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왜 환대와 사랑이 멸종됐을까. 사랑은 왜 씨가 말라가는 느낌일까. 내 친구들로부터 비슷비슷하게 나오는 이야기가 있다. 80년대, 90년대만 해도 우린 이웃끼리 허물이 없었다는 이야기. 그런데 어느새 그 온정은 사라지고 지금은 한국사회의 냉소만 남았다는 이야기. 자기는 어렸을 적, 열쇠가 없어 집에 들어가지 못하면 옆 집에 가서 카레를 얻어먹고, 아주머니랑 놀다가 엄마가 오면 같이 밤에 들어갔다는, 공감은 되지만 전설이 되어버린 이야기. 한 친구 한 친구 붙잡고 이야기하면 그 시절을 추억하지 않는 사람이 없는데, 아침 8시 반 강남역 한복판에만 서면 그 호의와 환대가 20년 전까지 존재했다는 이야기가 믿기지가 않을 정도의 푸석한 얼굴이 횡단보도를 기다리고 있다. 남은 고사하고 자기에게도 돌릴 호의나 다정히 사라진 그런 표정으로.
내가 놀랐던 건 이 감성을 어느 유럽인 친구도 느꼈다는 점이다. 그녀는 한국의 지방에 대한 논문을 쓰기 위해 한국의 많은 도시들을 돌아다녔는데, 그녀가 느낀 느낌은 이러했다. 대도시들은 차가운데, 작은 도시들 사이의 어르신들의 온정과 인간다움이 남아있다고. 사람만 보면 반겨주시고, 사랑해 주신다고. 아니, 시대와 국경을 넘어 감지되는 이 감각. 환대와 다정에 대한 감각은 존재하나, 어떤 아티스트의 이야기처럼 사랑이 멸종위기에 놓인 이 시대에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이런 고민들이 내 마음속엔 늘 부유하고 있었다. 나는 평생 사랑을 하면서 살고 싶은 사람이라.
한편 아침에 눈을 뜨고 인스타그램을 키니 이런 내용의 릴스가 나온다. ‘나의 사생활을 말하지 말라. 사람을 만나면 약점을 노출시키지 말라. 기쁨만 나누고, 너의 이야기를 감춰라-‘ 등의 이야기다. 릴스를 또 넘기니 이번에는 어떤 동기부여 연설가가 ‘고민 그만하고 제발 해! 너의 걱정은 쓸모없어-‘라는 메시지를 격양된 표정으로 전달하고 있었다. 그렇게 또 한참 릴스를 넘기니 마지막으로 ‘그럼에도 잘될 거예요- 당신이에요-’라고 하는 위로의 말이 스크롤에 걸린다. 평소에는 그러려니 하고 일어났을 텐데 그날만큼은 이 세 가지 메시지가 뭔가 이상했다. 네가 너를 스스로 챙겨야 해- 약점을 하지 말라는 메시지와, 생각 그만하고 아무튼 움직여라-라는 메시지와, 소진된 누군가에게 보내는 아무튼 잘될 거라는… 서로 다른 방향 그러니까 보존, 확장, 위로라는 세 가지 방향이 몇 초 간격으로 오갔다. 이 세 가지를 한 자아가 하기란 쉽지 않을 텐데, 세 방향을 한 자아가 소화하려면 분열이 올 것 같다며 순간 조금 기괴해졌다. 물론 이렇게 하면 말이 될 수 있다. 아침에 일어난 A 씨가 직장에 가서 오롯이 혼자 약점도 노출하지 않은 채로, 긴장된 상태로 무조건 앞으로 달려가다가, 모든 에너지를 소진해서 긍정확언을 던지는 그런 모습. 그런데도 뭔가 이상한 부분이 있었다. 메시지 속에 “타인” 이 없다는 것. 너의 보존, 너의 노력, 너의 위로 속에는 개인만 있을 뿐 타인은 없었다. 한편, 그전 날 이런 대화가 있었다.
C 씨는 자신이 미국에서 10년을 살다 왔다고 소개했다. 중학교 때까지 한국에 살다가 고등학교 때 미국에 간 C 씨는 10년간 미국에 있다가 한국에 들어왔다고 했다. 이와 다르게 나와 동행했던 S 씨는 2-3살쯤 미국에 가족과 함께 가서 대학까지 미국에서 졸업한, 심지어 미국 여권까지 있는 소위 ‘미국인 친구’라고 봐도 무방했다. 어려운 단어나 심도 있는 대화는 불가능하나 한국어로 의사소통을 하는 한 편, 신발을 신고 침대에 올라가면 질색팔색을 하는 친구.
셋의 대화는 어쩌다 보니 한국에 대한 아쉬움으로 흘러갔다. 그리고 아쉬움이 점점 커질 무렵, 나는 궁금했다. 계속 한국에 산 나와 다르게, 이들이 정말 딱 하나만 바꾼다면 바꾸고 싶은 게 뭘까.
“지금부터 딱 말하면, 한국의 하나만 바꿀 수 있어. 그러면 뭘 바꿀래?” 그리고 돌아온 대답은 이거였다. “낯선 사람에게 친절했으면 좋겠어. 좀 더 주변 사람들에게 말 걸고, 웃어주고, 인사했으면 좋겠어.”
이 대답을 듣자 나는 미국 여행의 감각이 살아났다. 미국 여행 당시 내가 느꼈던 어떤 묘함을 꽤 오랜 시간 미국에서 지낸 두 사람도 느꼈던 것 같다. 스몰톡의 여부부터, ‘너의 생각은 어때?’ 혹은 ‘너의 감정은 어때?’라는 질문, 낯선 사람이 오면 판단하고 훑는 어떤 압박감. 이런 부분들에서 그들은 자유로워지고 싶어 했다. 물론 이를 느끼는 건 나만 그런 건 아니었다.
미국 여행에서 만난 한인들도, 한국에서 오래 산 해외 유튜버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여행 중 만난 한인은 “여기는 진짜 뭘 해도, 어떤 걸 해도 신경을 쓰지 않아요. 제가 한국에선 못 느꼈는데, 여기 와선 해방감이 들어요. 편의점에 갈 때도 옷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기분이에요”라고 나에게 툭 터놓고 말했다. 내가 본 유튜버는 이런 답답함을 호소했다. ‘네가 한국에 산다면 상대방을 판단하는 시선, 무리 지어 다니는 관습, 차가움 등을 어느 정도 견뎌야 한다’고.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난 건 다름 아닌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된 공동체”라는 책이었다.
저자는 ‘강점을 겪은 국가에서는 독재자가 나타나고, 독재자는 강제 점령했던 모델을 빌려 독재를 진행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거기서 멈추지 않고 ‘민주화가 일어나고 주권을 되찾으며,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넘어간다’고 주장했다. 나는 이 문제가 단순히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넘어가며 겪는 문제라고 생각했다. 나 나름대로 결론지은건 ‘독재에 의해 서열화와 판단이 강해졌다. 독재는 결국 가장 우두머리부터 가장 낮은 등급까지 서열을 나누기 때문에 힘과 어느 편인지가 가장 중요하니까-’라는 결론이었다. 베데딕트 앤더슨의 상상된 공동체에 나온 주장을 나름대로 한국으로 해석하면 말이다.
그런데 뉴욕을 걸어 다니며 느낀 내 느낌은 좀 달랐다. 내 느낌은 여기서 출발한다. ‘어? 그러면 왜 똑같이 강점과 독재를 겪었는데도, 한국처럼 서열화나 집단주의가 강하지 않은 나라는 왜 그럴까?’ 뉴욕에서 이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된 계기는 다음과 같다. “상상된 공동체”에는 다루지 못한 주제들이 미국엔 있었다. 한 단어로 말하면 정체성 혼란(identity crisis)였다.
뉴욕에서는 “나는 사실 동성애자였는데, 양성애 인척 했어.” “나는 사실 흑인으로 태어났는데, 백인처럼 행동했어” 등등의 이슈 크게, 작게 미술관에서 논의되고 있었다. 마치 검은 피부를 가지고 있었으나 평생 하얀 가면을 쓰다 어느 순간, ‘아 나는 하얀 가면을 썼구나.’라고 인지하며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 사람처럼, 그들은 젠더, 인종, 문화적으로 혼란을 겪고, 저항하고, 또 서로 환대하고 있었다. 그 혼란들을 통과하며 직관적으로 든 사실이 있다. 나는 종교적인 정체성 혼란을 겪고 있지 않을까? 동양의 습관이나 관습이나 감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서양의 이론대로 살아서 나도, 주변 사람들도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는 건 아닐까? 이 질문을 풀기 위해선 철학 책모임을 하던 시절로 돌아가야 한다.
한창 책모임을 이끌던 시절, 나에게 이상했던 포인트가 있다. 철학은 철학자의 생각을 정답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데, 자꾸 학습자나 친구들 곧, 도반(道伴)들이 철학자들의 말을 정답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이었다. 충분히 경청한 뒤 ‘저는 이런 부분은 이렇게 적용하면 또 새롭네요’라던가, ‘저는 좀… 다르게 생각해요’라고 말해도 되는데, 마치 군대의 대장들의 말을 따르는 사람들처럼 철학자의 말을 반복하거나 공감되는 부분만을 찾았다.
이 행동이 흥미나 호기심이 아니라 약간의 냉소가 깔려있던 건 사실 내 안에도 그런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도 처음 철학을 배울 때, 신의 말씀, 선생의 말씀인 것처럼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존중은 하되 진리처럼 받진 않아야 했으나, 진리처럼 받아들인 내 과거의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이 객관화를 통해 보이는 게 있었다. 서구의 생각을 동양의 방식으로 받아들이며 문제가 생긴 건 아니었을까. 환대의 철학자가 무조건 정답이니 환대해야 하고, 해체의 철학자가 무조건 정답이니 해체해야 한다며 받아들이니 뭔가 문제가 생기지 않았을까.
몸의 감각과 다르게 생각은 다른 쪽으로 뻗치면 우리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특히 주변도 비슷한 감각을 가지고 있다면 더더욱 말이다. 나는 사람이 도와 그냥 도와주고 있는데, ‘너를 지키며 도와’라는 이야기를 한다던가- 나는 책 읽기와 무용한 것과 자연이 좋은데 자꾸 ‘돈을 버세요. 안 그러면 당신은 패배자입니다’라는 이야기를 할 때 스스로 겪는 혼란이 작은 예시 같다. 뭔가 정답 같은데, 나에게 적용할 땐 이상한 그 느낌, 어떤 편도 들어줘야 할지 모르겠는 이 느낌. 몇 살 때 결혼해야 하고,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주변에선 하는데, 나는 그냥 살고 싶은데 불가능한 그 느낌. 이 느낌이 작은 정체성의 혼란 같다. 곧, 서양철학을 배우며 내가 겪었던 혼란은 이것이었다. 상대의 ‘의견’에 집중해. 상대의 ‘맥락’에 집중해. 상대의 ‘주장’에 집중해-라고 하는 서양철학과 다르게, 난 상대의 억눌림, 답답함, 표정등이 눈에 항상 들어왔다. 서양인에게 매우 답답한 표정으로 “말을 참… 잘 알아들으시네요”라고 했을 때 서양인이 “오 고마워요”라고 받아들였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처럼, 서양은 좀 더 정보나 언어에 초점이 있었다. 하지만 나에게 들어오는 건 늘 그런 답답함과 표정이었다. 그런데 나는 어느샌가 정체성 혼란을 나름대로 정립하고 있었다. 서양 철학을 내 몸에 맞게 소화하고 있던 것이었다. 내 ‘몸’에 맞게.
나의 큰 정체성 중 하나는 무속성이었다. 그러니까 그 무속신앙할 때, 무당 할 때 그 무속성이었다. 물론 사이비 같은 이야기는 하지 않을 것이니까 안심하시라. 조금 낯설다면 남들보다 사람의 기운이나 싸함을 더 잘 느끼고, 그 사람이 어떤 느낌인지 더 잘 느끼는 사람 쪽에 속한다. 그런데 서양문화나 서양적인 환경이 당연해진 지금, 그러니까 ‘개인’을 챙기고 ‘나’를 챙기고, 돈을 모아야 하는 게 당연하고 그 편리함을 주는 지금, 나는 사람의 답답함과 억울함에 대해 반응하는 새로운 방식이 필요했던 것 같다. 어떻게 하면 ‘나’와 ‘개인’이 룰인 상황, 서구의 자본주의의 논리, 발전의 논리가 우리에게 당연해진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 내 이야기를 전달하고 타인의 마음을 달래줄까-라는 그 마음이 서양철학에 맞닿았던 것 같다.
이전에는 사람의 답답함을 푸는 퍼포먼스적인 굿이나 노래들을 했겠지만, 지금은 그 방식만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었다. 그리고 마냥 생각 없이 나누기엔 그 사람들의 욕망이나 답답함에 돈 문제, 자아의 문제, 억눌림의 문제가 있었다. 그렇게 하면 나도 상대도 다칠 거라는 걸 알고는 서양문화를 기반으로 논의한 철학을 나의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는 듯 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정신분석이란 단어에, 환대라는 키워드에, 욕망이란 말에, 연결, 해체, 경계등의 주제에 끌렸다.
나는 내 안의 환대와 사랑을, 정확히는 상대방의 답답함이나 억눌림에 반응하는 내 무속적인 속성을 유지하고 싶었다. 이건 내 정체성이었고, 주체성이었다. 반대로 이걸 끊어내고 미디어와 콘텐츠가 말하는 “너를 챙겨”, “너만 챙겨”라는 말에 홀려 “이제부터 독하게 살 거야.”라고 마음먹는 순간, 내 안에 독기가 차올라 뭔가 이상한 곳으로 흘러간다는 느낌이 들었었다. 그래서 나는 공부했고, 고민했고, 적응하는 방식을 찾아 나선 것 같다.
여전히 자살률은 높고, 사회는 더 냉담해지고 있다. 아쉽게도 신내림을 받을 정도로 신기가 높은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절망과 우울을 남들보다 더 잘 느끼고 있음에 남들보다 더 슬픔과 답답함을 느낀다. 더 서양철학적으로 분석해 보자면, 결국 혼자 이겨내야 한다는 메시지 속에서 개인은 ‘더 잘해야 한다’라는 압박을 받고 있으면서도, 집단으로 뭉치는 이들은 더 열심히 뭉치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다. 그리고 결국 소외된 개인은 집단을 이기기 위해 스스로를 갉아 어떻게든 더 열을 내고, 집단은 더 뭉치는 제로썸 게임을 진행하는 것 같다는 것이 내 주관적인 판단이다. 하지만 개인주의는 점점 강해지기 때문에 집단으로 뭉치는 힘은 서로를 꺾어뜨리는 것 같다. 결국 이 삐그덕거림이 나는 결정사의 매출 증대와 소모적 연애 그리고 높아지는 이혼율이라는 신기한 결과물로 나타나는 것 같고.
이러한 사회의 변화 속에서 지난 10년(혹은 내 삶은) 내 종교적 정체성 혼란을 통합하는 과정이라고 해도 무방했던 것 같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종교에 대한 정체성 혼란을 통합하며 환대와 사랑이 사라져 나가는 이 문제를 다루고 빠져나가고 싶다. 왜 우리는 서로에게 환대하지 못하는가. 왜 사랑이 사라지는가. 낯선 사람에게 친절하는 마음은 왜 사라지는가.
사회의 냉담과 삐그덕거림, 개인의 착취와 서로의 단절, 곧 우리는 도대체 어디로 갈까-라는 절망에서 나의 사담으로 희망을 건져내 본다. 부디 내 중구난방 한 이야기 속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잘 건져내주셨으면 한다. 너무 학술적으로 가고 싶지도, 그렇다고 너무 가벼운 이야기로만 가고 싶지도 않아 내 일상과 분석을 엮었다. 특히 동양적 감수성과 서양적인 분석을 섞다 보니 평소 읽던 구조나 방식과 다를 수 있다. 저자의 테크닉의 한계이니 양해를 부탁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