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풍성하게 만들고 싶다면, 취향을 노력해야 한다
최근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남자 친구를 만나서, 밥 먹고 카페 가는 게…언젠가부터.. 사육당하는 느낌이라고 해야할까요?"
이 말을 듣고 조금 웃겼지만, 동시에 가슴 깊이 울리는 뭔가가 있었다.
회사 근처 밥집, 늘 가던 카페, 주말엔 영화 한 편,
그마저도 새로운 시도보다는 이미 검증된 범위 내에서의 선택.
이 모든 흐름을 조금만 삐져나가 보면 불안하고 피곤하다.
그렇게 하는 것은
"안전한 선택"
역시 이야기도 안전해진다.
“어제 뭐 했어?”
“뭐 먹었어?”
“상사가 뭐래?”
이 대화가 나쁘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반복되는 질문에 반복되는 답변만 오가는 관계는 결국 ‘감각’의 메마름으로 귀결된다.
느슨한 대화, 뭉개진 시선,
'좋아하는 사람을 만난다'는 어른 거린다는 환상에 기댄 만남.
그것이 나쁜 건 아니다.
하지만 콩깍지는 언젠가 벗겨진다.
대화 주제는 점점 줄어든다.
재미는 떨어진다.
콘텐츠는 사라진다.
그러므로 남는 것은 서로 유튜브만 보는 상황이다.
만남 자체는 유지하되, 소속감은 놓치고 싶지는 않되,
그러나 외롭지는 않고 싶으니
앞에 사람을 두고 유튜브를 본다.
다시 남는 것은 자신의 알고리즘 속 세계다.
최근에 읽은 『취향은 어떻게 계급이 되는가』라는 책에서는
소득 수준이 취향 형성에 영향을 미친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조금 다른 관점을 갖고 있다.
물론 경제력은 무시할 수 없는 배경이다.
하지만 경제력이 곧 ‘취향의 깊이’나 ‘감각의 다양성’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돈이 많다고 해서 영화에 대한 감상이 더 풍부한 것도 아니고,
비싼 레스토랑을 다닌다고 해서 삶의 이야기 구조가 더 넓어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나는 밥값을 아껴가며 시집을 사는 사람과
훨씬 풍성한 대화를 나눈 기억이 있다.
우리는 커피를 들고 공원 벤치에 앉아,
최근 본 독립영화, 시인의 문장,
요즘 왜 사람들이 자기계발에 몰입하는가에 대해 얘기했다.
돈은 많지 않았지만, 대화는 풍요로웠고, 감각은 살아 있었다.
결국 감각을 노력한 이들이 나중에 가정을 꾸민다면 어떨까.
나는 그들의 식탁이 유튜브가 켜진 침묵의 공간이 되지 않으리라 믿는다.
아이와도 이야기를 나누고, 시시한 것에서 함께 웃으며,
삶의 의미에 대해 작은 언어들로 나누는 가정.
그게 얼마나 깊은가.
물론 현실은 녹록지 않다.
퇴근 후엔 지치고, 새로운 취향을 만들 여유도 체력도 부족하다.
하지만 삶을 풍요롭게 만들고 싶거든
이런 건 어떨까.
조금씩, 아주 작게라도 괜찮으니 취향을 노력해 보는 것.
감각이 높은 사람은 안다.
당신이 밥을 포기하고 시를 읽었다는 사실을.
당신이 이 도시의 흐름에서 살짝 벗어나,
조금 다른 결을 가진 삶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을.
그건 결국 경제의 초월이고, 계급을 넘나드는 연결이다.
너무 낭만적인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믿는다.
커피 하나 시켜 놓고 공원에 앉아,
영화와 시와 요즘의 삶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그 시간이
우리 인생을 더 빛나게 만든다는 것을.
그래서 제안하고 싶다.
삶을 좀 더 풍요롭게 만들고 싶다면,
사랑도 관계도 진하게 하고 싶다면,
더 좋은 대화와 감각을 원한다면—
‘취향’을 조금씩, 노력해 보는 건 어떨까.
얕고 빠른 도파민 대신,
깊고 긴 감각의 여운을 택하는 것.
그 여운이 당신의 삶을 조금씩, 다채롭게 물들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