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번째 정체성 - 무속

by 시몬 베유

신기, 그러니까 증조외할머니가 무당이 될뻔했다고 말하면 언제나 이런 답변이 줄을 선다. “오 나는 언제 부자가 돼? 내 미래는 어떻게 돼?” 그들의 설레는 얼굴에 미안하게도 나는 “그런 건 안 보여… 그만큼의 스킬은 안되거든…”이라고 대답한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나는 신기를 조금 이상하게 풀었으니까.


정말 아쉽게도 나는 미래를 볼 만큼의 휘향 찬란한 마법사가 아니다. 그럼 이 능력을 어디다 쓰느냐. 어쩔 수 없다. 어딘가 기운이 안 좋거나, 느낌이 싸하거나, 상대방의 고통이 좀 보이거나, 아니면 상대방이 말하고자 하는 말을 기가 막히게 알아들을 때가 있다. 직장에서도 “어떻게 이런 말을 한 번에 캐치해요?”라고 하는 이야기를 종종 들었는데, 나는 그 사람이 뭐에 꽂혔고, 어떤 기운을 가졌고 이런 게 좀 보인다. 심지어 무슨 질문을 하고 어떤 답이 좋을지 보이는데, 특히 그 상황은 긴장되거나 답답한 상황이다. 나는 아쉽게도 미래가 아니라 그 사람의 답답함이나 억눌린 것들이 남들보다 더 잘 보인다.


그렇다고 무속이라고 해서 무섭게 생각하거나 자신과 먼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않아주었으면 한다. 내가 다루려는 무속이라는 종교는 전반적으로 동아시아에만 있는 생명에 대한 존중과도 가깝다고 생각한다. 사람을 죽이지 않고, 생명과 가까이 지내려는 그 감각과 가깝다. 그러니까 어떻게든 설득해야만 하는 서양에서 펼쳐지는 환경운동과 다르게 직간접적으로 자연파괴가 되니 조심하자며 바로 받아들이는 동양의 감각, 사람을 도구로보지 않고 “그래도 사람이니까- 봐주자-“라는 그런 감각, 곧 생명에 대한 감수성을 무속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증조외할머니로부터 시작한다.


나의 증조외할머니는 무당이셨다. 정확히는 무당이 되려다 실패하신 분. 증조 외할머니는 종종 밤이 되면 종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그러면 나의 12살쯤 되는 나의 큰 고모를 깨워 호롱불을 들게 했다고 했다. 1970년 즈음, 칠흑 같은 진도에서 호롱불을 의지하여 밤을 헤매고 나면 어느새 새벽이 됐고, 큰고모와 증조외할머니는 돌아와 잠을 잤다. 큰고모는 집의 본채에서, 증조외할머니는 따로 마련한 별채에서.


그렇게 증조외할머니는 몇 번의 내림굿을 했으나 실패했고, 몇 십 번의 야간산행을 했음에도 아쉽게도 신내림에 다다르지 못했다. 신기는 있지만 신내림을 받지 못한 애매한 사람. 이 사람이 아니었다면 나는 무서운 경험도, 신기도 없이 다른 삶을 살았겠지만 아쉽게도 그녀가 그런 삶을 살지 않았다면 이런 글도 쓰지 않았을 것 같다. 무튼 이 분은 무병장수하셔서 104세쯤 돌아가셨는데, 나는 그녀의 주민등록번호가 98인가로 시작하는 것을 보고 참 신기해했던 기억이 난다. 민증번호로만 따지면 나보다 어리다며 신기해했던 기억처럼 나는 그녀를 살아생전에도 봤다. 물론 나에게서 만큼은 안 좋은 기억뿐이었다.


나에겐 영원한 ‘누나’로 남아있는 유관순 열사님보다도 더 누나셨던 증조외할머니를 보고 도망친건 나뿐이었다고 한다. 나에게는 주민등록증에 있는 얼굴이 아닌 언제나 조금 무섭고 기괴한 얼굴로 기억이 남아있는데, 그 의문이 풀린 건 다름 아닌 20대 중반 엄마와 같이 빨래를 접고 있을 때였다. 한창 나는 그때 내 본질이라던가 뿌리(foundation)를 찾고 있었을 때였는데, 증조외할머니를 기억한 건 다름은 아니었다. 외가는 그럼에도 왜 차분했고, 공부를 했을지 대화하던 찰나 증조외할머니의 장례식 이야기가 시작됐다. 내가 증조외할머니를 무서워했다는 이유는 어쩌다 보니 숨기면서, 물론 내가 증조외할머니를 무서워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내가 항상 그 별채를 갈 때마다 벽지는 소스라치게 놀랄 정도로 빨갰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그뿐만은 아니었다. 중간에는 악마 모양이 그려져 있고, 나머지 주변에도 무당집에 있을 법한 장식들이 그려져 있었는데, 그러므로 나는 별채에 가려고 할 때마다 악을 쓰고 울었던 기억이 난다. 문을 열 때만 해도 그런 모습이 보였으므로 나는 그 공간을 공포의 공간으로 떠올리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무당이 되려다 실패했다는 사실을 몰랐을 때에도 거기가 좀 신기한 구석이 있는 공간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그때 물었다.


“엄마. 근데, 별채에 있던 벽지들은 장례식 전에 다 치웠어요?”


“어? 벽지는 원래 살구색이었는데? 단 한 번도 도배 같은 거 한 적 없어.”


그제야 알았다. 주민등록증이나 사진에 남아있던 그녀의 인상과 내가 기억했던 그녀의 인상이 달랐던 이유도 그때 서서히 이해가 됐다. 그리고 이어진 나의 질문.


“진짜요? 저는 그거 갈 때마다 봐서 못 갔는데…”


“아 유달리 너만 증조외할머니한테 가면 울고 때를 썼어 안 가겠다고. 다른 애들은 같이 놀고 싶어서 안달이었는데. 유달리 너만 그러더라.”


여기서 다른 애들이란 6남매의 아들과 딸을 뜻했다. 그러니까 10명이 넘는 외손주들 중 유달리 나만, 나만 그녀를 무서워했다. 그럴 만도 한 게, 이제 생각해 보면 그 무서운 표정과 벽지는 나만 볼 수 있던 것이었으므로 나만 두려워했던 게 당연했던 것 같다. 신기의 대물림, 그게 나였던 것 같다.


이 이야기에 신빙성을 더하자면, 나는 아직도 증조외할머니의 장례식 당시 별채를 들여다보려던 그 떨림을 기억한다. 아직도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무섭고도 떨리는데 누군가 열어놓은 별채의 안을 스을쩍 쳐다보기 위해 안보는 척 지나가며 흘깃 봤었더랬다. 물론 그때 당시에는 말한 대로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 안에 있던 악마와 눈을 안 마주치기 위해 흘깃 봤던 그 떨림과 공포를 기억한다.


이 기억이 아직도 남아있다는 건, 적어도 나에겐 그 체험이 꾸며내진 않았던 경험이었단 사실이라는 점을 말하고 싶다. 물론 다행히도 신기라는 건 항상 전달되는 바람에 나는 귀신체험이나 무서운 이야기를 익숙하게 듣고 자랐으므로 엄마와의 이 대화가 낯설지는 않았다. 엄마 역시 이 이야기를 나눴을 때 나를 비난하거나 정신과를 데려가야 한다는 등의 반응을 하진 않았다. 왜냐하면 엄마도, 엄마도 약간 신기가 있었으니까.


대를 건너 신기는 전달된다고 했으니 (물론 중간에 한 다리 건너오는 경우도 많지만) 나와 증조 외할머니 사이의 어떤 중간 전달자가 필요했는데 그게 바로 큰고모와 엄마였다. 엄마는 종종 꿈을 꾸거나 아니면 어떤 안 좋은 기운들을 느꼈고, 나에게 말했고, 실제로 그것들이 맞은 적이 종종 있었다. 나 역시도 어렸을 적 다양한 경험들을 했었으므로 이 이야기는 서로에게 낯섦이나 이상함 보단 ‘그럴 수도 있지-‘라는 방식으로 이해됐다. 내 정체성에 대해 언어화하기 시작한 건 다름 아닌 대학 때부터였다.


터가 안 좋은 곳에서 잠을 자다 내 이름을 부르는 환청을 부른다던가, 귀신이 농구공을 계속 튕기는 장난을 친다던가, 이른바 ‘촉’이 좋은 행동들을 해서 잘 문제들을 해결해 나간다던가 등의 삶을 살다 나에 대해 이해를 시작하게 된 건 무속에 관련된 수업을 들을 때였다. 나는 거의 신을 받듯, 카뮈의 이방인을 읽고는 철학 관련 전공에 지원하게 됐는데, 때마침 내가 진학한 대학은 종교에 관련되어 다양한 논의를 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자연스레 무속에 관련된 수업을 들었고, 다행히도 교수님은 무속 신앙에 대해 나쁘다거나 비난하는 입장은 아니었다. 오히려 특유의 감수성으로 무속신앙에 대해 설명해 주었는데, 이 이야기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이야기 중 하나를 나눠볼까 한다. 이건 오피셜 한 논문이나 증언은 아니므로 학문으로 쓸 순 없지만 말이다.


샤머니즘 수업을 해준 교수님은 젊은 시절, 그러니까 1980년대 시절, 샤머니즘을 공부하러 제주에 방문했다고 한다. 당시 4.3 사건은 국가안기부를 필두로 어떻게든 입을 막으려던 시대였고, 세간으로 새어나가는 것을 막던 시절이었다. 물론 아름아름 알 사람들은 알았지만, 공권력의 힘은 하늘을 찌를 때였으므로 4.3의 이야기는 조금만 새어나가도 공안과 안기부 사람들이 와서 입을 틀어막았다고 한다.


그러나 교수님이 본건, 어떻게든 4.3을 말하려고 하는 귀신 들린 자였다. 귀신이 들려 사람이 미치면 당시로서는 특히 더 무당에게 갈 수밖에 없었으므로, 가족들은 귀신 들린 자를 무당에게 데리고 갔다. 그러면 무당은 굿을 시작한다. 결국 귀신 들린 자는 4.3에 대한 증언을 한다. 그런데 공권력은 이 이야기가 시중에 흘러가지 않게 막아야 하므로 무당을 겁박한다. 무당은 어떻게든 자신의 의무와 책임을 다해야 하므로 굿을 다시 시작한다. 그러면 자신이 한 번도 듣고 보지 못했던 4.3에 대한 내용을 말한다.


정치와 무속의 대치. 결국 내 생각으로도 당시 정치가 이겼으리라 생각하지만 이 이야기를 포함하여 내 안에 남아있는 결론은 이런 이야기다. 무당은 억눌린 마음을 꺼내게 만드는 사람이자, 분노와 아픔으로 인해 말도 못 하는 사람을, 말하게 만드는 사람이라고. 귀신 들린 사람이 어디선가 4.3의 이야기를 들었든 간에, 그 답답함을 느끼고는 잘 풀어내는 사람이고.


물론 세상에는 설명할 수 없는 사람과 상황과 사건들이 너무나도 많다. 신병에 걸리는 사람들에 대해 나는 할 수 있는 말이 별로 없다.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모른다는 이야기다. 세상에는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것보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많고, 내가 학문을 하며 배운 건 세상엔 내가 알 수 있는 것보다 알 수 없다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이므로 나는 신병, 갑자기 들리는 귀신 등에 대해서는 할 수 있는 말이 적다.


그렇지만 내가 나름대로 샤머니즘에 대해 공부하고, 몇몇 논문과 관련 서적을 읽고, 내 개인적인 경험까지 넣어 끓여낸 지식은 나름대로, 무당은 분노와 아픔으로 인해 말도 못 하는 사람에게 해방감을 준다는 것이다. 왜 누구나 그런 경험들 있지 않나. 너무 화가 나서, 울분이 끝까지 받쳐서 화만 내야 하는 상황인데 옆에서, ‘괜찮아. 천천히 말해도 돼. 괜찮아요. 일단 말해주세요.’라고 하는 걸 넘어, ‘혹시 말하고자 하시는 게 이런 게 아니세요’ 라며 마음을 뻥 뚫리게 만들어 주는 사람들 말이다.


나는 이들이 꽤 무속적인 행동을 한다고 생각한다. 무속적이라는 단어가 부정적이라면 해방감을 준다-고 받아들여도 좋다. 너무 어색하거나 무슨 말하는지 모르겠다면, 이런 예시도 떠오른다. 내가 본 글 중에 이런 글이 있었다. 정확한 단어는 생각나지 않지만 이런 글이었다. “지금 무당들이 많이 사라졌지만 무당의 사주나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은 타인이 느낀 것을 대신 말해주는 소설가가 되었을 것이다”라는 말. 왜 그런 경험 있지 않은가. 자신도 모르게 무심하게 스쳐갔던 답답함이나 억눌림을 소설이나 에세이를 보면서 해방감을 느끼는 것 말이다.


조금만 더 이 이야기를 이어가 보자면 최근 인기 있었던 케이팝-데몬 헌터스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나는 케데헌(케이팝 데몬헌터스)가 유행하기 전부터 이미 아이돌들이 무당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고 느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첫 번째는 몇 번 갔던 콘서트와 축제 경험 때문이었는데, 자기가 정말 좋아하는 아티스트들의 콘서트를 다녀오면 나뿐만 아니라 내 친구도, 같이 갔던 주변 사람들도 표정이 변했다. 그런데 그 표정은 (신기 있는) 내가 볼 때는 마치 굿을 하고 나온 사람의 표정이었는데, 이는 콘서트장에서 소리를 지르든 아니면 그냥 경청하든 자신 안의 답답함을 어루만지는 시간들이라는 반증이기도 했다.


굿의 현장을 많이 본건 아니지만 굿에 따라 엄청 소리를 지르며 해방(살풀이)을 얻는 사람이 있는 반면, 그냥 한 번만 소리를 지르고 해방(살풀이)을 하는 사람도 있다. 동시에 그냥 힘을 잠깐 얻었다가 표정이 돌아오는 사람이 있다. 물론 굿에 쓰는 리듬도, 방식도, 자극하는 감각들도 다르다. 나는 이 모양새의 입력과 출력이 콘서트와 같다고 느꼈다.


두 번째는 이 굿이 개인이 아니라 단체로 이뤄진다고 느꼈을 때였다. 인기가수 에이티즈의 콘서트 현장은 단순히 이 콘서트라는 이름의 굿이 해외 팬에게도 적용된다는 것을 본 현장이었다. 업무로 인해 2025년 1월 27일, 서울종합운동장 실내체육관에서 열렸던 에이티즈의 콘서트는 80% 이상이 해외팬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는데, 그 팬들이 한 군데 모여 한 소리로 외치고, 자신의 마음을 해방하고, 표정이 순간순간 밝아지고 (내가 느낌상) 기운이 좋아지는 느낌을 계속 받았다. 그러니까 케데헌으로 비유하자면 혼문이 더 강화되고, 사람들의 억눌린 마음이 해방되어 자신의 살고자 하는 마음, 밝은 마음, 좋은 마음을 잘 지킬 수 있는 힘이 생기는 느낌이었다.


여기에 참여한 이들이 그렇다고 해서 ‘나는 이런 트라우마가 있고, 나는 이런 억눌림이 있었고, 나는 이런 답답함이 있었어요’라고 말하진 않았을 것이다. 더 디테일하게 말하면 ‘나는 콘서트를 통해 여성, 동성애자로 태어났다는 것을 인지하고, 그로 인해 20년간 차별당했음을 느꼈어요. 하지만 이제 나는 이 차별을 말할 거예요. 나는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라고 말하는 일은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최소한 그렇게 말할 용기라던가, 그간 당했던 그러나 자신조차 인지하지 못한 답답함을 에이티즈라는 아이돌(무속)인들로 하여금 해방감을 느끼게 되는 경험이 있어 보였다.


아이돌이 과연 콘서트에서 현대 철학이나 심리학의 언어로, “이건 이래서 그랬고요. 저건 저래서 그랬어요”하며 분석을 했을까? 그런 일은 없었다. 그렇지만 특유의 음악과 리듬으로 그리고 어떤 느낌과 (서구적으로 말하자면) 퍼포먼스로 억눌린 자들의 트라우마들을 천천히 꺼내고 해방했음은 사실인 것 같다. 실로 안녕을 비는 굿, 액을 막는 굿, 귀신을 쫓는 굿등의 리듬을 풀어헤치고 거기에 좋은 가사들을 넣는다면, 그것은 듣는 이에게 어떤 효과를 가져오는지 생각해 보면 조금 설득이 될까?


문제는 이런 ‘끼’를 가진 사람들은 타인의 아픔에 더 민감하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겪은 정체성 혼란. ‘내가 이상한가?’라는 질문이 들었던 부분은 바로 이 부분이었다. 타인의 아픔이 더 보이고, 타인보다 더 눈치가 빠르고, 타인보다 더 잘 감각하는 영역. 타인보다 기운을 더 잘 느끼고, 굳이 말하자면 언어 보단 ‘눈치’가 발달한 영역이 이 부분이었다. 특히 아픔이라던가, 슬픔의 영역에 있어서 말이다.


타인의 아픔을 더 살펴보고, 굳이 더 돕고, 굳이 더 마음을 쓰는 일이 나에겐 좀 더 당연했다. 타인이 화내면 타인의 화보다 더 많은 것을 감각하고, 내가 피해자임에도 아무 말도 못 했던 일이 나에겐 당연했다. 누군가는 “왜 화를 안내?”라고 묻거나, 누군가는 “화낼 용기조차 없잖아”라고 비난하지만 그럴 수가 없던 일이 나에겐 당연했다. 물론 나도 항상 스스로 고민했다. 내가 이상한가- 하고, 아니 가끔 답답하기도 했다. 나는 왜 타인의 슬프고 화낼 표정 때문에 나 스스로도 못 지키지-하고.


정말 아쉬웠던 건, 어렸을 때 이런 성향을 풀어내줄 심리학적 용어조차 주변에 없었단 것이다. 우선 HSP. 그러니까 고도민감성개인(hyper sensitive person)이란 단어였다. 이 단어는 남들보다 더 예민하게 작품, 자연, 감정, 표정들을 느끼고 반응하는 사람을 말한다. 이 단어는 나에게는 꽤 해방감을 주었는데, 이 단어가 증명이 되었건 되지 않았건 간에 이 단어를 처음 만났을 땐 나의 마음에 꽤 정확히 맞아 들어와 시원함과 청량감을 주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좋은 무당을 만난 듯 말이다.


특히 생각나는 건 남중, 남고, 인천이라는 세 가지 맥락 위에서 갔던 미술관이다. 지금 보면 또 신기한 게, 마계라고 불리는 그 투박한 인천의, 그것도 남자 고등학교에서 미술관을 데려갈 생각을 했나 싶지만 그럼에도 나는 어떤 추상화를 보고, (아마 김환기의 작품인 것 같은데, 나에겐 마크 로스코의 작품을 봤을 때 그 기억이 되살아 났다) 감동을 받아 감탄을 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당연히 주변에서 돌아온 반응은 이런 반응이었다. “네가 뭘 아냐. 아는 척하지 마라. 설명할 수 있냐-“등등의 날 섬과 장난 어딘가를 통과하는 비난들이었다.


이 경험이 나에겐 꽤 강렬한 정체성 혼란으로 기억되고 있다. 나는 정말로 느꼈는데, 이 사람들은 못 느끼는 걸까-부터 집단주의에서 이상하거나, 좀 튀는 인간이 있으면 폭력이 허락되는 분위기까지 나는 나의 감정과 느낌이 있는데 이를 숨기고 아닌 척 버텨야 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이 감정을 허락하고 싶었다. 만약 당시 HSP라는 단어 조금 알았다면 어땠을까. 나는 자신을 조금이라도 더 이해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도민감성개인(HSP)이라는 말은 완전히 나를 해방시켜주진 못했다. 고도민감성개인일지라도 이라도 남의 고통에 예민한 사람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과 대화해 보면 오히려 너무 민감하여 이기적으로 변한 사람이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방어막을 둘러친 사람들도 존재했다. 그에 비해 나는 (물론 그들에게도 이타심이 있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타인의 고통 때문에 화를 내지 못한다거나, 호구처럼 많은 것들을 도와준다거나, 집단주의 혹은 효율성과 벗어나는 도움들을 많이 주기도 했고, 내가 피해자임에도 상대방을 생각하는 마음을 항상 가지는 내가 이상할 때가 많았다.


그렇다 보니 한 때 나를 규정하기 위해 정말 많은 심리테스트들을 한 것도 사실이었다. 어쩌다 보니 29만 원 정도를 내고 정신과 테스트를 받은 경험부터, MBTI, 에니어그램, BIG5 등 잘 알려진 심리테스트들은 모두 통과할 기회가 많았다. 하지만 나에 대해 확실한 해방감을 느끼진 못했는데 내가 나를 좀 편하게 받아들인 건 스스로에게 준 답변이었다. “무당 팔자면 그럴 수도 있지.”


신빙성은 없는 이야기고 그래서도 안 되는 걸로 알지만, 상담심리를 하는 사람들 사이에 속설이 있다고 한다. 그건 다름 아니라 상담이 풀리지 않으면 히든카드로 “팔자가 그래서 그래요”라는 문장을 쓴다는 이야기다. 그러면 이렇게 저렇게 이론을 설명하고 듣던 사람들이 도저히 스스로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상담사는 이렇게 말한다고 한다. “팔자가 그래서 그래요”라고. 그러면 내담자는 종종 “아… 그렇군요” 하고 풀어지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물론 이 이야기는 우스갯소리 일 수 있겠지만 나는 이 이야기를 상담의 관점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 특히 한국인의 마음을 잘 규명하는 예시라고 생각한다. 서양의 언어와 한국인의 감수성, 특히 상대방의 감정에 민감한 한국인은 서양의 언어가 맞지 않는다는 입장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규명하는 입장에서.


HSP뿐만 아니라 피해자와 가해자. 책임. 경제논리. 사실 과거의 나를 들여다볼 때 이런 언어들은 나에게 완전한 해방감을 주진 않았다. 피해자와 가해자보다 나는 상대방의 표정이나 답답함이 먼저 보였고, 아 저 사람은 가정이든 어디든 답답하고 억눌린 것이 있다-는 마음이 먼저 보였다. 사실 나는 학교 폭력을 당한 경험이 있고, 아빠에게 좀 시달린 경험(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많이 시달렸지만)이 있긴 한데, 그럼에도 내가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못한 이유는 “내가 문제를 해결할 때 그 사람에게도 해방감을 주어야 한다”라는 강박 그리고 “그 사람도 억눌린 게 있어서 분명 그럴 것”이라는 마음이 있어서였다. 아니, 더 정확히는 이런 문장이었다. “나의 저항이 과연 저 사람의 마음에 자유나 해방감을 줄까.”


이런 질문이 항상 내 마음 안엔 멍울처럼 있었다. 누군가는 이를 보고 ‘호구 같다’고 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생불이니 마음이 선하니-‘ 하기도 하지만 나에게 사실 가장 적합한 문장은 ‘그렇게 태어났다’가 제일 맞는 문장인 것 같다. 이 마음을 받아들이고, 이 성향을 받아들이니 비로소 내 안의 경제적인 부분, 책임과 보호라는 부분, 상대와 나의 감정을 구별하는 부분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재발 방지를 위해 저항해야 하고, 더 많은 피해자를 양산하지 않게 일단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그제야 들려왔다. 이를 조금 내 언어로 바꾸면 이렇게 됐다. “아, 저 사람은 내가 설득하고 대화하고 당해줘도 굿(퇴마)할 수 없는 영역이구나” 혹은 “아 내가 다른 사람들을 더 다정하게 대해주고 해방감을 주려면 이 사람과 멀어져야 하는구나” 같이 근본은 무속적으로 그러나 해석은 서구적으로 해나가며 나의 방향성을 섞었다. 그러자 나(자아)를 지키는 영역과 경제적인 부분을 덧입힐 수 있었다.


이렇게 자신을 지키고 분리가 되니 다른 사람의 성향도 그제야 들어왔다. 김환기의 작품을 보고 감동했던 나를 보고 비난했던 그들의 마음도 이해가 갔다. 물론 비난 자체는 잘못됐다고 생각하지만, 둔하거나 작품에 대해 딱히 감각하지 못하는 사람 혹은 후천적으로 자주 접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유별나다’고 하는 것도 이해는 갔다. 무엇보다 집단주의-유교의 룰을 따르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다면, 더더욱 표현하거나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 어려웠을 것 같다. 튀는 것. 다르게 생각하는 것. 다르게 느끼는 것. 나와 같지 않다고 표현하는 것은 집단에서 위협이 될만한 행동이었다. 정확히는 다름을 보였을 때 누군가 그를 못살게 굴거나 공격해도 아무도 비난하지 않는 문화였으니까 특히 더 그랬다. 한국은 특히. 인천의, 남고는 특히 더- 그랬으므로 그들의 마음도 이해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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