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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최인아 북클럽 책- 이어령, 80년 생각

80대에도 여전히 창조적 사고를 멈추지 않는 노학, 그가 가진 창조력의 비밀을 찾아가는 인터뷰 책이 나왔어요. 그 비밀 중에 하나에 대해서 얘기하는 챕터를 소개합니다. 모국어로 생각하기. 너무나도 당연한 말인 것 같은데 그의 창조력의 씨앗은 여기에 있다고 합니다.


세 살 때 배운 토착어의 숨은 힘.


“우리말을 살리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 일인가요?’ 란 질문에 그는 “한자나 영어 같은 외래어들

은 구두 신고 발을 긁는 것과 같잖아” 라며 구두 위를 벅벅 긁어대는 시늉을 해 보였다. 순간 웃음

이 터졌다. 이 교수에게서도, 내게서도, 동석한 모든 이들에게서도.


“상처위에 생긴 딱쟁이가 떨어지면 여린 새살이 나잖아. 한자와 그 많은 외래어들은 한국인의 마음

에 난 상처를 덮은 딱지 같은 거예요. 그게 떨어지면 그 안에서 나온 새살의 감촉과 예민한 신경줄

같은뜻이 살아나는 거고. 한국말이라고 다 그런 건 아니에요. 아무데나 만진다고 간지러워? 아니

잖아. 간지럼 타는 부분이 따로 있듯, 같은 뜻의 센서티브한 말들이 있어요. 좋은 말이라도 자꾸 쓰

면 굳은살이 박이지. 일상어는 발뒤꿈치처럼 굳은살이 박인 언어고."


모국어로 생각하기. 이어령 교수가 가진 창조력의 씨앗은 지극히 당연한 이 말 속에 녹아들어 있다.

19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한자의 벽이 높았고, 1900년대 초반에 유행했던 한자어병용 표기의 흔적

이여전했다. 최남선이 쓴 한국 최초의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 라든지 이인직의 소설 ‘혈의 누’

가대표적인 예다. 전자는 ‘바다에서 소년에게’ 의 의미이고, 후자는 ‘피의눈물’ 이다. ‘사람이 길게

서서’ 라는 말을 ‘인人 이 로路에 立하여’ 라는 식으로 쓰는 일도 허다했다.


이와관련된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있다. 2012년 한국에서 개최된 국제펜pen대회 당시의 일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오르한 파묵, 르 클레지오 그리고 한국 대표로는 이어령 교수가 주제 강연을

했다. 그런데 이 교수의 발표문 가운데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 를 주최 측에서 ‘From the Sun

to Boys’ 즉 ‘태양에게서 소년에게’ 의 뜻으로 표기해 버렸다. 바다를 바다라는 우리말 대신 해라는 한

자로 말해야야만 했던 한문 문화의 슬픈 유산이 빚은 해프닝이었다.


이어령교수는 한자의 벽에 갇혀 있던 우리말을 과감히 불러냈다. 이때의 우리말은 그저 우리말을

살리기만 하는 말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경영을 ‘살림살이, 자본을 ‘밑천’ 으로바

꾸는데는 동의하지만 전화기를 ‘번갯불 딱따구리’, 공처가를 ‘아내 무섬쟁이’, 이화여자대학교를 ‘배

꽃계집 큰 배움터’ 식으로 바꾸는 건 패착이라는 것이다.


다시말해 모국어 중에서도 토착어를 살려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토착어란 세 살 때 어머니

의 품에서 옹알이를 할때부터 몸에 익힌 모국어다. 이 교수는 앞서 ‘ 내인생의 첫 책은 어머니의

모습’ 이라며 ‘어머니의 말, 어머니가 읽어주셨던 그 많은 모음과 자음에서 상상력을 길렀다’ 라고

그는 모국어로 생각하는 것이 왜 창조력과 영감의 원천이 되는지 설명했다.


“세살 먹은 어린아이도 알아들어야 하는 말이어야 해요. ‘맘마’ ‘지지’ 같이 이가 나오면서 배우기 시

작하는‘근지러운 말’, 어머니의 육체성이 있는 말, 학교에서 암기한 말이 아니라 맨 몸으로 어머니

에게서 배운 말들 말이야. 그래야 피와 살이 있는 거지."


언어의 마술사가 가친 첫 번째 비결은 밝혀졌다. 세 살 때 배운 토착어여야 한다는 것. 그래도 의문은 가시지 않는다. 한국인이라면 누군들 모국어로 생각하고 말하지 않을까. '언어의 마술사' 의 비밀 도구는 아직 다 공개되지 않았다. 마술사의 비결이 하나일 리는 없지 않은가. '무엇을' 밝혔으니 '어떻게' 를 밝힐 차례가 온 듯하여 다시 묻자 그는 두 번째 비결을 털어놓았다.


"나는 말 위에 서서 말에 말을 걸었어요."


말 위에 서서 말에 말을 걸다니. 몇 번 되새겨보지만 알 듯 말 듯 잡히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별 생각 없이 말을 흘리지. 스케이트 타듯이, 말 위에서 미끄러지듯이 말이야. 그런데 나는 말 위에 멈춰서서 말을 걸어요. 그 차이라는 거지. 사람들은 휙휙 주마간산식으로 말을 보는데, 나는 재미난 말이 있으면 멈춰서서 봐요. 1초만 멈춰 서서 생각해봐도 새 뜻이 나오고 새 음성이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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