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블루밍


정여울 작가님의 신작이 나와서 바로 읽어봤다. 이 책은 다시 열일곱살이 된다면 작가님이 직접 발로 뛰어 찾아다니며 듣고 싶은 인문학 강의이자, 내가 그때 그 시절 꼭 읽어야만 했던 그러나 제대로 깊이 읽지 못했던 책들에게 바치는 뒤늦은 연애편지이다. 이 책은 십대들 뿐만 아니라 상상력의 안테나를 잃고 싶지 않은 어른들에게 다정한 셀프테라피 인문학의 길잡이가 되어 준다.

이 책에서는 25개의 작품이 실려 있는데 켄 리우의 ‘종이 동물원’ 을 읽으면서 눈물이 났다. 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해보고 싶다.


켄 리우의 단편 소설 ‘종이 동물원’ 에는 가족에게서 멀어진 뒤 영원히 가족으로는 돌아오지 않기로 작정해 버린 소년이 등장한다.


‘나’는 중국어를 하는 엄마와 영어를 하는 아빠 사이에서 자란다. 어린 시절 엄마는 ‘나’를 향한 무조건적 사랑으로 똘똘 뭉친 천사의 모습 그 자체다. 울고 있는 아들을 위해 신출귀몰한 솜씨로 종이를 접어 호랑이를 만들어 주는 엄마는 아들에게 무적의 마술사와 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아이는 커 가면서 부모님의 비밀을 알게 된다. 그것은 바로 아빠가 엄마를 카탈로그에서 골랐다는 사실이다. 아이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아빠는 엄마를 사랑했다.


엄마의 종이 접기로 마법처럼 태어난 동물들은 거실 구석구석을 뛰어다니며 ‘나’ 의 어린 시절을 빛내 주었다. 하지만 성공한 백인 남자와 영어를 못하는 중구인 여자 사이에서 태어난 ‘나’ 잭은 ‘백인들의 세계’ 에 안착하기 위해서 엄마와 점점 멀어지게 되어 버린다. 이제 고등학생이 된 ‘나’ 는 엄마를 경멸한다. 신부로 팔려 가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상품처럼 카탈로그에 싣다니. 경외감에 차서 엄마를 바라보던 어린 시절의 ‘나’는 사라지고, 이제 ‘카탈로그에 사진을 실어 자신을 상품처럼 판 엄마’를 무시하게 된 잭이 있다.

세월이 흘러 어느덧 잭이 대학 졸업을 앞둘 무렵, 엄마는 말기 암 선고를 받는다. 아파도 아프다고 말하지 못하는 엄마, 아들이 화를 낼까 봐 아들에게도 말을 걸지 못하는 엄마는 마침내 슬픔이 쌓이고 쌓인 채로 죽음의 문턱에 다다른 것이다. 엄마가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잭은 빨리 학교로 돌아가 취업에 신경을 써야겠다는 생각에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지 못한다. 다가오는 자신의 죽음 앞에서도 마음을 열저주지 않는 아들의 본심을 눈치챈 엄마는 어서 학교로 돌아가로 말하면서도 눈에는 슬픔이 가득 들어차 있다. 이 순간이 마지막임을 예감한 것이다. 평소에는 엄마를 생각하지 않아도 좋으니 1년에 딱 하루, 중국인의 명절인 ‘청명절’ 에는 엄마를 생각해 달라고 부탁하는 그녀는 죽는 순간까지도 오직 아들 걱정뿐이다.

피맺히 슬픔을 안은 채 엄마가 돌아가신 뒤에도, 잭은 오랫동안 슬픔에 무감각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청명절에 문득 엄마가 남긴 편지를 읽게 된다.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편지로 들려주는 엄마. 대기근으로 무려 3,000 만 명이 사망했던 그 시절 찢어지게 가난한 농부 집안에서 태어난 엄마는 어린 시절 자신의 엄마가 (잭의 할머니) 몰래 흙을 먹는 모습을 봤을 정도로 비참한 가난 속에 살았다. 딸에게 마지막 남은 밀가루를 먹이고 자신은 몰래 흙을 집어 먹던 어머니. 잭의 할머니는 신출귀몰한 종이접기 공예 솜씨를 딸에게 물려주셨다.

하지만 가난보다 더 무서운 것은 문화대혁명이었다. 1966년 문화대혁명 시절. 오직 홍콩에 남동생이 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인민의 적’ 이자 ‘스파이’ 로 몰린 할머니는 우물에 몸을 던지고, 할아버지마저 살해당한다. 엄마는 겨우 열 살에 고아가 되고 만다. 살길을 찾아 무작정 집을 떠난 그녀는 결국 여자애들을 데려다 홍콩에 내다 파는 사람들에게 납치되고 만다. 열 살에 남의 집 가정부로 끌려간 그녀는 조금이라도 행동이 굼뜨면 매를 맞고, 영어를 배우려고 하다가 들켜도 매를 맞았다. 그렇게 6년 동안 노예처럼 일을 하다가 결혼 중개업자의 눈에 띄어 ‘신붓감을 전시하는 카탈로그’ 에 사진을 올리게 된다. 아시아인 아내를 꿈꾸는 미국 남자들의 신부가 되는 것이 그때는 유일한 희망이었다는 이야기를, 아들에게 유언으로 전하는 엄마의 마음은 얼마나 막막했을까. 하지만 초라하고 고통스러울지언정 결코 부끄럽게 살지는 않았던 엄마는 아들에게 담당하게 이야기한다. 낭만적인 이야기는 아니지만, 이것이 나의 이야기라고.


엄마는 결혼을 하고 잭이 태어나자 잃어버린 그 모든 시간을 되찾은 느낌이었다. 아직 백인의 문화에 노출되지 않았던 시절, 엄마를 말갛게 좋아했던 아들이 처음으로 중국어로 말을 걸어 주었을 때에 대한 기쁨을 이야기한다. 엄마가 접어 준 종이 동물을 보면서 잭이 까르르 웃었을 때. 세상 모든 걱정이 사라진 것 같았다고.


너무 늦었지만 엄마의 사랑을 깨닫는 주인공의 모습은 애달프지만, 내 마음은 아직 어머니가 홀로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아픔’ 을 짋어진 채 세상을 떠난 그 장면에 머물러 있다. 그는 중국인들이 가장 슬퍼한다는 바로 그 아픔, 어버이께 잘해 드리고 싶지만 이제 잘해 드릴 어버이가 세상에 계시지 않는 그 아픔의 당사자가 되었다.


아들은 뒤늦게 엄마를 이해하고, 자신의 잘못을 아주 조금이라도 뉘우치고 새롭게 자기 인생을 시작할 기회가 있지만, 엄마에게는 어떤 기회가 남아 있을까. 엄마는 이미 슬픔과 외로움과 좌절감만을 가득 안고 저세상으로 떠났는데.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올 수 없는데. 다행히도 돌아가신 조상을 그리워하는 청명절이라는 명절과 뒤늦게 도착한 엄마의 편지는 아들에게 화해와 공감의 마지막 기회를 준다.


엄마는 여성의 인권을 얻기 위해 투쟁한 전사도 아니고 엄청난 사회적 성공을 거머쥔 슈퍼맘도 아니지만 나는 이 캐릭터를 사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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