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티코트

by 한유당

내 자리는 무대 뒤편의 어둠 속이다. 무대 위의 시간과 객석의 시간, 무대 뒤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느긋한 객석과 달리 무대 뒤의 시간은 초조하고 긴박하다. 아직 나는 객석에 앉아 여유롭게 무대를 바라볼 자신이 없다.


화려한 조명과 환호와 박수갈채가 있는 무대 위는 아이의 자리다. 무대로 이어지는 작은 문이 열리고 아이는 환한 조명 아래로 박수를 받으며 걸어 들어간다. 드레스 앞섶을 뒤덮은 작은 큐빅들이 빛을 받아 별처럼 반짝거린다. 문틈으로 보이는 건 아이의 옆모습뿐이지만, 지금 아이의 표정이 어떨지 보지 않아도 알 것 같다. 벅찬 기대와 떨림과 자신감이 섞인 표정으로 환하게 웃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선 무대와 바라보는 객석의 간격을 당겼다 밀었다 하면서 아이는 그 순간을 충분히 즐기고 있다. 물론 아이는 알고 있다. 무대 뒤에서 엄마가 있다는 걸.


무대에 서면 아이는 달라진다. 떨거나 불안해하지 않는다. 숨을 조여 오는 압박감과 공포로부터 자유로워진다. 갇힌 공간에 대한 불안증과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불편함이 숨을 조여 오는 공포가 되어 수시로 나타나는 호흡곤란과 공황발작으로 학교생활과 일상생활이 힘들다. 그런 아이를 지켜보고 지켜주는 일이 나도 힘에 부쳤다. 숨 막히는 공포의 근원도 고통의 깊이도 나는 알지 못했지만 엄마이기에 무엇이든 해야 했고, 어디든 달려가야 했다.


아픔과 절망과 실수와 시행착오 끝에 알아낸 가장 좋은 방법은 기다림이었다. 아이에게는 묵묵하게 기다려주는 여유와, 늘 가까이에서 지켜주는 따뜻한 눈길이 필요했다. 조급함과 불안, 절망, 무대 뒤에 깔린 어둠처럼 나를 덮어버린 것들에 담담히 맞섰다. 실은 너무 두려웠지만 아이 앞에서 강한 척 했다.


불 꺼진 무대 뒤편의 어수선한 어둠 속에서 나는 늘 떨리고 가슴 졸이는데 비해 아이는 무대로 걸어 나가는 순간부터는 눈빛이 달라지고 자세는 당당해졌다. 어릴 때부터 말하는 것보다 노래하는 걸 좋아했고, 책 읽는 건 힘들어 해도 악보는 금방 외우던 아이였다. 공부는 언제나 끝에서 맴돌았지만 동요대회나 콩쿨에서는 늘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가장 잘하는 게 노래였고 좋아하는 게 노래였다. 무대 위에서 노래 할 때가 가장 행복하고 자신이 넘치는 아이였다.


아이가 성악을 택한 건 드레스 때문이었다. 디즈니 만화영화 공주들이 입는, 반짝이고 풍성한 드레스를 입은 소프라노를 보면서, 노래를 하면 저런 옷을 입을 수 있냐고 물어보던 아이는 꿈꾸던 대로 그런 드레스를 입었다. 디즈니 공주같이 드레스를 차려입고 머리에 반짝이는 장식을 얹고 마법처럼 무대에 서서 노래 할 수 있게 되었다.

빌려 온 드레스 가방을 열었다. 가을 하늘처럼 짙푸른 파란 바탕에 가슴에서 배로 이어지는 앞판에는 별을 뿌린 듯 반짝거리는 큐빅이 다닥다닥 붙어있고 허리를 잘록하게 보이도록 등판을 코르셋처럼 조이게 되어 있다. 치마폭은 풍성해서 걸을 때 마다 물결처럼 출렁거렸다. 드레스를 옷걸이에 걸려고 꺼내는데 가방 밑에 둘둘 말린 속치마가 딸려 나왔다. 뻣뻣한 망사천을 여러 번 덧대 박고 허리에는 넓은 고무 밴드가 붙어있고 벨로크테이프를 길게 붙여서 체형에 맞게 고정 시킬 수 있게 되어있다. 엉덩이 아래 부분부터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굵은 철사가 끼워져 있다. 치마가 맵시있게 잘 퍼지도록 철사의 지름은 아래로 갈수록 점점 넓어지고 무거워진다.


패티코트. 치마폭이 넓은 드레스나 한복 치마를 입을 때 속에 받쳐 입어 겉옷의 맵시를 살려주기 위해 입는 속옷이다. 풍성한 주름은 최대한 살려주고 치마의 모양을 흐트러지지 않게 잡아주려면 패티코트를 만드는 원단은 가볍되 힘이 있어야한다.


리허설을 마치고 아이가 대기실로 들어왔다. 드레스로 갈아입고 순서를 기다려야한다. 패티코트를 둥글게 펼쳐 벌려 놓고 그 위로 드레스를 씌운 후 에 그 안으로 다리를 집어넣는다. 패티코트를 먼저 끌어올려 허리에 맞게 벨로크를 단단히 고정시킨 후에 드레스를 위로 끌어올려 입어야한다. 걸을 때는 드레스를 양손으로 살짝 잡고 들어주어야 하는데 그때 패티코트도 같이 잡아 주어야 걸려 넘어지거나 속치마가 보이거나 하는 일이 없다.


이름이 불리고 무대로 향하는 문이 열리자 양손으로 드레스 자락을 잡고 사뿐사뿐 걸어 나간다. 무대의 중앙에 서서는 드레스 자락을 펼치고 가지런히 정리한 후에 가슴 위에다 한 손을 얹고 관객석을 향해 고개 숙여 인사를 한다. 박수소리가 잦아들자 피아노 반주자를 향해 신호를 보내고 무대 위로 전주가 흐른다.


내 자리는 무대 뒤편 어둠 속이다. 패티코트가 드레스 자락 안에 숨어 부푼 치마폭을 받치고 있듯, 나는 의자도 없는 무대 뒤편에 서서 초조하게 귀를 기울인다. 어두운 무대 뒤편은 조용하지만 분주한 움직임으로 긴박하다. 다음 순서를 기다리는 출연자들의 초조함과 음향과 조명을 다루는 스텝들의 민첩한 움직임, 어지러운 전선들과 조명 기기의 열기 사이에서 내가 하는 일은 다만, 기다리는 것이다.


아이에게 무대는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하는 곳이고, 아이가 꾸는 꿈이고, 걸어 올라가야하는 가파른 계단이다. 다른 아이들보다 말도 글도 늦고, 세상을 향해 나가는 것이 두려워 엄마의 치마폭 뒤로 숨어들던 아이였다. 자꾸만 숨어들어 자신만의 공간에 갇힌 아이를 세상 가운데 세우는 일이, 그것도 수백 명의 관중을 향해 서서 노래하는 무대 위에 세우는 일이 아이도 나도 죽을 만큼 힘이 들었다.


아이가 스스로 서서 자신이 얼마나 반짝이는지를 알게 하는 일이 아이의 뒤에서 묵묵히 기다려 주는 일이었다. 디즈니 만화속의 공주처럼 예쁘게 서서 라보엠의 아리아를 부른다. 무대의 한가운데 홀로 서서 노래하고 있는 아이는 별처럼 환하고 반짝거린다. 머지않아 세상이라는 무대도 당당하게 걸어 들어가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몸과 마음이 건강한 어른으로 자라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노래가 끝났다. 박수갈채를 받으며 무대를 빠져나오는 아이의 환한 얼굴보다 먼저 발끝 아래 하얀 패티코트 자락을 살핀다. 혹시 밟아 넘어지지 않을까 하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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