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우리의 만남은 선생과 학생 사이였다. 전설의 드라마, ‘로망스’에서의 “너는 학생이고, 나는 선생이야!” 뭐 이런 드라마 같은 일은 없었다. 성인으로 만났고, 배움이 끝난 후, 친해졌다.
나는 미국으로 유학을 갔고, 그는 한국에 남겨졌다. 전화 데이트로 한 달의 썸의 기간이 지나고, 그는 수줍게 내게 사귀자는 말을 했다. 나는 ‘나도 네가 좋지만, 사귀는 일은 우리가 만나지 않는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못을 박았다. 쉽게 말해, ‘네가 미국에 온다면, 사귀어 줄게.’였다.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갈게! 내가 갈게!”라고 말했다. 그 대답으로 일단 우리는 서로의 관계에 대한 가계약을 맺은 셈이었다.
그가 사귀자고 말했을 때는 만감이 교차했다. 그가 미국으로 올 수 없다면, 우리는 이대로 끝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매일 한 시간씩 전화기만 붙들고 세월만 보낼 수는 없었다. 끝이냐 시작이냐는 그의 손에 달렸다. 그가 어떻게 행동하든지 나는 담담히 지켜보기로 했다.
그는 재빨랐다. 필요한 서류와 유학에 필요한 재정 등등을 알아보더니, 여러모로 힘에 부치는 일이었지만, 모든 주변을 정리하고 비행기 표를 예약했다. 그가 나를 만나러 오는 날은 8월의 마지막 날, 캘리포니아의 뜨거운 여름이 모든 걸 녹여내던 때였다.
LAX 공항, 도착장에서 그를 기다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를 마주하는 게 어색했다. 전화상으로는 한없이 자상하고 꽤 괜찮은 남자 친구였지만, 한국에서 마지막으로 본 그는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제는 전화가 아닌 실제로 그의 모습을 보면서 남자 친구라는 존재로 인식해야 했다. 쉬울리 없었다. 전화선이라는 가상현실과 실제 현실 사이의 간격은 좁혀지지 않았다.
괜히 ‘미국 오면 사귀겠다’고 말해놓고 문제를 크게 만든 건 아닌지, 전화 데이트와 실제 데이트와의 갭을 메울 수 없어 결국 헤어지는 건 아닌지, 그러다가 결국 유학생활을 다 망쳐버리는 건 아닐지. 그를 기다리는 동안 설렘 가득한 군중들 속에서 온갖 잡생각이 끊이질 않았다. 내가 그를 보고 실망하면 어떡하지? 그가 나를 보고 실망하면 어떡하지? 나는 그가 볼 수 없도록 최대한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몸을 낮췄다. 숨어 있었다는 것이 더 맞겠다.
그의 모습이 보였다. 처음 봤을 때, 그 모습 그대로였다. 하지만, 당황스럽고 어색했다. 나 혼자만 그를 보고 있었는데도 얼굴이 붉어지고, 온몸에 털이 쭈뼛 올라왔다. 그동안 우리가 나눴던 전화 속의 모든 기억은 내 머릿속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만 같았다. 그와의 기억이 완전히 포맷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현실에서의 그의 모습은 완전히 다르게 느껴졌다. 심장이 발아래 저만치로 떨어졌다 올라왔다를 반복했다. 불안함으로 심장이 두근댔다가도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가 이제 가상현실이 아닌 실제 내 삶의 일부가 된다는 것 자체를 받아들이기가 버거웠다.
낯선 미국 땅에서 처음 보는 그의 얼굴은 무척 상기되어 있었다. 두리번거리며 나를 찾고 있었다. 나는 더 몸을 숙이고 그가 나를 찾지 않기를 바랐다. 내 모습이 보이지 않자, 그는 지갑에서 지폐 하나를 꺼내어 공항 커피숍에서 동전으로 바꾸었다. 나는 그 모습을 멀찍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건물 기둥에 설치된 공중전화박스에서 전화를 걸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전화를 받았다. 몸을 숨긴 채, 인파들 사이로 저 멀리 보이는 공중전화 박스 안에서 어깨를 구푸린 그의 모습은 한 마리 가련한 기린 같았다. 이대로 영영 내가 모습을 감추어 버린다면, 저 선량하고 순진한 그는 12시간을 날아와 첫 발을 들인 이 낯선 땅에서 난생처음, 한때 선생이었고, 한때 전화로 장거리 연애를 했던 여자 친구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받고 인생을 비관하며 살아가겠지.
결단을 해야 했다. 이 오글거리고 불편한 감정을 참자. 나만 참으면 될 것 같았다. 우리의 가계약의 종료는 이제 내 손에 달렸다. 그는 온몸으로 나를 찾고 있었고, 전혀 나를 불편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전화기를 든 채로 그가 서 있는 공중전화 박스로 다가갔다. 내 목소리가 가까워오자, 그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나를 한 번에 알아보고 와락 안아 버렸다.
LA와 서울의 한 여름이 그에게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끈적끈적한 그의 팔뚝과 장시간 비행의 피곤함이 느껴졌다. 싫었지만, 그의 노고가 느껴져 뿌리치지 못했다. 아빠가 딸아이를 찾은 것 같은 모습으로 나는 어린애 마냥 안겨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일단 오늘은 무난히 넘어가자. 어떻게든 되겠지.
우리는 그렇게 가계약을 끝내고, 어색하게 현실에서 남자 친구와 여자 친구라는 이름으로 다시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