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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애틀 닥터오 Nov 04. 2020

골골한 여장부 기댈 곳을 찾다

프롤로그 - 연상연하 동거이야기

중학교에서 대학교까지 나를 아는 사람들은 대부분 나를 ‘여장부’쯤으로 본다. 그들은 나를 목소리 크고 항상 자신감이 넘치고, 무엇하나 거칠 것이 없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어떤 사람들은 ‘여자가 너무 드세다.’ ‘너는 여자 같은 맛이 없다.’라는 말을 종종 하기도 했는데, 자주 기분이 나빴다. 내가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그들의 눈에는 거슬리게 보였는지, 그 말을 할 때는 나도 기분이 나빠졌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신경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왜 여자에게 예의 없이 ‘남자 같다’는 말을 함부로 하는지. 어렸던 나는 드세게 반박을 하지 못하고, 그들이 말하는 대로 그냥 두었다.

그들의 말이 듣기 싫어 혹시 나 자신을 바꿔야 하나 진지하게 생각하며, 내 의견도 없이 조신하고, 조용하게, 몸을 사리고, 적극성 없이 수동적인 자세로 살아야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왜 이런 모습을 가지고 있을까 곰곰이 생각했다. 답은 어린 시절에 있었다.

어릴 적, 아빠는 내가 기죽어있는 것을 보는 게 싫으셨다고 하셨다. 그래서 틈만 나면, 나에게 제식훈련을 시키셨다. 목소리를 크게 내는 법을 가르치셨고, 학교에서 수업시간에 모르는 것이 있으면, 거침없이 질문을 해야 한다며, 손을 번쩍 들고 질문하는 법을 연습시키셨다. 항상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들이 말하는 나의 ‘여장부’ 이미지는 여자이지만 기죽지 않는 모습을 원하셨던 아버지의 교육의 산물이었다.

아빠는 내가 태어났을 때, 24살 새파랗게 젊은 청년이었다. 나는 태어나자마자, 죽을병에 걸려 출생 신고도 하지 않은 채, 죽을 날만을 기다렸다고 했다. 실제로 12월에 태어났지만, 호적은 그다음 해인 2월에 올라가 있어서 실제 생일과 주민등록에 올라간 생일이 다르다.

내막은 이랬다. 내가 태어나고 몇 주가 지나서, 어느 몹쓸 아주머니가 감기에 든 채로 나를 보러 왔던 것이었다. 그 감기가 태어난 지 한 달도 안된 나에게 옮겨 붙어, ‘백일해’에 걸렸단다. 아기가 어느 정도 크고 나서 걸려도 낫기 힘든 독한 감기를 태어나자마자 걸려 버린 것이었다. 한 달도 안된 신생아가 소리마저 연약한 효과 없는 기침을 하루 종일 하는 통에 배꼽이 성인 엄지 손가락만 하게 나와 있었단다. 나를 낳고 스물이 갓 넘은 엄마는 첫 아이를 하루라도 더 살려 보려고 밤새 젖은 거즈로 가래를 걷어냈다. 병원에 데려갔지만, 의사들은 70년대에 신생아에게 줄 약이 그리 많지 않아 당황해했고, 약 같지도 않은 약을 먹여봤자, 차도는 없었다.

아기는 기침으로 하루하루 숨소리가 약해져 갔다. 어린 엄마는 하염없이 울어댔고, 화가 난 청년 아빠는 약봉지를 모조리 집어던졌다. 어떻게라도 살려보겠다는 심정으로 무작정 밖으로 나갔다. 그 당시, 들판이 천지인 깡시골로 버스도 다니지 않았고, 유일한 교통수단은 자전거 한대. 지금도 차로 가면 1시간을 가야 하는 동네를 자전거로 몇 시간을 이동하며 생면부지 아주머니, 아저씨, 나이 드신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나의 상태를 설명하고 선인의 지혜를 얻으려고 했다. 하지만, 죽어가는 아이를 살리는 약방문은 쉽게 얻을 수 없었다.

어느 날, ‘딸아이가 이제는 죽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포기 마음으로 터덜터덜 자전거를 타고 어느 이름 모를 동네를 지나고 있었다. 저 멀리, 동네 어귀에 듬직한 정자 하나가 보였다. 그 아래에 너덧분의 할아버지들 둘러앉아 장기를 두고 계시는 듯했다. 20대의 젊은 아빠는 옆에 가서 잠시 앉아 쉬었다 가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그분들에게로 갔다. 젊은 청년이 풀 죽은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을 본 할아버지들은 무슨 일인지 물어보았다. 청년 아빠는 아이의 상태를 이야기했다. 할아버지들 중, 하얀 수염을 가슴까지 기르신 한 분이 눈을 아련하게 뜨고, 먼 산을 바라보며 말했다.

“동쪽으로 뻗은 은행나무 가지 하나를 꺾어다가 물에 끓여 먹여.”

그때까지 적당한 방법을 제시한 사람이 없었던 터라, 이 말을 들은 청년 아빠는 당장에 동쪽으로 뻗은 은행나무 가지를 구해다가 가마솥에 끓였다.

어린 아기 엄마는 은행나무 가지를 달인 물을 이제는 숨소리도 거의 나지 않는 아에게 숟가락으로 조금씩 떠 먹였다. 그날 밤, 아기는 기침도 없이 조용했다. 엄마는 아이가 죽어간다고 생각했다. 거즈로 가래를 걷어내느라 뜬 눈으로 또 밤을 새웠다. 너무 조용해 진짜 죽었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아침 밝자, 아이의 숨소리는 되돌아왔다.

하룻밤 만에 은행나무 가지 달인 물을 먹고 기적처럼 회생한 것이었다. 그날도, 그다음 날도, 은행나무 가지 달인 물을 하루도 빠짐없이 먹었다. 아이는 백일해를 거뜬히 이겨내고 이렇게 살아서 글을 쓰고 있다.

부모님은 태어나자마자 그런 일을 겪은 내가 항상 안쓰러우셨고, 내 몸이 약하다고 생각하셔서, 11살까지 녹용을 넣은 한약을 매년 먹이셨다. 그 덕에 나는 감기에는 잘 안 걸리지만, 여전히 다른 이유들로 골골하다.

아버지는 내가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을 무척 싫어하셨다. 태어나자마자 병에 걸려 고생하던 나를 강하게 키우려 했던 아버지는 나를 여장부로 만드신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몸이 아파도, 아픈 척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아프다고 말도 잘 못 하겠다. 아픈 것이 싫었고, 아픈 것을 숨기려 애썼다.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있으면 더 아픈 것 같고 더 죽을 것 같아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였다. 아픈 걸 숨기려고 더 센척하고 아무것도 아닌 척, 더 쿨한 척했었나 보다.

학교 때 만났던 모든 친구들은 내가 건강하다고 생각했다. 몸이 약하긴 하지만, 운동을 좋아해, 중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체육부장을 도맡아 했다. 그게 친구들이 내가 건강하다고 믿는 증거이기도 하다.

대학 때 과 선배들과 동아리 남자 선배들은 특히 나에게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다’는 진담 같은 농담을 했었다. 나는 그 말에 적잖이 상처를 받았었다. 내가 어느 날, 몸이 좋지 않아 연약한 모습을 보이면 그들은 많이 당황해하고 어색해했다.

내 젊은 날 연약한 내 몸을 편히 기댈 곳은 많지 않았다. 그들의 기대와 걱정 때문에.

하지만, 골골한 내가 이제 기댈 곳을 찾았다. 남편의 바로 옆.

이제부터 17년 된 나와 남편의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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