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지옥
* 졸업한 지 12년이 넘었습니다. 미국 치대 입학관련 질문 사양합니다. 죄송합니다.
나는 치과 의사다. 어릴 적, 어른이 되면 의사가 될 거라고 상상해 본 적도 없다. 노는 거 좋아하고, 사람들 좋아하는 내가 주야장천 공부만 해야 하는 전문직인 의사나 치과의사, 한의사, 이런 '사'자 직업을 장래 희망란에 적어봤을 리가 없다. 그런데 내가 치과의사가 되다니. 치과 의사가 된 것이 자랑스러워서가 아니라 왠지 나와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 같아서이다.
내 장래 희망은 원래 교사였다. 운 좋게도 나의 대부분의 모든 선생님들이 나에게 상냥하고 친절하셨다. 나도 그분들처럼 친절한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한창 배울 때, 모든 공부방향이나 나의 대학 지원 방향을 누군가 명쾌하게 교사가 되기 위한 길로 안내해 주었더라면, 나는 교사가 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맏이로 태어나 언니, 오빠도 없고, 기숙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부모님과도 떨어져 지내는 나에게 딱히 멘토가 없었다. 그런 나는 모든 게 즉흥적이었다. 꿈 따로, 공부 따로, 전공 따로, 모두 따로국밥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적성을 감안하여 반이 나뉠 때쯤, 대부분 조용하고 수학에 조예가 깊고, 조용히 공부에 열중하는 친구들은 이과반으로 갔고, 말이 많고, 낭만이 있으며, 유희를 좋아하는 친구들은 문과를 갔다. 유희하면 빠질 수 없는 나도 친구들을 따라 문과를 선택했다. 나는 수학에는 흥미가 없었다. 말 그대로 수학 포기자, ‘수! 포! 자!’ 수학 빼고는 다 좋아했으니 수학 스트레스가 좀 덜한 문과를 선택하는 것이 당연했다.
기숙사 생활을 하던 나의 중고등학교 시절 동안에는 학칙에 어긋나지 않는 한, 내 마음 내키는 대로 부모의 간섭이 없이 지내는 생활이 너무도 즐거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부모님이 잔소리를 많이 하는 타입이 아니시라 같이 지냈어도 별 무리가 없었을 테지만, 사춘기 여고생의 오버스러운 호르몬 때문에, 그 당시 그 누구의 간섭 없이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대단히 행복했었다고 추억해 본다.
지금은 꿈처럼 아득한 기억이 되었지만, 고등학교 2학년 때는 인기가 점점 하락해가는 학교 축제 연극 행사에 감독을 맡고, 전례 없는 축제 연극 행사의 역사를 새로 썼었다.
'최진사 댁 셋째 딸'이라는 연극이었다. 사실 이 연극은 중학교 때 친한 친구가 진학한 학교에서 축제 때 선보였던 연극이었다. 인물들의 첫 등장부터, 설렘과 감동이 뒤섞여 내 마음은 초롱초롱 빛이 났다. 연극이 끝난 후, 시간과 함께 희미해질, 다시 볼 수 없는 그들의 대사와 무대의 모습들을 종이에 그리고, 또 써 내려갔다. 인터넷이 전무했던 그 시절, 그 방법이 최선이었다.
극본이 완성되고 축제연극 담당 선생님께 극본을 들이밀었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 선생님도 얼떨떨하셨는지, 쉽사리 나에게 연극에 관한 모든 것을 일임하셨다. 나는 이때다 싶어, 연줄로 축제연극에 주인공을 꿰차고, 공부 잘하고, 집안 좋은 아이들의 전유물이었던 과거 축제 연극의 모든 전통을 깨버리고, 전교생을 상대로 오디션 공고를 냈었다. 오로지 실력으로만 캐스팅을 했다. 그들과 함께 축제 한 달 전부터, 자율학습 시작하기 전, 매일 1시간씩 연습에 매진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선생님들께서는 한 번만 올리고 말 연극을 여러 차례 리바이벌 공연을 하도록 주문하셨다. 나도 즐겁고, 친구들도 행복했고, 선생님들도 좋아라 하셨다. 1993년, 내 모교의 가을 축제는 연극 하나로 모두가 해피한 추억이 되었다. 그 계기로 난 대학에 가서도 연극 동아리에서 연기도 하고 감독도 했었다.
일련의 흥미로운 사건들과 기억들로 나의 문과 청소년 시절은 나름 재미가 있었지만, 기숙사 생활을 하던 나는 마음이 외롭고 허전했기에 무언가에 항상 빠져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사고칠 것만 같았다. 바람을 넣다 놓쳐버린 풍선이 어디로 갈지 모르게 이리저리 사방으로 튀어 오르다 결국 땅에 곤두박질치는 것처럼, 무언가에 깊이 몰두하는 것으로 계속 바람을 주입해야만 추락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 점에서 사춘기 여고생들이 공부가 아니더라도 아이돌에 빠지는 것은 어찌 보면 건전할지도 모르겠다. 기숙사 생활을 하는 나에게 TV라고는 전무하니, 내가 빠진 것은 가요도, 아이돌도 아닌, 하나님이었다. 엄마가 신앙생활을 성실히 하셨고, 기독교 학교의 환경은 신앙 빠가 되기에 너무 좋은 환경이었다.
나는 구약 성경에 나오는 다니엘에게 푹 빠졌었다. 교내 채플에서 목사님과 선생님들이 돌아가며 하시던 설교에는 다니엘이 자주 등장했다. 다니엘은 항상 멋진 영웅이었다. 지혜롭고, 도전적이며, 죽음에도 굴하지 않는 그를 존경했다. 나는 그가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기도하고, 매일 성경 말씀을 마음의 양식 삼아 읽었다.
이런 나에게 고3 담임선생님은 신학과 지원을 추천하셨고, 나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기뻤다. 신학과에 가면 그동안 신앙을 하면서 궁금했던 모든 인생의 문제들을 다 해결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실리를 추구하시면서 평범하게 살기를 바라셨던 부모님은 당연히 반대하실 것이라 짐작했기 때문에 말을 얼버무렸다. 그리고 덥석 신학과에 합격을 했다.
1, 2학년 내내 나는 너무도 행복했다. 모든 과목들이 내게 마음의 큰 울림이 있었고, 마음이 꽉 차는 경험을 했었다. 아, 그런데 대학 졸업 후, 내 직업은 제대로 고려하지도 않은 채 이 전공을 택해서 왔으니 3, 4학년의 과목을 들을 때마다 나의 미래는 암담했다. 의례, 신학과를 졸업하면 목사님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나는 목회하는 것 자체를 생각해 본 적도 없었을뿐더러, 부모님의 극심한 반대가 있었다.
2학년이 될 때쯤, 신학과에 들어간 사실을 알아버린 부모님은 나를 핍박하기 시작하셨다. 특히 아버지가. 아버지는 나와 눈만 마주치면, 내 전공의 미래에 대해 마음에 생채기가 되는 심한 말을 많이도 하셨다. 나는 사체업자의 돈을 떼먹은 채무자처럼 아버지를 피해 숨어 다녔다. 2학년 때쯤, 자기 적성이 맞지 않는 아이들이 전과를 택하거나 편입을 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나도 그 선택을 하는 것이 맞았을 텐데, 왠지 오기가 생겼다. 부모님의 극심한 반대가 없었다면 그 선택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자기가 무슨 독립군도 아니면서 끝까지 버티고 버텨 신학과 졸업장을 따내고야 말았다. 신학과든 목회든 둘 다 반대하시니 둘 중에 하나는 내가 쟁취해야 이기는 게임 같아 졸업장만은 포기를 못했다. 지금은 다른 길을 가고 있지만 순수했던 나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때의 배움이 나의 삶 곳곳에 좋은 자양분이 되어 나를 나답게 살게 하기 때문이다.
졸업 후, 비록 정식 목회는 하지 않았지만, 주말에는 위장한 새끼 목사처럼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했다. 무슨 일로 먹고살아야 할까 고민하던 중, 한 가지 다행이었던 것은 해외에 가본 적은 없지만, 어린 시절부터 영어를 좋아해서 재미로 영어를 공부했었다. 대학시절 내내, 영어를 손에 놓지 않았고, 단순히 영어로라도 밥 벌어먹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영어학원들을 기웃거리다가 '통역 대학원 준비반'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그 수업에는 내 또래의 여학생들이 많았다. 호기심으로 등록한 수업과 함께 학원비를 대려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주경야독했다.
시간은 금세 일 년이 지나고 이 년이 되었다. 어느 정도 실력이 되니 선교사가 출석하여 통역이 필요한 교회에서 통역봉사를 할 수 있었다. 물론 함께 봉사하는 사람들 중에 내가 제일 실력이 안되긴 했었다. 통역 봉사하시던 다른 두 분은 모두 해외파였다. 소위, 금수저님들. 부럽지는 않았지만,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요즘, 한국의 청년 실업이 우리 때보다도 더 심해져서 안타깝기 그지없다. 하지만, 20년이 훨씬 지난 그 당시 내 신세도 요즘의 젊은 친구들과 별만 다를 것이 없었다. IMF를 정통으로 맞아, 청년 실업률이 재앙 수준이었던 그때는, 내가 졸업할 때였다. 대학 졸업 후, 이렇다 할 직업도 없이 학원을 전전하는 세월이 점점 길어지다 보니 답 없는 내 인생이 너무도 처량하게 느껴졌다.
부모님이 딱히 압박을 주시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학원 준비를 하면서 보내는 매일매일이 고통이었다. 1남 3녀 중 장녀로 태어난 나는 일종의 책임감이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내가 제대로 뭔가를 하지 않으면 그 영향이 동생들에게까지 갈 것만 같아 너무도 괴로웠다.
그 당시 통역대학원은 한국 외국어 대학교와 이화여자 대학교가 전부였다. 경쟁이 치열할 수밖에 없기도 하지만, 통역이라는 것 자체가 완벽에 가까운 영어는 기본으로 장착이 되어 있어야 하고, 모든 분야의 영어와 국어 전문용어 및 어떤 순간에도 당황해하지 않으면서 기발한 순발력으로 적절한 단어와 문장을 구사해야 하는 전천후 기술적 능력을 동시에 요하기 때문에 순수 국내파가 완벽하게 통달하기에 힘에 부치는 일이었다.
매년 학원에 새로 등장한 해외파들이 1년도 공부하지 않은 채, 빠른 시간에 합격하는 걸 지켜보면서 허탈감으로 몸과 마음이 지쳐갔었다. 거의 매일 밤, 눈물로 밤을 지새우며 옆에 자고 있던 동생에게 울음소리가 들릴까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울었던 적이 수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친절하신 교회 담임 목사님이 미래를 걱정하는 내게, "미국에서 치대 공부를 해 보는 건 어떠세요?"라고 뜬금없는 제안을 하셨다. '웬 치대, 치과의사? 내가?'라는 생각으로 "에이, 목사님, 저 문과예요. 제가 무슨 치과의사를..." 하고 대답했는데, 목사님은 그 말만 남기시고, 몇 개월 후, 향학을 위해 미국으로 떠나셨다. 허탈함은 오래갔다.
통역 대학원 준비가 녹록지 않았고, 평균 통역사의 연봉이 점점 줄어드는 추세로 치닫고 있었다. 국내파에게 특히 고시공부처럼 해야 했던 대학원 준비는, 온갖 시간, 노력, 돈 투자 대비, 그 성과가 매력적이지 않았다. 나는 직업 나침반을 다시 세팅해야 했다.
그냥 적성이고 뭐고 친절하신 목사님이 가신 미국을 무작정 따라가고 싶었다. 오래간만에 목사님과 연락이 되었는데, 우연인지 필연인지 파트타임으로 치의예과 리크루터로 일하고 계셨다. 여러 가지 절차들을 알려주셨고, 그 이후, 나는 일주일 동안 토플 벼락치기를 감행했다. 다행히 그동안 영어 공부를 놓지 않은 덕에 학교가 원하는 토플시험 성적을 받아냈다.
입학 허가서인 I-20를 받고 준비를 시작한 지 3개월 만에 나는 미국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번개처럼 모든 일들이 재빠르게 진행되었다. 난생처음으로 떠난 미국 유학이 수학도 과학도 재능이 없는 내가 치과 대학을 가기 위해서라니. 어떤 일이 닥칠지 아무것도 모른 채.
내 마음속 어딘가에서, ‘네가 원하는 직업이 치과의사가 맞니?’라는 질문이 올라왔다. 무시했다. 일단 답 없는 이 지옥 같은 경쟁에서 도망가고 싶었다. 그게 또 다른 지옥일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