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회피형 인간이다.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에 나는,
맞서서 풀어나가기보다는 도망치고 외면하는 편이다.
새로운 변화가 생기는 것 또한 무척 싫어해서,
일을 벌이기보다는 그저 현재의 생활에 안주하거나
아무 일도 하지 않음으로써 변화를 최대한 피하는 쪽이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일상에 변화나 균열이 생기면
개복치처럼 금세 숨을 헐떡거리는 것이다.
나이에 비해 체력이 없고 도전의식이나 열정이 없으며
삶에 대한 의욕이나 미래에 대한 의지가 없어
아주 자주 환갑을 훌쩍 넘은 사람처럼 말하곤 하니까,
애늙은이라고 봐도 무방하겠다.
도전해서 무너지고 깨짐으로써
내 부족한 점이나 밑바닥이 타인에게 보이는 것이
죽기보다 더 싫은 나에게
어떤 일에 맞서는 것보다는 그냥 회피하는 편이
어쩌면 구원인 것이다.
그러다 보니 새로운 변화를 코 앞에 둔 나는
극도로 예민한 상태가 된다.
모든 일에 반감이 생기고 별 것도 아닌 일에 짜증이 나고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펄쩍펄쩍 뛰어
정신이 하나도 없다.
심할 때에는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닌데도
엉엉 울기도 하는 게 딱 바보 천치 같다.
미국 가기 전이나 이사 하기 전과 같은 경우가
여기에 해당되는데,
곧 새로운 일을 하게 될 지금도
비슷한 경우가 아닐까 싶다.
그럴 때면, 새로운 것이 두려워서 미치기 일보 직전이면,
마치 5살 먹은 애가 되어버리는 게
쓸데없이 순식간에 동심을 회복하는 느낌이랄까.
누가 대신해주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아는데도,
같잖은 생떼를 부린다.
-나 안 해. 나 아무래도 못하겠어. 못 해, 안 해. 네가 해.
-어차피 겪어야 할 일이잖아. 계속 피할 수는 없어. 맞서야지.
-나 원래 회피형 인간이잖아. 그냥 도망칠래.
-나는 네가 잘할 거라는 걸 알아. 처음은 누구나 다 어려워. 일단 한 번 해보자. 부딪혀봐야지.
-부딪히면 깨지잖아. 깨지는 거 싫어.
-철은 아닌데? 철은 부딪힐수록 강해지잖아.
-그건 철이고, 나는 유리라 계속 부딪히면 산산조각 나서 깨져버린단 말이야. 안돼. 못해.
-유리도 녹으면 부딪혀도 안 깨져.
-그럼 어쨌든 녹아야 하잖아. 나는 아직 안 녹았어. 나는 부딪히면 깨지는 유리야.
-아니야, 넌 잘할 수 있어. 나는 그걸 알아.
이렇게 막무가내로 갓난아이처럼
말 같지도 않은 떼를 부려도
돌아오는 답변은 차분하고 논리적이며
심지어 내게는 과학적(?)이기까지 하다.
아직도 다 크지 못한 내게 세상은 악마 같다.
모든 일이, 모든 사람들이 다 무섭고 두렵고 낯설다.
나는 그런 세상에 단 한 발짝을 내딛는 것조차도 겁이 나,
마치 오빠, 할머니랑 셋이 타지에 있는 친척 집에 놀러 가
엄마와 생이별을 한 것만 같은 기분에 엄마가 보고 싶어
삼일 밤낮을 베갯잇을 적시며
남몰래 소리 죽여 사무치게 울어대던 아이가 된 것만 같다.
이 나이가 되면, 아주 어른은 아니어도,
그래도 조금은 철도 들고 성숙해지고
어엿한 어른이 될 줄 알았는데.
그저 나는 아직 옛날 그 시간에 홀로 멈춰 서서,
그 자리에 앉아 엄마가 오기만을 기다리던
아이이자 애늙은이일 뿐이다.
언제쯤 세상이 내 눈 안에 다 들어올 수 있을까.
새로운 모든 것들이 두려워 어디로든 숨고 싶은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