의 도화선이 되어 아마 나와 오빠가 없는 그 숙소에서 둘은 대차게 싸웠을 것이다. 숙소에 잠시 올라오니 역시나 분위기는 엉망이었고, 화가 난 나는 그냥 내려와 버렸다. 사실 나는 혼자 나갈 생각이었는데, 엄마는 너무 위험하다면서 절대 기필코 혼자 나가지 못하게 했다. (엄마 말로는 베트남을 여행하는 동안 현지인들이 우리를 계속 쳐다봤기 때문이라고도 했고, 오토바이가 많아서 걱정이 된다고도 했다.) 그러니 나가지도 못하고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호텔 밖에서 서서 엄마를 기다리다가, 왜 안 내려오느냐고 톡을 보냈다. 그랬더니 엄마는 여태껏 안 가고 있었냐고 간 줄 알았다고 했다. 말이 몇 번 다시 오간 뒤, 결국 나는 조금의 돈을 받아 혼자 나가기로 했다. 베트남 여행을 하는 동안 혼자 다니는 것은 처음이라 조금 무섭긴 했지만, 답답한 마음에 무작정 걸었다. (혼자 미국도 한 달을 다녀왔는데, 왜 베트남은 유독 더 무서웠을까? 아직도 의문이다.) 그렇게 호텔이 있는 길목에서 빠져나오고 있는데, 갑자기 엄마한테 같이 가자는 연락이 왔다. 발걸음을 호텔 쪽으로 돌려 다시 걸어갔더니 엄마가 나오고 있다.
아침부터 나가려고 준비한 모든 게 헛수고가 된 것 같아 답답한 마음이기도 했고, 굳이 굳이 마지막 날 그렇게 별 것도 아닌 걸 가지고 대차게 다투는 엄마 아빠의 모습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래서 어떻게 됐어?, 하고 물었다. 엄마는, 뭘 어떻게 돼, 한판 했지, 하며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한다. 옛날의 엄마라면 아빠와 싸우고는 바로 풀이 죽어 눈물을 흘렸을 텐데 세월이라는 게 정말 무섭구나 싶다. 1991년부터 시작된 둘의 결혼생활 동안 시간이 그저 쌓이는 것뿐만이 아니라 어떤 견고함도 함께 쌓이기도 하는구나, 엄마에게는 강인함이나 무던함을 심어주기도 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 잘했어, 하고는 둘이 길을 걷는다. 어디 갈래?, 물었더니 호수 쪽을 다시 걷고 싶다고 한다. 베트남 여행 동안은 오빠와 아빠가 길을 다 찾아준 덕분에 나는 한 번도 지도를 열어본 적이 없는데 엄마와 단 둘이 있으니 내가 지도를 보게 되는구나, 생각하면서 지도를 켜 호수 쪽으로 향했다.
베트남에서 5일을 지내며 호안끼엠 호수는 3번 정도 방문했다. 토요일 밤에 방문한 호수는 축제가 열리는 정신이 없는 호수였고, 두 번째로 방문한 호수는 딱 예상한 관광지 정도였으며, 마지막으로 엄마와 함께 방문한 호수는 정말이지 고요하고 조용한 호수였다.
가는 길에 아무 카페나 들어가 커피를 테이크 아웃했지만, 커피는 기대보다 맛이 없었고 (베트남에 있는 내내 나는 한국의 커피를 그리워했다.) 날씨는 좋았다. 호수 쪽으로 가까이 다가가 아무 데나 걸터앉았다. 엄마랑 나는 가만히 앉아 호수를 바라봤다. 호수 정가운데에 조각상인지 사원인지 모를 무언가가 서있었는데, 엄마는 그 모습을 보더니, 지금 물이 오른쪽으로 흐르는 게 아니라 저게 왼쪽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아, 했다. 매직아이가 없는 내 눈엔 아무런 변화가 없길래 그저 가만히 있었다. 우리 가족은 넷 다 말이 별로 없어서 그나마 수다스러운 사람을 뽑자고 하면 엄마였다. 엄마는 나를 옆에 두고도 계속 얘기를 했다. 베트남에 와서 느낀 점, 뭐 이것저것. 베트남에 와서 좋다, 하더니 갑자기 훌쩍거린다. 훌쩍훌쩍거리면서, 왜 나 눈물이 나지, 한다.
옛날 같으면 엄마 우는 모습에 억장이 무너지고 엄마가 어딘가로 가버릴까 걱정이 되고 엄마가 부서져버릴까 손발이 떨리다 못해 불안했어야 했는데, 옆에서 우는 엄마 모습은 처음인지 오랜만인지 아무튼 그래서, 아니다, 내가 감정이 너무 무뎌져서, 아니, 그냥 나는 이제 우는 일에는 신물이 나버려서, 아무튼 덤덤하게, 너무 좋아서 눈물이 나?, 라고 물어보며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엄마는 왜 울까 생각하면서, 아빠랑 싸워서?, 아니면 다른 힘든 일이 있을까?, 엄마도 엄마가 가진 삶의 무게가 나만큼이나, 아니, 나보다도 더 무겁고 견디기 힘들겠지, 하면서, 생각만 하면서, 아무 말 없이 옆에 앉아 있었다. 누군가가 울 때 옆에 앉아만 있는 일이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 나는 정말 모르겠어서, 그게 힘이나 지니고 있는지, 그냥 옆에 누군가가 우는데 앉아 있기만 하는 건 실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냥 옆에서 가만히 가만히 함께 숨을 쉬어주는 일 밖에는 없었기에 그냥 그렇게 가만히 있었다.
롯데 타워 전망대에서도 넷 중에 유일하게 용감하게 터벅터벅 바닥이 뻥 뚫린 스카이워크를 걸어간 엄마인데, 그토록 용감하고 씩씩하고 밝았던 당신이 아름다운 호안끼엠 호수를 바라보며 눈물을 보였다. 이유를 물을 시간은 충분했다. 그 순간에 바로 물었을 수도 있었고, 아니면 숙소로 다시 돌아오는 길에, 아니면 여행이 끝나고 나서 전화로 물어볼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묻지 않았다. 걱정되고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왜인지 무슨 마음이었는지 알 것 같아서. 엄마도 엄마만의 짐이 있음에 틀림없을 테니까. 굳이 묻지 않아도 어떤 마음이었는지 이해가 가서. 다시 엄마의 눈물을 헤집어 꺼내보이고 싶지 않아서.
그렇게 여행을 다녀온 지 반년이 흘렀고 나는 여전히 엄마가 왜 그때 그 아름다운 호수를 보면서 여행의 마지막 날 너무 좋다면서 울었는지 모른다.
심지어 요새는 그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살다가 문득 생각이 난다.
다만, 확실한 것은 지금의 나는 베트남에서 찍은 가족여행 사진을 더 이상 아무렇지 않게, 그저 추억거리 삼아 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하얗게 쇠어버린 곱슬곱슬한 머리에, 가만히 들여다보면 보이는 할머니의 얼굴, 옷은 패션에는 정말 관심이 없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아무 무늬나 골라서 주워 입은 데다가, 행여나 잃어버릴까 배에다가 가방을 메곤 한국인 관광객 티를 팍팍 내면서, 한 손에는 휴대폰을 꼭 붙잡고 있는 아빠 모습을 보면, 그 모습을 보면 가슴이 답답하고 마음이 먹먹하고 눈물이 나기 때문이다.
나는 웬만하면 후회하는 일을 만들지 않고, 설사 그런 일이 생긴다손 치더라도 최대한 후회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인데, 이건 마음처럼 잘 안된다.
내가 그때, 그 5일 동안 얼마나 아빠에게 못 되게 굴었는지가 너무도 생생해서, 그때의 내가 죽기보다 더 밉고 싫어서, 사진을 보고 있자면 행복하고 돌아가고 싶다기보다는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느낌이 너무 강해서, 아빠에게 그리고 엄마에게 또 오빠에게 너무 미안해서, 그때 그 시간들이 평생 후회로 남을 것 같아서, 아빠의 얼굴을, 또, 엄마의 얼굴을 보니 그게 너무 마음이 아파서 사진을 보고 추억을 곱씹을 수가 없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5일간의 하노이 여행은 나에게,
아빠에겐 미안한 마음을, 엄마에겐 가여운 마음을, 오빠에겐 고마운 마음을 남긴 듯하다.
어제오늘 엄마 아빠에게 느껴진 미안함이 요동을 쳐 눈물을 펑펑 흘리다, 마음속 서랍 깊숙이 기록해두었던 글을 읽어보았다.
반년이나 흘렀음에도 글은 그 때 그대로 생생하다.
나는 오늘도 또 엄마 아빠에게 새삼스레 미안하고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