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시생일 때 공부는 제대로 한 적이 없으면서 다른 것들은 참 열심히 했다. 때로는 밤을 새워가며 열중하기도 했다. 공부가 재미없으니 재밌는 걸 찾아다녔던 것 같다. 공부에만 미쳐서 다른 건 하나도 안 하고 싶었는데 그때만큼 이거 저거 해본 때도 별로 없는 듯하다. 명백한 현실도피였다. 공부해야 하는 시간에 하는 딴짓은 죄책감만큼이나 짜릿함도 컸다.
나는 원래 혼자 놀 줄을 몰랐다. 고등학교 때도 여자애들이 흔히 그러듯 화장실도 혼자 못 가고 꼭 친구 데리고 가곤 했다. 머리를 하러 갈 때도 옷을 사러 갈 때도 같이 가줄 친구가 없으면 못 갔다. 유학생일 때 혼자이긴 했지만 그때는 어쩔 수 없이 혼자가 된 거였고 혼자인 걸 즐기지 못했다.
고시 준비를 하면서 혼자 노는 법을 배웠다. 영화를 보고 싶고 뭘 먹으러 가고 싶은데 같이 갈 친구를 구하기 어려웠다. 다들 나름대로 자기 일로 바빴고 시간 맞추기도 쉽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 동행할 친구가 없어서 뭘 못한다는 게 짜증이 났다. 그래서 친구들을 조르는 대신 가고 싶은 데가 있으면 혼자 가보기로 했다.
당시 나는 먹을 거에 집착했다. 일상이 따분하고 단조로워서 그랬던 것 같다. 전혀 즐기지 못하는 공부를 억지로 붙잡고 있었으니 더 그랬을 거다. 매일 공부하다 말고 몇 시간씩 맛집을 찾아봤다. 보다 보니 가고 싶고 먹고 싶어서 어느 날 처음 혼밥을 시도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나를 처량하게 보지 않을지 눈치가 보이고 움츠러들었다. 그래도 다 먹고 나오면서 뭔가 해낸 것 같은 뿌듯함을 느꼈다. 그래서 몇 번이고 다시 시도하다 보니 어느새 익숙해졌다.
혼자 보는 영화는 오히려 좋았다. 나는 크레딧을 끝까지 보고 나오는 편인데 누구랑 같이 가면 그냥 그 사람한테 맞춰서 먼저 일어나곤 했다. 혼자 가니 그럴 필요가 없었다. 영화를 보고 감상을 나눌 수 없는 건 좀 아쉬웠지만 혼자 보니 영화에 더 집중이 되고 다 보고 나서도 혼자서 온전히 여운을 간직할 있었다.
혼자 노는 게 이렇게 좋은 거란 걸 뒤늦게 알게 됐다. 누구랑 시간을 맞출 필요도 눈치를 볼 필요도 없이 그냥 내가 움직이고 싶을 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돌아다니면 됐다. 가끔은 외로웠지만 혼자인 게 너무 편하고 좋았다. 혼자서 뭘 할수록 자유로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고시 준비를 하는 동안 나의 가장 큰 활력소는 단연 야구였다. 나는 그때 흔했던 베이징 뉴비였다. 어릴 때도 야구를 조금 봤고 박찬호 이후 메이저리그도 봤으니까 야구를 아주 몰랐던 건 아닌데 국내 프로야구를 보지는 않았다. 그러다 베이징올림픽 때 야구를 너무 재미있게 봤고 올림픽이 끝나자 프로야구로 관심이 옮겨갔다. 인천토박이였던 나는 자연스레 SK팬이 되었다.
고시생 주제에 매일 야구중계를 챙겨보고 야구가 끝나면 야구프로그램과 기사를 찾아보고 야구를 더 자세히 알고 싶어서 야구 서적을 사서 읽었다. 혼자서 직관도 다녔다. 야구는 내게 부족한 도파민을 가득 채워주었다. 더군다나 그때 SK는 승승장구하는 팀이었고 훈련이 빡세기로 유명했다. 뭔가를 열심히 해서 이뤄내 본 적이 없는 나는 열심히 노력해서 승리를 거두는 선수들에게서 대리만족을 느꼈다. 그래서 더 야구에 미쳤던 것 같다. 김성근 감독님을 존경했다. 저렇게 뭔가 하나에 지독하게 미쳐보고 싶었다. 지금은 나는 그럴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고, 저런 삶만이 정답은 아니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여전히 감독님을 존경한다.
드라마와 배우 덕질도 했다. 오래전 명작을 찾아보고 좋아하는 배우의 이전 작도 찾아보고 같은 드라마를 보고 또 봤다. 드라마를 볼 때도 엄청 몰입해서 봤는데 지금은 그때처럼 드라마 볼 때 집중하지 못한다.
드라마 장면을 편집해 만든 MV를 보고 내가 원하는 노래로 내가 원하는 장면이 들어간 MV가 보고 싶어서 영상편집도 했다. 완전히 생소한 분야라 하나하나 검색해서 찾고 프로그램을 이리저리 만져가며 MV를 만들었다. 그렇게 만든 MV가 열 편이 넘었다. 재미있어서 시간 가는 줄 몰랐고 밤을 새운 적도 많았다. 그렇게 만든 영상은 대부분 혼자만 봤다. 그래도 좋았다. 공부에서 느껴야 할 뿌듯함을 엉뚱한 데서 느끼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그때 나는 고시생이라기보다는 그냥 취미 생활을 즐기는 백수에 가까웠다. 공부보다 딴짓에 열심이었다.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그래서 더 몰입이 되고 재미있었다. 좀 거창하게 말하면 금기를 깨는 것 같았달까. 현실도피는 너무 달콤했다. 정작 나중에 마음껏 무엇이든 해도 좋을 때에는 뭘 해도 집중이 안 되고 재미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즐거웠다. 현실도피의 모든 순간이.
하지만 마냥 즐길 수만은 없었다. 그 순간이 달콤할수록 마음 한켠엔 죄책감이 쌓였다. 신나게 즐기는 와중에도 항상 찜찜했다. 스스로가 너무나 한심했다. 이렇게 흘려보내는 시간이 아깝고 무서웠다. 도피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오면 더 괴로웠다. 현실도피를 하는 만큼 자기혐오가 커졌다. 온전히 즐기지 못하면서도 나는 중독된 듯 계속 현실도피에 빠졌고 그러고 나면 자기혐오가 더 심해지고 그러면 한심한 나를 잊고 싶어서 또 현실도피에 빠지는 악순환이 계속됐다.
다 나한테 맞지 않는 걸 놓을 용기가 없어서 붙잡고 있다가 생긴 부작용이었다. 이렇게까지 현실도피를 하면서 어리석게도 나는 그만두지 못했다. 사실은 고시 준비를 하는 것 자체가 현실도피였으니까. 고시로 현실을 도피하고 도피한 현실에서 또 도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