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5-09 오후 5:07
면접에서 떨어졌다.
다른 사람을 채용하기로 했다면서, 다음에 다시 기회가 되어 꼭 같이 하면 좋겠다고 한다.
일을 쉰 지 얼마 되지 않은 터라, 떨어져도 그만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마음에 맞는 곳을 오랜만에 발견한지라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러고는 원래 일하던 곳을 향해 매일 걷는 길을 걸었다.
대충 탈락을 예상했지만, 원하는 곳으로부터 밀려나 추락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감정이 상하는 일이다.
답답한 마음을 안고 걷자니 건물과 차가 빽빽한 그 풍경이 무척 답답하고 약간은 후덥지근한 공기조차도 불쾌하다.
거기다 잠잠해지고 있던 코로나가 다시금 물을 흐리고 있다는 뉴스를 보니, 그동안 전 국민이, 특히, 공무원, 군인, 경찰 등 나라에서 온 힘을 다해 일구고 있던 평화가 다시 깨지는 것 같아 화도 나고 답답한 기분에 나도 모르게 신경이 곤두선다.
나도 인지하고 있지 못했던 가시 돋친 말투를 친구는 이해한다고 말한다.
걷다가 하늘을 올려다보면 건물의 빼곡한 머리들 사이로 하늘이 빼꼼이다.
그렇게 건물이 많은 곳도 아닌데, 시골이라 부를 수 있는 곳에서 나고 자란 내게는 어쩔 때는 마치 감옥 같다.
숨이 턱 막히는 풍경에 눈이 머무는 곳은 높아봤자 건물의 꼭대기층 창문이다.
그러다 문득 남들이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이 많은 곳들 중에 내가 들어갈 자리가 있긴 한 걸까?'
남들이 다 하는 것은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공무원 준비를 하고 싶지도 않았고, 회사에 들어가고 싶지도 않았다.
수차례 스스로에게 물었지만, 대답은 한결같았다, 그런 일들은 하고 싶지 않다고.
내가 결코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나와 맞지 않는 곳에 나를 끼워 맞출 자신이 없었다.
누구든 다 이렇게 산다고 한다.
스스로와 맞지 않는 곳에 맞춰야 하는 현실이 지옥 같아도 그냥 스스로를 깎아서라도 끼워 맞추는 게 현실이라고, 그게 어려워도 그 어려운 것들을 해내는 게 우리라고, 어려운 거 다 안다고.
나는 아직 철이 덜 들었는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찾아야만 한다는 그 고집을 꺾지 못했다.
그렇다고 하고 싶은 게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어릴 때부터 엄마 아빠는 입버릇처럼 내가 자유롭게 살면 좋겠다고 말했다.
남들이 다 하는 공무원 말고, 남들이 다 하는 거 말고, 자유롭게, 행복하게 살면 좋겠다고.
'외교관 어때?'
어린 그때의 나에게 엄마는 진지하게 물었다.
외교관이 뭐냐고 묻는 내게 엄마는, 외교관이 되면 전 세계를 돌아다닐 수 있다고, 얘기해주었다.
어릴 땐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 답변은 정말 매력적인 답변이었다고 생각한다.
엄마 아빠가 내게 원하는 삶의 방향과 그나마 가장 일치하는 직업이었을 테니까.
그 직업에 대해 생각을 아예 해보지 않은 것도 아니다.
외무고시에 대해 알아본 적도 있었지만, 아무나 외교관이 되는 것도 아니고, 하며, 겁쟁이 같은 내 그릇을 보고 화들짝 놀라 지레 포기했더랬다.
그 결과 나는 아직도 방황하는 중이고, 어버이날 그 흔한 선물 하나 못해주고 되려 엄마에게 부탁해서 책 5권을 선물 받았다.
지금 그 책들이 도착했다는 문자를 받았다.
엄마는 그 이후로도 책 한 권을 또 사서 보낸 듯하다.
엄마가 추천해주는 책은 읽든 아니든지 상관없이 받으면 기분 좋은 선물이다.
바짝 말라가던 대기에 촉촉이 비가 적신다.
산도 들도 들끓는 열에 불이 크게 나기도 해 걱정이 컸는데, 지금 내리는 이 비로 조금은 목을 축였기를 바란다.
최근에는 또 노란 송화가루가 말썽이다.
좋은 공기 좀 마시려고 종일 환기를 하고 싶어 하루는 창문을 열고 저녁나절에 외출을 하고 돌아왔다가, 하루 종일 바닥과 상, 물건들을 닦았던 그 날 이후로 창을 열어두지 못했는데, 비가 내린다.
오늘은 문을 마음껏 열어두어도 된다.
비 냄새가 올라온다.
축축하고 퀴퀴한 냄새, 비 냄새. 풀 냄새.
바닥에는 노란 가루가 섞인 물웅덩이로 가득하다.
비가 내리고 나면 건조하고 부옇던 대기가 물기를 머금고 상쾌해지겠지.
이렇게 비가 쏟아지는데 도시가스를 검침하는 아주머니께서 집집마다 돌아다니신다.
원래는 모르는 사람이 벨을 누르거나 문을 두드리면 무서운 마음에 사람이 없는 척 숨 죽이고 있는 편인데, 오늘은 두 번 발걸음 하게 하기 싫어서 바로 문을 열어드렸다.
아주머니께서 가스와 보일러를 검침하시는 동안 급하게 작은 봉투에 두유 하나와 과자와 사탕 몇 개를 챙겨 넣었다.
이상 없다고 말씀하시며 나가시길래 급한 마음에 '비가 이렇게 오시(?)는데 고생하시니까.. 별거 없지만 이거라도 좀 드세요. 고생하세요.' 한다.
나는 얼마나 존칭을 쓰고 싶었으면 비가 오신다고 했을까.
아주머니가 가시고 나서도 혼자서 '비가 오시네요?' 되짚으며 웃는다.
도착한 책을 서둘러 뜯어보았다.
책 냄새가 좋다. 비 냄새도 좋고.
책이랑 비 냄새도 좋고, 빗소리도 좋고, 음악 소리도 좋고, 어두운 토요일 오후도 좋다.
책을 좀 읽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