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마귀는 길조였다
* 졸업한 지 12년이 넘었습니다. 미국 치대 입학관련 질문 사양합니다. 죄송합니다.
미국에 발을 디딘 후, 내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새로웠다. 해외라고는 여행사를 끼고 친한 선배 언니랑 단둘이 갔던 홍콩 3박 4일이 고작이었는데, 태평양을 건너서 미국에 오다니. 여행으로 왔다면 더욱 좋았겠지만, 공부를 하러 왔으니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겠지.
그렇지만, 나는 도착하자마자, 여행자의 마음이었다. 캘리포니아 성격에 맞는 드넓은 초원의 잔디밭은 빌딩 숲에서 매연을 마시며, 지하철로 땅 속 깊은 곳으로 다니느라 해와 자연을 멀리하며 살았던 나에게는 마음 정화, 안구정화가 동시에 되는 환경이었다.
봄방학 주에 도착한 나는 시차 때문에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늦은 밤 잠을 청했지만, 새벽 3시도 안되어 깨어버린 날이 여러 번이었다. 그때마다 동이 틀 때까지 잡일들을 하며, 해를 기다렸다. 5시쯤이 되고서, 기숙사 뒷문으로 나왔다. 후배에게 중고로 산 디카도 야무지게 챙겼다. 그 당시 핸드폰에 카메라 기능이 없었다.
아무도 보이지 않는 미국의 낯선 교정을 걷는 기분이란, 시간이 멈춰버린 세상에서 홀로 마법 속을 거닐고 있는 느낌이었다. 미국 물 잔뜩 먹은 학교 건물들은 골동품 마냥 색이 바래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한국과 조금이라도 다른 이국적인 그 모습이 너무도 환상적이었다.
마음속으로는 ‘야, 촌티 그만 내!’라고 말을 하고 있었지만,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해서 혼자 헤벌쭉한 얼굴로 교정을 돌아다녔다. 잠도 못 자고 제대로 피곤한 얼굴을 한 채, 나의 20대 때에 그렇게 혼자 즐거운 기분이 몇 번이었나 생각해보았지만, 거의 없었던 것 같았다.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을지도. 한국에 있는 내 또래의 수많은 경쟁자들을 따돌리고 나 혼자 이곳에서 유유자적하는 기분이었다.
학교 잔디밭에는 까마귀가 지천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흉조인 까마귀마저도 좋았다. 교정 잔디밭의 까마귀를 벗 삼아 디카로 까마귀만 여러 번 찍어 그 시절의 SNS ‘싸이월드’에 올렸더랬다. 그 사진을 본 내 친구들은 대체, 왜 까마귀 사진만 그렇게 올렸는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하하! 까마귀 사진이 인기가 정말 없었지.
그런데 내가 올리는 사진마다 댓글을 달던 한 사람이 있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사진에 댓글을 달아주니 그나마 외로운 기분이 조금 달래지는 듯했다.
유학을 시작하자마자 등장한 이 사람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다. 내 유학생활과 미국 정착에 구석구석, 이곳저곳에서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내가 한국에서 통역대학원 준비를 그만두고 밥벌이로 투잡을 하고 있을 때, 내 사이버 영작문반의 학생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별로 달갑지 않은 학생이었다.
매일 학생들이 제출해야 하는 숙제 분량은 하루에 다섯 문장 정도였고, 나는 10-20명 정도 학생들의 숙제를 교정하는 일을 했었다. 그런데, 그 학생은 뻔뻔하게도 매일 장문의 토플 수준 영작문을 내게 보내왔다. 난이도를 떠나서 다른 학생들의 5배 이상이었다. 그러니 나에게 짐이 될 수밖에.
그래도 어쩔 수 없이 해야 할 것 같은 일종의 책임감 때문에 성실히 해주었다. 그랬더니, 오만가지 내용을 다 내게 쏟아내듯이 보내왔다. 한 번은 자신의 신상정보를 숙제에 길게 써서 보내왔는데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 사실, 사이버 수업이기 때문에 얼굴 볼일 없으니 알 필요도 없지 않은가.
그러던 어느 날, 그 학생은 숙제에 나를 만나고 싶다는 말을 써서 보내왔다. 귀찮았다. 어차피 못 만날 것이라 생각하고, 언제 기회 되면 보자고 영혼 없는 대답을 보냈다. 그런데, 그 이후로도 집요하게 졸랐다. 하는 수 없이 주말에 학원에서 원생들에게 제공하는 주말 프로그램에서 만나기로 했다.
예의 상 그의 인상착의라도 알아보기 위해 다시 한번 그의 숙제와 이메일을 뒤적거렸다. 어느 정도 적당한 정보만을 숙지하고 약속 장소로 나갔다. 겨울이었던 그때, 그는 떡볶이 코트를 입은 키가 멀대같이 큰 장발의 파마머리 남학생이었다.
나는 선생의 마음으로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는 그 학생에게 주려고 내가 더 이상 보지 않는 영어교재들을 가지고 나갔다. 열심히 공부하라는 의미로 책 몇 권을 주고, 얼굴만 확인한 후에, 다음을 기약했다.
밥을 먹자고 했는데, 시간이 없었다. 그때 사실 난 초고속으로 미국 유학을 준비하는 중이었기 때문에 하루 24시간도 모자를 지경이었다. 밤잠을 한숨도 못 잔 날들이 많았다.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낮에는 한국의 일들을 정리하고 친구들을 만나느라 스케줄이 통 나지를 않았다. 실망한 눈빛이 역력한 그 친구를 뒤로 하고 나는 내 볼일을 보러 가버렸다.
그 이후로, 그 친구는 틈만 나면 전화를 해서, 밥을 먹자고 졸라댔다. 내가 밥을 먹어 줄 때까지 조를 것 같아 하는 수 없이 스케줄을 겨우 짜내어 한국을 떠나기 바로 이틀 전, 같이 밥을 먹으러 갔다. 그는 내게 밥을 사준다며, 그 당시 젊은이들의 핫플레이스였던 ‘스파게티아’를 가자고 했다. 지갑에서 주섬주섬 쿠폰 여러 개를 꺼내며 자랑하듯 펼쳐 보였다. 어이가 없어서 코웃음이 났다.
나는 서양 국수보다는 냉면이 먹고 싶어 그를 냉면집으로 데려갔다. 냉면을 먹은 후, 커피숍에서 거의 두 시간가량을 함께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지만, 그 친구가 음료를 엎질러, 하마터면 옷과 신발이 엉망이 될 뻔했다. 아, 익숙지 않은 사람과 이런 일은 더 나를 불편하게 한다.
너무 오래 시간을 보내면 안 될 것 같아, 대강 정리를 하고 서두르듯이 빠져나왔다. 그날 그 이후의 일정대로 나는 학원으로 향했다. 그다음 날도, 마지막 정리를 하기 위해 학원으로 다시 출근을 했다.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그 학생은 학원에 다시 모습을 보였다. 다시 나타난 모습은 멀끔하게 이발을 한 모습이었다.
그는 나에게 책을 선물로 받은 답례로 나에게 줄 것이 있다며, 나를 학원 2층 빈 교실로 데려갔다. 잠깐 호기심이 발동했지만, 밥 한번 먹고 몇 번 얼굴만 본 것이 고작이라 그가 익숙지 않아 불편했다. 디카로 같이 사진이나 찍어야겠다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빈 교실에서 그 친구는 자기 가방 속에서 철컥철컥 소리 나는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쌍절곤’이었다. TV에서는 봤어도 실물로는 처음 본 물건이었다. 그러더니, 그 쌍절곤을 허공에 휘날렸다. ‘이소룡’ 같은 사람만 할 것 같은 쌍절곤 무술이 내 눈앞에서 펼쳐졌다.
아, 이건 뭐지! 표정관리가 안되어, 디카에 내 얼굴을 가려버렸다. 입은 멋지다고 말해주며, 연신 사진을 찍었지만, 그때 내 마음은 내 입의 말과 정반대였다. 그 광경이 생경하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했다. 부끄러움은 왜 내 몫인 건지.
어쨌든, 열심히 쇳덩이를 돌리는 그 젊은 청년의 마음이 가상해서 최대한 매너를 지켰다. 순수한 청년이었지만, 음, ‘세상에 이런 일’이 PD에게 제보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쇳덩이 공연의 끝은 절도 있는 뒤돌려 발차기였다. 영혼 없는 박수로 마무리를 했지만, 한편으로는 혼자 보기 아까운 공연인 것 같기도 했다. 실없는 웃음이 나왔다. 너무 당황스러워서 함께 사진을 찍으려던 생각도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 학생은 철컥거리는 쌍절곤을 내게 내밀며 나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한마디, “선생님, 내가 찾으러 갈게요. 버리지 마세요.” 라며 자신이 꼭꼭 눌러쓴, 두 장의 편지를 내게 주었다.
일이 점점 더 커지는 것 같았다. 알게 된 지 얼마 안 된 이 학생의 마음이 너무 커서 적응이 안되었다. 그의 편지 내용은 유학 중, 나의 안전과 성공을 바라는 순수하고 착한 마음이 가득 담겨있었다.
아, 이 친구는 뭐지? 나를 얼마나 오래 봤다고. 이렇게 순수한 사람을 처음 본 것 같았다. 편지야 뭐 줄 수 있다 치지만, 귀중해 보이는 쌍절곤을 왜 내게 주는지. 주는 걸 버릴 수 없어 받아오긴 했다.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 내 마음속 친구라는 서랍에 잠시 저장해 두었다. 어차피 미국으로 가버리면, 이 불편한 관계도 끝나버릴 테니.
미국에 올 때, 내 짐은 거의 초과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덩치 큰 그 친구의 선물인 쌍절곤을 짐 속에 욱여넣었다. 혹시 진짜 나중에 달라고 할까 봐 무서웠다. 너무 진심 같아서. 진짜 정말로 찾으러 올까 봐서. 어쨌든, 버리지 않고 가지고 왔으니 됐다.
까마귀를 쫓아다니며, 까마귀 사진만 찍는 내가 불쌍하다며, 그 친구는 이메일로 전화번호를 물었다. 한번 정도 안부 전화는 괜찮을 것 같아, 기숙사 방 전화번호를 알려주고 전화 통화를 했다. 그런데 그 통화는 하루가 일주일이 되고 한 달이 되었다. 사실 한 번만 할 생각이었지만, 타국 생활에 외로움을 달래는 꿀 같은 시간인 것 같아, 그다음 날에도, 또 그다음 날에도 그의 통화를 거부할 수 없었다. 그는 내게 매일 전화를 했다. 전화선을 타고 썸을 탔다고 해야 하나.
그러기를 한 달 후, 결국 우리는 썸을 넘어 공식적인 친구가 되기로 했다.
미국에 와서 처음 사귄 친구는 까마귀인데, 그 까마귀가 한국에서 다른 친구를 물어다 주었다. 참, 예로부터 새들에게 잘해주면, 보은을 해주는 이야기가 많은데, 나는 까마귀에게 무슨 잘한 게 있었을까? 그 새벽, 아무도 없는 교정에서 같이 잔디밭을 걸어준 게 좋았을까. 아니면, 견우와 직녀를 만나게 해 준 까마귀 중 한 마리였을까.
아직도 나에게 까마귀는 길조다. 미국에 살아서 길조가 아니라, 내 인생의 반려자가 될 좋은 친구를 물어다 주었으니 당연히 길조가 되었다. 고맙다. 까마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