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달리 ‘나만 이상한가?’를 묻는 사람들이 있다. 이 사람은 저마다의 문화 속에서 치고받고 방황한다. 상사와의 식사자리에서 모두 끄덕이고 있는 모습에, 자기의 ‘자아’를 만들고, 글을 쓰고, 남을 챙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주변을 돌아보니 모두 한 방향을 보고 달리는 것 같은 모습에 이 사람들은 나만 이상한가? 싶어 물으며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닌다. 결국 이들은 자신과 싸우고 타인과 싸우며, 내가 이상한지 세상이 이상한지 묻는다. 그러다 어느 때쯤 되면 타협한다. 아- 다 같이 사는 사회니까 적응해야지-하면서.
그러나 이승과 저승을 떠도는 유령처럼 정체성의 이곳저곳을 떠도는 사람들이 있다. 여기가 나의 집인가 싶다가도, 다시금 몸의 다른 센서가 반응해 저곳으로 가는 삶. 그렇게 편안한 친구, 편안한 공간을 만나 다시 봉합이 된 듯 편안함을 느끼다가도 다시 내 정체성이 어디인지 고민하는 삶. 어렵게 사는 사람들 중에서도 나는 특히 이런 사람에게 더 마음이 간다. 이게 아무리 봐도 생명을 존중하는 삶 같은데 뭔가 이상해. 이게 다 같이 잘 사는 삶 같은데 뭔가 이상해. 나는 올바른 말을 했는데 내가 이상한가? 싶은 것을 느끼는 사람들이다. 사실 이건 다른 사람의 이야기기도 했지만 나의 이야기기도 했다.
나의 이상함, 나의 반론들, 나의 따뜻함이 가는 곳들, 내 마음이나 생각이 무조건 올바르진 않지만 거꾸로 보고 삐뚤게 보고 이상하게 나를 살펴보다 보니 나는 한국의 유교(집단주의), 서양문화(서양철학) 그리고 무속신앙 사이에서 끝내 아직도, 무려 아직도 ‘나는 누구인가?’를 대답하지 못하고 있었다. 차라리 상사의 말을 잘 듣거나 집단의 명령에 맞춰 몇 살까지 돈을 열심히 벌어, 몇 살까지 가장이 되어 아이를 몇 명 낳고, 육각형의 남자가 되지 못해 스트레스를 받는 유교보이가 되던가, 아니면 차라리 얄팍한 신기로 신내림을 받아 돈을 왕창까진 아니더라도 무속인의 삶을 살든, 그것도 아니면 ‘개인’을 챙기고 나의 이기심을 끝까지 밀어붙여 돈을 모으는 삶을 살든(서양문화나 철학이 이렇다는 건 아니다) 그것도 아니면 배고픈 소크라테스 흉내를 내며 철학자가 되든, 하나를 선택해 쭉 밀고 나가야 했다. 그러나 집단주의에 속하기엔 사람들의 고통이 보이고, 서양철학을 하기엔 내 편이 없는 거 같아 두렵고, 신내림을 받아 억울한 사람들의 한을 풀어주기엔 감수성이나 신기가 그만큼 없었으며, 약간의 똑똑함도 있었으니 나는 혼란스러웠다.
그렇게 이곳저곳을 구천처럼 떠돌아다니던 나는 우연찮게, 아니 어쩌면 계시처럼 뉴욕에 다녀왔다. 그리고 거기서 본 것. 그건 바로 정체성 혼란이라는 단어였다. 정체성 혼란. 영어로는 identity crisis. 정확히 이 표현을 쓰는진 모르겠지만 이 표현을 들은 맥락은 이런 흐름에서였다. 온두라스에서 초, 중, 고를 다닌 D 씨는 2살쯔음 부모님과 함께 이민을 간 C 씨에게 이렇게 물어봤다. “너는 정체성 혼란 안 왔어?”
이 대화 자리에는 두 사람, 그러니까 나를 포함하면 세 사람이 함께 했다. 물론 장소가 뉴욕은 아니었지만, C의 말로는 “미국을 좀 잘 구현한 바”같은 곳의 이국적 분위기에서 얼그레이 케이크와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한 명은 한국에서 정석적으로 자라, 인천에서 투박한 교육을 받고는, 철학을 배웠다고 개인주의의 장점을 맛봐 한국이 조금은 답답한 토종 한국인. 한 명은 어렸을 때 온두라스로 이민… 까진 아니고 애매하게 정규 교육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온두라스와 한국 여권 두 개를 모두 가진 명예 온두인. 한 명은 3살 때 이민을 가서 워싱턴 D.C에서 나고 자랐다고 해도 무방한, 미국 여권을 가진 미국인. 이 셋이 모여 한 이야기는 다름 아닌 주몽, 김두한, 동방신기 이야기였다.
그러던 중 온두인, 미국인, 한국인이 모여 주몽 이야기를 하는 게 웃기다며 박장대소를 터뜨렸는데, 그렇지만 신기하게 정체성 혼란이 오지 안 듯한 미국인을 보며 나는 이렇게 (어쩌면 인종차별적일 수 있지만) 말을 건넸다.
“근데 가정에서 한국어로 소통하고, 부모님 한국분들이면 교육받을 때 정체성 혼란이 오지 않았어요? 약간 저는 서양철학 배우면서 ‘집단’ 중심 사고에서 ‘나’ 중심 사고로 바뀌면서 조금 어려운 부분도 있었거든요. 대화든 뭐든 매 번 ‘우리’를 붙이는 습관이 저는 사라졌어요. 저 사람의 사고와 생각이 다르다는 걸 많이 받아들였고요. 뭐 그런 거 있잖아요. 우리 집을 our home으로 번역하면 이상하다던가, 우리 동네를 Our hometown으로 번역하면 이상하듯이요”
맑은 눈으로 나를 쳐다보던 C 씨는 ‘정체성 혼란’이란 단어를 듣고는 D 씨를 바라봤다. 여기서 잠깐, 우리의 한국어 수준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있다.
우선 온두라스인(사실한국인이지만)인 D 씨는 어려운 단어도 알아듣고, 정치 이야기까지 할 수 있는 능통자였다. 그래서 내가 어려운 단어를 쓰면, 미국인(사실 정체성은 한국인이지만) 친구 Csms 온두라스인에게 영어 통역을 요청했다. 특히‘발해, 신라, 고구려’ 같은 단어가 그랬는데, 그중 하나가 ‘정체성 혼란’이었으므로 C는 자연스레 온두인 D를 쳐다봤다.
무튼간 ‘집단 중심 사고’라는 단어는 다행히도 알아들어주었던 미국인은, ‘정체성 혼란’이라는 단어는 되게 어려워했는데,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시선은 온두라스인에게 옮겨갔고 그녀는 고민을 하더니 이렇게 단어를 썼다.
‘like… identity… identity crisis’
정체성 혼란이란 단어로 표현하고자 하는 단어는 이런 단어다. identity crisis. 마치 한국에서 초등학교 과자를 사면 당연히 친구들에게 나눠줬는데, 미국에선 이상해하지만 너무 고마워하던 그 당혹감.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한국에서 당연히 ‘집단’과 ‘상사’의 눈치를 보고 휴가를 내야 하지만, 미국에선 ‘자신과의 약속’이라고 하고 휴가를 써도 괜찮은- 그 차이에서 오는 당혹감. 아빠가 휴가지나 외식 장소를 결정하고 “따라와”라고 말하는 한국과 달리, 미국 친구의 집에 갔을 때 자연스레 아이에게 ‘너는 뭐 먹고 싶어?’라고 묻는 장면을 본 당혹감. 우리 집을 our home으로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집(my home)으로 번역할 때의 당혹감. 너무 무거운 주제라면 이런 게 있다. 침대에 신발을 신고 눕는다거나, ‘한국인을 화나게 하려면 조상의 산소 위에서 뛰는 것보다 밥을 발로 밟는 것이 훨씬 모욕감 있는 행동이다’라는 주제를 볼 때 공감이 되는-그 거리감. 한국의 스타일만이 세상의 정답이 아니라는 그 당혹감이 나에겐 정체성혼란으로 들였다.
물론 뒤 쪽의 밥을 발로 밟는다거나 조상의 산소를 밟는 부분을 말하는 건 조금 장난스러운 부분이 있지만 앞선 ‘아이에게 선택권을 주는 행위’나 ‘our home’의 예시는 확실히 집단과 개인을 나누는 시각차이가 있다고 보인다. EBS실험팀이 연구한 서양과 동양의 인식차이만 보더라도 이는 좀 더 극명하게 갈린다.
1_ 바나나-원숭이-판다를 놓고, 2개씩 묶어보라고 했을 때 동양인들은 ‘바나나와 원숭이’를 묶는 반면 서양인들은 ‘판다와 원숭이’를 묶는다던지,
2_ 풍선이 움직였을 때 원인을 물었을 경우, 동양인은 ‘바람이 불었다’라고 말하는 반면 서양인들은 ‘풍선에 바람이 빠져서’라고 대답한다던지 (흐름과 관계로 보는가 / 풍선 자체를 보는가)
3_ 주변 사람들이 울고 있으나 한 사람만 웃고 있다- 과연 이 사람은 행복한가-라고 물었을 때, 동양인들은 불행하다고 대답하는 반면 서양인들은 행복하다라고 대답한다던지
이런 답변들은 확실히 집단 혹은 주변을 얼마나 신경 쓰는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난 생각한다.
물론 모든 동양인이, 또 모든 서양인이 ‘이렇다’라고 묶는 것 역시 사실은 정답과 멀 수 있다. 모든 동남아인에게 이 예시를 보여주지 않았을뿐더러, 서양에도 미국, 북유럽, 중부유럽, 동유럽, 서부유럽에 따라 성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볼 때 나는 서양중심적 사고는 ‘나’에 입각해 있고, 동양중심적 사고는 ‘집단’에 입각해 있다고 본다. 가족을 표현할 때도 ‘우리 가족’과 ‘우리 동네’, 아빠를 표현할 때도 ‘나의 아빠’ 보단 ‘우리 아빠’등으로 표현하는 이 모습. 이렇듯 서양은 집단에 내가 어떻게 속하는를, 동양은 반대로 어떤 집단에 내가 속하는가를 대화 속에서조차 우리는 이를 무의식적으로 자기도 모르게 확인한다. 그리고 무의식이 된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란 말이 있듯이,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고 말하듯이.
이렇게 설명해도 너무 추상적이라면 내가 겪은 혼란을 더 설명해보고 싶다. 미국인 친구와 종종 만나며 그리고 뉴욕 여행을 다녀오며 느낀 정체성 혼란을 겪은 두 가지 이야기가 있다. 첫 번째 주제는 ‘너와 나는 같아-‘라고 받는 대화들의 어색함이었다.
일은 보스턴의 어느 커피숍을 갔을 때 일어났다. 오후 3시 한가로운 4평 정도 되는 카페였는데, 원두와 옵션을 고르는 것을 어려워하는 내 얼굴을 본 점원은 “처음 왔어?”라고 말을 이었다. 스몰톡을 하고자 하는 마음 그리고 친절한 설명을 해주려는 뉘앙스에 나는 고마움을 느꼈고, 언어도 안되는데 환대와 즐거움에 열려있던 나는 “처음 왔어”라고 대답하자 그에게는 “보스턴? 아니면 이 커피숍이 처음?” 이냐는 질문이 돌아왔다.
내가 보스턴 자체가 처음이라고 대답하자마자 점원은 추가할 수 있는 시럽들에 대해 이것저것 추가 설명을 해줬다. 이 시럽은 이런 맛이 나고, 저 시럽은 저런 맛이 나고, 이 원두는 이게 좋고… 자기가 좋아서 설명하는 그 반짝거리는 눈빛과 함께 나에게 전달된 것은 다름 아닌, 원어민 수준으로 (원어민이 맞지만) 빠르게 들려오는 설명들이었다. 특유의 리듬을 따라 들려오는 단어들을 많이 쳐줘봤자 50%를 이해한 나였지만, 이해했냐는 그의 말에 나는 그의 환대를 무시하지 않고자 ‘설명 고맙다’는 말과 표정을 취했다. 그리고 시럽을 골랐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점원은 커피를 만들며 물었다.
“보스턴은 어떤 거 같아?”
그때 떠오른 건 다름 아닌 미국인 C친구의 대답이었는데, 미국인 C친구는 나에게 보스턴을 설명할 때 뉴욕보다 더 “classi-하다(고전적이다)”는 표현을 던져줬다. 그 표정과 그 단어가 나에게 딱 꽂혔는지, 나는 그 친구를 흉내 내듯이 똑같이 대답했다. “i think classi~” 그랬더니 웃으며 돌아온 대답은 다음과 같다.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i don’t think so”)
그러고는 직원은 자신의 의견을 기분 나쁘지 않게 하나하나 설명해 갔다. “근데 나는 뭐랄까… 보스턴 알잖아~ 완전 도시화 되어있고, 사람도 많고, 클래식하다기엔 너무 또 현대화됐어.~ 아… 이전에 뉴욕에서 왔다면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겠다…! 너 뉴욕에서 왔어?” 하고는 나에게 커피를 줬다. “보스턴 여행 잘하고~”라고 말하면서. 나는 그렇게 커피숍을 나왔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전혀 기분이 나쁘지도 이상하지도 않았다. 자신의 의견을 말하면서 상대방의 의견이 충분히 존중하고 있는 느낌. 나의 의견을 반박하지만 나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 느낌. 내 의견이 충분히 전달되고 공감받았다는 느낌을 난 전달받았다. 팁을 주고 싶을 정도로 좋은 환대에 커피를 받고 나오는데, 내 기분이 이상한 건 다름은 아니었다. 그건 바로 “한국에서 이랬다면 어떨까?”라는 상상 때문이었다.
내 상상은 예컨대 이런 거였다. 만약 한국 카페에서 손님이 “인천 꽤 고전적이네요.”라고 말했을 때 점원이나 사장이 “어…! 저는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요”라고 대답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 어투와 뉘앙스에 따른 차이가 있긴 하겠지만 이런 마음을 먹는 손님이 많을 것이라 예상이 간다. “나랑 싸우자는 건가?”
사실 저 마음은 내 마음과도 비슷하다. 나 역시도 한국에서 ‘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라고 누군가 대답한다면, (물론 점원의 뉘앙스는 ‘난 좀 다른 의견이야였지만) 나도 마음속에는 싸우자는 건지, 아니면 다른 의견을 말하는지 고사하고, ‘서비스가 왜 이래?’라고 의심반, 분노반의 눈초리를 보낼 것이 쉽게 예상 됐다. 만약 내가 그런 이야기를 했다면 예상되는 점원의 반응은 다음과 같다. “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라거나, “오 인천 멋있죠” 하면서 맞장구를 쳐주는 일이다.
만약 자신만의 의견이 있는 경우, 그건 상대가 ‘다름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음을 느꼈을 때 ‘오 저는 좀 다르게 생각해요’ 라든가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가 가능한 것 같다. 특히 판매하는 입장과 구매하는 입장이라면 더더욱. 그렇지만 내가 한국에서 느끼는 대화는 자신의 의견을 밝히기까지 시간이 꽤 많이 걸렸다. 라포를 쌓고, 몇 번 보고, 꽤 가까워져도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라고 말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대부분은 공감의 대화 혹은 ‘우리 친구지?’라는, ‘같은 계급’을 은근히 확인하는 대화가 더 비율적으로 더 많았다.
나는 이를 이렇게 정리하고 싶다. 한국에서 일어나는 대화는 ‘너와 내가 같은 편이다’라는 것을 확인하는데 목적이 있다고. 집단주의, 관계, 영향들이 주 키워드일 뿐만 아니라, 위 예시인 “만약 가운데 사람 한 사람만 행복한 표정을 짓고, 주변 사람이 슬픈 표정을 지으면 이 사람은 행복한가”라는 질문에 “불행하다”라고 하는 답을 살펴보면 더 두드러진다고 생각한다. 한국사회 혹은 동아시아 사회는 ‘너와 내가 맞다’라는 전제를 맞추는데 에너지를 쓴다. 의견을 조율하고, 동일성을 맞추는데 정확히는 감정, 행동, 표정, 옷까지 맞추는데 신경을 쓴다. 예를 들어 이런 이야기다.
만약 내가 보스턴에 가기 전, 연애를 하고 있었다고 가정해 보자. 분명 나는 공감, 동일시등의 방식으로 관계를 꾸려갔을 것 같다. 여자친구가 “나 오늘 회사에서 ~~ 때문에 너무 힘들었어 ㅠ 상사가 자꾸 자기 일이랑 자기 책임을 강요하는 거야… 나는 그거에 말대답을 하진 못하고, 너무 화났어”라고 한다면 나는 분명 “너무 힘들었겠다…” 하며 공감을 기반으로 하는 대화와 관계를 꾸려나갔을 것 같다. 추가로 커플티도 맞추고, 감정을 같이 동기화하며 말이다.
최소한 내 생각에는 이런 관계가 많다고 생각한다. 물론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정확히 전달하는 사람이 만난다면 양상은 조금 달라질지도 모르겠다. 공감 그리고 높은 의미의 ‘같은 편’. “나만 이렇게 생각해?”라는 시작으로부터 공감을 얻고자 하는 어떤 관계. 만약 내가 여자친구의 힘듦에 대해 “근데 난 다르게 생각해”라고 한다면 나는 어떤 뒷감당을 해야 할지… 나는 잘 모른다.
너무 여성을 수동적으로 다룬 건 아닌가 싶지만, 감성적인 남성과 강한 여성 사이에서도 저런 대화가 자주 일어남을 일러두고 싶다. 결국 같은 감정과 같은 사랑을 하는 것. 우리는 ‘하나’ 니까, 우리는 ‘함께’니까. 희생해야 하는 것. 이런 대화가 자주 일어나는 것 같다. 그리고 그 압박감은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해”라고 했을 때 혹은 “정말 슬프겠다… 나는 좀 다르게 생각해”라고 말했을 때와 같다.
혹시나 나를 사이코패스라던지, 감정능력이 모두 사라진 대문자 T라고 오해는 말아줬으면 좋겠다. 우선 나는 이 공감 자체, 공명자체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오은영박사님의 설루션 중 하나인 ‘판단하지 않기. 충고하지 않기. 일단 들어주기’ 등의 방식을 지지한다. 나 역시 공감과 공명의 힘을 지지하는 편이며, 특히 갈등상황의 경우 ‘집단’과 ‘집단’이 부딪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편이 되어주어야 할 경우에는 충분히 편이 되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피해를 입고 왔다면 더더욱 말이다.
하지만 너는 그렇게 느낄 수 있겠다’ 혹은 ‘너 입장에선 정말 그렇게 이해할 수 있겠어’라는 개인주의와 ‘우린 하나니까 같은 것을 느껴야 해’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다른 ‘너’와 다른 ‘나’가 만나 서로가 공동체인 것-과 우린 그냥 우린 하나의 ‘가족’이니 혹은 우린 하나의 ‘커플’이니 같은 걸 느껴야 해 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진정한 공감은 그 사람의 다름과 맥락을 다르다고 인정할 때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만약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나눠준 사람이 호구가 된다는 것이다.
나는 이를 마치 ‘과자를 반에 들고 온 친구’로 비유하고 싶다. 물론 마음이 맞아서 나눠줄 수 있지만, ‘우리는 하나의 반이니까 당연히 나눠줘야 해’가 되는 순간 나눠준 사람은 호구 아닌 호구가 되고, 나눠 받은 사람은 당연한 마음이 된다. 물론 문제가 생겼을 때 같은 편을 해준다는 은근한 암묵적 유대감을 느끼는 것은 맞지만 과자를 나눠준 그 사람이 나쁜 일을 저질렀을 때, 과자를 나눠 받은 사람이 눈 감아주는 흐름은 좋은 순환도 문화도 아니다.
물론 커플 간의 관계는 이와 많이 다르고, 다양한 양상과 경험들이 있지만 이런 같은 편의 확인은 단순히 가장 가깝고도 깊은 연인관계에서부터, 좀 더 넓게는 직장 상사의 뒷담, 친구 사이, 혹은 크게는 국가까지도 펼쳐진다고 생각한다. 옷차림, 단어, 뉘앙스, 눈빛, 걸음걸이, 심지어 말투등까지도 처음 만나면 상대를 평가한다. 이 사람이 나와 같은 편인지, 다른 편인지 혹은 나와 급이 맞는지 평가한다. 만약 애매한 것이 있다면 그것 낯선 것도, 다른 것도 아니고 이상하고 다른 편에 있는 것이 된다. 물론 서양인의 입장에서 이렇게 물어볼 수도 있다. 애매한 게 있으면 그냥 판단하지 말고 물어보면 되지 않아요? 그렇게 재지 말고 질문을 통해 확인하면 되지 않아요?
반대로 서양인의 입장에서 ‘그냥 바로 말하면 효율적이지 않아요?’ 할 수 있지만 되려 한국문화에 오래 산 우리… 가 아니라 나는 안다. 그렇게 쉽지만은 않은 일이란 것을. 마치 “우리 집이에요”라고 말하는 익숙한 문장을 “나의 집이에요”라고 바꿀정도의 이상한 말일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한국에선 그렇게 어색하게 말하면, 평가와 어색함을 꽤 크게 견뎌야 한다는 것을.
아 여기서 잠깐. 누군가에게 이 글이 불편하게 느낄 수 있음을 안다. 그러면 미국 가서 살라는 말이나 비난을 던지고 싶은 마음이 혹시나 생긴다면 이해한다. 나 역시 돈이 많다면 미국에 가서 살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도 사실인 한 편, 이 글은 정체성 혼란을 설명하기 위한 비난 보단 ‘비교’에 초점이 있음을 밝힌다. 집단주의에 대한 분석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음을 다시 말하고 싶다. 그럼 다시 이어가 본다. 정체성혼란에 대해.
두 번째로 느낀 정체성 혼란은 다름 아닌 ‘감사합니다’였다. 미국인(하지만 한국 집안에서 자란) C 친구는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그 미국에서 살던 J친구랑 나는, 서빙하는 분께 연신 감사합니다를 하는 게 이해가 갔는데, 너도 연신 감사합니다를 말하는 게 좀 신기했어” 즉, 이런 이야기였다. 자기가 쭉 살펴보니, 해외 문화권에서 자란 친구는 서빙을 해주는 직원들에게 ‘감사합니다’를 대부분 하는데, 아닌 사람들은 당연히 그냥 서빙을 받는다고.
나는 꽤 많이 감사한다. 그러니까 일상에서의 감사라던가, 긍정의 힘이 아니라 식당이나 카페에 가면 습관처럼 하는 편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상대를 사람으로 생각하고, 서빙을 ‘그럼에도 사람이 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언젠가 SNS에서 이런 논쟁이 있던 적이 있다. 글쓴이는 아들이 ‘왜 우리가 돈을 내는데, 서빙을 해주는 사람에게 고맙다고 해야 하는가’라고 물었을 때, 그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다고 했다. 아래는 갑론을박이 펼쳐졌다. 여기서부터는 내 입장이니 읽어주시면 고맙겠다.
나는 돈을 비록 냈지만 나에게 서빙을 해주는 사람은 ‘개인’이고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 사람을 식당에 소속된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소속 직원은 맞지만, 그럼에도 그 사람의 신체나 인격이 모두 소속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사람은 직원이지만 자신의 일거수일투족까지 모두 허락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좀 불편하실 수도 있겠다만) 나와 그 사람의 계약은 음식을 가져다주는 것까지만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 사람이 웃으며 서빙해 주고, 좀 더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주고, 잘 가져다주는 것은 그 사람의 몫이다. 난 그것에 대한 감사가 크다.
그러므로 난 카페에서 커피가 나오든, 패스트푸드점에서 음식이 나오든, 편의점에서 물을 사든, 무조건 ‘감사합니다’를 말하는 편이다. 나에게 이는 ‘당신을 단순히 식당이나 상점에 소속된 물건으로 보지 않겠다’는 조금 크고도, 과잉된 의미가 좀 서려있긴 하다.
물론 이 맥락에 대해 서양인들과 깊이 있는 이야기를 해보진 못했지만 그럼에도 내가 느낀 건 역시 ‘개인’과 ‘집단’에 대한 차이가 있는 것 같았다. 우린 어딘가에 취직되면, 무조건적으로 그곳의 말을 들어야 하고, 항명하지 말아야 하고, 희생은 당연해진다. 웃는 얼굴, 서비스, 상대방의 마음을 해치지 않는 모습. 물론 구조적인 이야기, 경제적인 부분 정말 많은 요소들이 존재하겠지만 집단에 소속된다는 느낌은 나에게는 지울 수 없었다.
당연히 직원이 고객에게 친절해야 한다는 입장이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다. 매출에도 직결되고, 기분도 좋다. 나도 알바를 했을 때 최대한 상대방을 잘 대하려고 했고, 회사 생활 할 대도 친절을 나에게 주요하고 소중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 이뤄지는가부터 시작해서 할 말은 많지만… 여하튼 나는 그들을 하나의 ‘인간’으로 보고 싶다. 그래서 고깃집에서 매 번 서빙을 해줄 때마다, 상추를 채워줄 때마다, 고기를 더해줄 때마다, 나는 ‘감사합니다’를 말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정확히는 미국인 친구가 이 부분을 짚었다. 계속 ‘감사합니다’를 했다고)
일상에서 겪는 정체성의 혼란은 간단히 말하면 이런 부분들이다. 나는 이 혼란이 세 가지 혼란에서 온다고 본다. 유교에서 파생된 집단주의, 내 안에 서양철학으로 시작된 개인주의 마지막으로 여기 조금 섞여있는 무당적인, 상대의 에너지나 기분, 숨겨진 아픔이나 답답함을 보는 감각. 지금까지 나는 유교(혹은 한국적) 집단주의와 서양철학(정확히는 서양 문화)에서 시작된 개인주의를 비교했고, 또 나만의 독특한 감각인 표정이나 에너지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끼여 넣었다.
사실 내가 세상에서 느끼는 에너지나 표정, 감각들은 더 세밀하고, 더 독특하고, 더 다채롭다. 조금 와닿지 않고 믿기 힘들지도 모르겠지만 어떤 동네에 가면 이 동네의 기운이 좀 좋지 않다고 느껴진다거나 누군가를 만나면 이 사람의 과거가 아주 가끔 보인다거나 하는 등의 느낌들을 받는다. 하지만 무당을 앞세우지 않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내가 느끼는 감각을 선명하게 언어로 풀려거든 최소한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강작가의 필력이 필요한 듯싶다. 이건 내가 감각이 뛰어나서-라기보다 내가 다루는 주제가 ‘주의’ 혹은 문화적 차이를 서술하는 이야기다 보니 여기에 개인의 이야기를 끼어놓기란 쉽지가 않다.
그래. 난 내 감각을 풀어낼 필력은 안되고, 그래서 답답하고 아쉽지만 그럼에도 다행히 개연성을 가지고 썰을 푸는 작업엔 어느 정도 능하니 이렇게 이야기를 풀어보겠다. 당연히 정체성 혼란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려면, 혼란을 다루기 전, 각 정체성에 대한 정리가 필요하다. 재미가 있을지 없을진 모르겠지만, 최대한 (나름대로) 재밌게 풀어내려고 하니 읽다가 재미없으면 떠나셔도 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시작하고 싶은 건 무당 이야기다. 역시 사람을 주목시키는데 재밌는 이야기는 첫사랑 이야기 그리고 무서운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