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애덤 스미스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나요?" 생각해보지 않는 질문을 던지는 책을 좋아하는 편이다. 이 책은 얼마 전에 읽은 세계를 이끄는 경제사상 강의의 저자 김민주 선생님께서 추천을 해주셔서 알게 되었다. 경제 학파의 선구자를 보더라도 거의 99.9% 남성이었다. 그러니 오랫동안 경제학은 여성을 배제할 수 밖에 없었다.
1776년, 정치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는 경제학에 대한 현대적인 정의를 내린 문장을 적었다.
"우리가 저녁을 먹을 수 있는 것은 푸줏간 주인, 양조장 주인, 혹은 빵집 주인의 자비심 덕분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그들의 욕구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애덤 스미스는 경제학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절반의 답을 찾은 데 불과하다고 한다. 그가 저녁 식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상인들이 자신의 이익을 추구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의 어머니가 매일 저녁 식사가 식탁에 오를 수 있도록 보살폈기 때문이다.
저자는 애덤 스미스를 혹평하는 것은 아니지만 문제는 애덤 스미스가 자신의 어머니를 망각하면서, 그에게서 시작된 사상의 갈래가 근본적인 무언가를 생략하고 말았다고 한다. 경제학은 지난 몇 세기에 걸쳐 점점 더 중요해졌고, 그에 따라 이 기본적인 실수는 너무도 널리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 결과 수많은 여성이 경제적 불평등과 고용 불안정, 생계 해결의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다.
2008년의 대규모 금융 위기는 이를 초래한 경제 사상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지 않은 채 지나갔고, 모두 그런 위기는 불가피한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은행들은 무너졌지만 사상은 무너지지 않은 것이다. 이 책에서는 경제적 인간이 우리를 얼마나 완벽히 유혹했는지 잘 이해하지 못한 데서도 그런 일이 비롯되었다고 주장했다.
페미니즘 없이는 경제적 인간에 의문을 제기할 수 없고, 경제적 인간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서는 중요한 것을 변화시킬 수 없다. 애덤 스미스 어머니 마거릿 더글라스는 퍼즐에서 빠진 조각이다. 현재에 존재하는 마거릿 더글러스들은 자녀들은 물론, 자신과 배우자의 병든 부모까지 돌보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한 나라의 경제 활동을 측정할 때 나타나지 않는 투명 인간이다.
경제적 인간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 인간 본성의 중요한 부분을 외면하고 거기에서 도피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는지, 그리고 지금 우리가 왜 믿고 따를 세계관 없이 방황하면서 지금처럼 종교처럼 믿어 왔던 것을 잃은 과정에 처하게 되었는지 설명하려고 노력하는 책이다. 주류 경제학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페미니스트적 관점이 얼마나 필수적인지를 사회 전체적으로 확산시켜야 하는 것은 여성들의 임무다.
페미니즘의 관점은 불평등부터 인구 증가, 복지 혜택, 환경, 그리고 노령화 사회가 시작되면서 직면하고 있는 돌봄 인력의 부족에 이르기까지 모든 문제에 깊은 관련이 있다. 페미니즘은 '여성들의 권리' 이상의 훨씬 큰 문제에 관한 것이다.
이 책을 읽으니 페미니즘은 늘 경제학의 문제였다는 생각을 한다. 특별히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지 않고 치우친 견해는 좋아하지 않는데 이 입장을 이해는 할 수 있게 되었다. 여성 독자들과 남성 독자들 모두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