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만나볼 작품은 정여울 작가님의 문학 수업 7번째 책인 마이클 온다체의 맨부커상 수상작 “잉글리시 페이션트” 이다. 정여울 작가님의 해석을 통해 책을 더 사랑하게 된다.
모든 희망이 다 사라진 뒤에도, 무언가를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그 어떤 억울함도 분노도 없이.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이 작품은 그렇다고 이야기한다. 잉글리시 페이션트는 도저히 치유될 것 같지 않은 무시무시한 상처를 끌어안고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동시에 그 모든 상처와 절망의 시간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지상에서는 불가능할 것 같은 아름다운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한다.
이 작품의 배경은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 무렵. 이탈리아 북부의 버려진 수도원이다. 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되어버린 수도원에서 치명적인 전신 화상으로 죽어가는 영국인 환자가 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결코 말하지 않기에 사람들은 그를 그저 잉글리시 페이션트라고 부른다.
온몸이 화상으로 덮여 있지만 그 화상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그의 마음 속 상처인 것 같다. 이 영국인 환자를 놀라운 인내력으로 돌보는 스무 살 간호사 해나 또한 마음 속에 상처를 간직하고 있다. 사랑하는 약혼자가 전쟁 중에 세상을 떠나버린 것이다. 그리고 연합군 스파이었던 도둑 카라바지오. 폭탄처리 전문가이자 시크교도인 공병 킵이 이 낡은 수도원에 모여 살고 있다. 국적도 사연도 꿈도 희망도 모두 다른 이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살며 전쟁 이전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파란만장한 삶이 펼쳐진다. 아무런 상관이 없어 보이는 절망의 깊이가 비슷한 네 사람이 모여 살고 있다.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서로를 치유해주는 이야기다.
영국인 환자는 평화롭게 죽으려고 하는데 한나의 정성어린 치유로 인해 자신의 상처를 보여준다.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이 수도원은 버려진 페허이기에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심각한 화상을 입어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상태다. 의료용 모르핀 없이는 하루도 견딜 수 없는 상태에도 침착하게 고통을 이겨내고 있다.
한편 전쟁의 포화로 약혼자가 사망한 뒤 모든 희망을 잃은 해나는 공식적인 간호사 업무를 거부하고 홀로 수도원에 남아 이 신원미상의 영국인 환자를 보살피기로 결심한다. 죽은 약혼자에 대한 끝나지 않은 사랑을 간직한 채 세상 밖으로 나가기를 거부하는 해나를 보며 카라바지오는 소리친다. “스무 살짜리가 유령을 사랑하기 위해 세상에서 떨어져 나오다니!. 카라바지오는 해나를 걱정하며 말한다. “넌 슬픔으로부터 너 자신을 보호해야 해. 슬픔은 거의 증오에 가까워.” 하지만 해나는 가망 없는 영국인 환자, 얼굴도 이름도 없는 신원미상의 환자를 치유하며 자기 안에 새로운 희망이 싹트기 시작함을 느낀다.
화상을 입어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영국인 환자에게 진정한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은 그의 외모가 아니라 그가 살아온 ‘이야기’ 다. 해나의 따스한 돌봄에 확답하듯, 그는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아주 조금씩 자신의 상처를 들려주는 영국인 환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해나는 이상하게도 자신이 오히려 보살핌을 받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해나는 온 힘을 다해 자신을 돌보고 있지만, 사실 해나는 의사보다는 환자에 가깝다는 것을. 죽은 약혼자를 잊지 못한 해나는 ‘우리 둘 모두 유령을 사랑하고 있다’ 며 영국인 환자와 자신의 공통점을 알아챈다. 영국인 환자는 자신의 죽은 연인 캐서린을 여전히 사랑하고 있고, 해나는 자신의 죽은 약혼자에 대한 사랑을 여전히 간직하하고 있었던 것이다.
해나에게 이 영국인 환자를 살리는 것은 무너져버린 자신의 삶을 주춧돌부터 다시 세우는 일이며, 자신을 한 번도 제대로 돌본 적 없는 가난한 시골소녀가 자신 대신 선택한 또 하나의 분신을 온몸을 다해 돌보는 눈물겨운 몸짓이기도 한다. 영국인 환자는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