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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란후에즈 여행기 | 협주곡의 영감을 품은 궁전


저희 부부는 연애 시절 자주 산책하던 Aranjuez 궁전과 정원을 다시 찾았습니다. 마드리드 시내 Atocha 역에서 기차로 약 45분, 도착하자마자 느껴지는 공기는 도시와는 전혀 다른 차분함이었습니다. 궁전 앞에 펼쳐진 정원과 강, 그리고 가을빛이 물든 풍경이 과거의 기억을 단숨에 불러오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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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전의 문을 열고 들어서면 제일 먼저 만나는 건 왕가가 선택한 이유입니다. 아란후에즈는 타호와 하라마 강이 만나는 비옥한 땅 위에 자리 잡고 있어, 사냥과 휴식, 정원 산책에 더없이 좋은 곳이었죠. 펠리페 2세는 이곳에 새로운 궁전을 짓도록 명했고, 이후 보르본 왕조가 들어서면서 점차 지금의 규모로 확장됩니다. 사바티니와 보나비아 같은 건축가들이 손길을 더해, 마드리드 왕궁과 맞먹는 위용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Aranjuez 궁전은 단순한 왕가의 별궁이 아니라, 수 세기에 걸쳐 스페인의 역사와 미학이 겹겹이 쌓인 장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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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펠리페 2세가 아버지 카를로스 황제가 남긴 계획을 이어받아 새로운 궁전을 짓기 시작합니다. 건축가 후안 바우티스타 데 톨레도와 후안 데 에레라가 설계를 맡았고, 이후 여러 세대에 걸쳐 조금씩 확장과 개조가 이루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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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리페 5세 때는 다시 공사가 이어졌고, 화재로 불탄 뒤에는 페르난도 6세가 건축가 보나비아에게 복구를 맡겼습니다. 보나비아는 단순히 원형을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궁전의 상징적 중심부에 아치와 테라스를 더해 오늘날 우리가 보는 장엄한 파사드를 완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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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스 3세 시대에는 건축가 사바티니가 궁전 서쪽에 거대한 날개동을 덧붙여 지금의 Plaza de Armas를 형성했고, 내부의 수많은 방들은 각 시대의 왕과 왕비의 취향을 반영하며 화려하게 변신했습니다. 여왕의 방은 음악실로, 작은 응접실은 중국풍 장식으로, 그리고 가장 유명한 Porcelana 방은 마치 살아 있는 정원처럼 벽과 천장 전체가 도자기로 꾸며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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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전의 외관은 하얀 석재와 붉은 벽돌이 교차하며 단정하고도 화려한 인상을 줍니다. 중앙에는 페르난도 6세의 문장이 새겨진 프런트와, 펠리페 2세·펠리페 5세·페르난도 6세의 조각상이 서 있습니다. 동쪽 발코니에 서면, 정갈하게 다듬어진 Parterre 정원과 흐르는 타호 강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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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을 몇 개 둘러보다 보면, 각 공간이 단순히 장식된 장소가 아니라 이야기의 무대라는 걸 알게 됩니다.


**살레타 데 라 레이나(여왕의 작은 응접실)**에는 루카 조르다노의 회화들이 걸려 있습니다. 평화와 신화적 이야기를 담은 그림들, 그리고 플랑드르와 나폴리 풍경화들이 벽을 채우고 있죠. 가구는 페르난도 7세 시기의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단정하면서도 기품이 느껴집니다.


**안테오라토리오(작은 예배실 전실)**는 이사벨 2세 시기의 개조를 거쳤습니다. 여기서는 17세기 회화와 플랑드르 화가들의 <세계의 불가사의> 연작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 시절 상상하던 “세계의 경이”가 어떤 모습이었을까 하는 흥미로운 상상을 불러일으키죠.


**살론 델 트로노(왕좌의 방)**는 이사벨 2세가 권위 있는 공식 행사를 위해 새로 만든 공간입니다. 벨벳 커튼과 네오바로크 가구로 꾸며진 이 방은, 벽화 속에서 평화와 번영을 노래하는 동시에, 왕좌 위에는 “정의”를 의인화한 여왕이 자리합니다. 권력의 상징이자 이상을 담은 무대인 셈이죠.


**카마라 델 레이(왕의 방)**에는 루카 조르다노의 종교화가 걸려 있습니다. 성전 건축과 압살롬의 죽음을 다룬 대형 그림들이 압도적이죠. 가구는 여왕의 방과 유사한 양식으로, 프랑스제 시계들이 테이블 위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안테카마라 델 레이(왕의 전실)**는 프로토콜상 왕의 방으로 들어가기 전 대기해야 하는 공간입니다. 작은 제단과 성모자 그림이 있어 일종의 신성한 문턱 역할을 했습니다. 장식은 ‘모로인의 탄식’ 같은 역사화와, 네오클래식 화가 멩스가 그린 초상화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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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아란후에즈 궁전은 단순히 웅장한 외관을 넘어, 왕과 왕비의 정치적 권위, 사적인 취향, 신앙심까지 공간마다 담아낸 살아 있는 기록물입니다. 마드리드 왕궁처럼 커튼, 그림, 시계, 소품 하나까지도 잘 보존되어 있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마치 과거의 생활 속으로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그리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면, 정원 너머로 타호 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고요한 물결 위에서 낚싯대를 드리운 사람들의 모습은 화려한 궁전과는 또 다른 평화를 전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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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팁 하나. 방문을 마치고 나오는 길, 1903년부터 운영해온 전통 레스토랑 Rana Verde에 들러 보세요. 여기서 맛보는 **Fresón con nata (딸기와 생크림 디저트)**는 달콤한 후식이자, 아란후에즈의 오후를 완성하는 작은 기쁨이 될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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