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두 번째 정체성 - 유교 (1)

by 시몬 베유

모두 똑같아야 한다-라는 압박감과 튀지 않아야 한다라는 죄책감을 가로지르는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는 미국 여행 중에서 만난 어느 여사님으로부터 시작한다. 미국 호스텔에서 만난 여사님은 60-70대쯤 되어 보이셨다. 나는 여사님을 호스텔에서 마주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있다가, 20대 미국 청년들이 조금은 신기해하며 말을 거는 모습을 보고 그제야 그 의미가 무엇인지 조금씩 눈치채게 됐다. 아- 사실 호스텔에서 60-70대 분을 마주친다는 건 조금 낯선 일일 수 있겠다는 걸 알게 됐다.


언제나 나에겐 열려있는 50대 이상의 성인분들과 대화는 언제나 배움이 많았으므로 이번에도 여지없이 말을 걸었다. 꽃단장을 하신 선생님께, 혹시나 일본 분이실 수도 있으니 일본어로 어떻게 대화를 할지 고민하며 “한국분이세요?”하고 말을 걸었다. 다행히 돌아온 대답은 한국 사람이라는 대답. 그렇게 시작된 대화 속에서 ‘조금 신기함’을 건져내게 된 건 이런 대답이었다.


(*본인이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을 수 있기에 대화 내용을 포함 많은 부분을 각색했다.)


“한국에선 이런 나이에 호스텔 오면 이상하게 봐”


사실 이게 정확한 워딩은 아니었지만 뉘앙스는 확실히 이게 맞았다. 이 질문이 귀에 들어오자 나에게 드는 질문은 다름 아닌 이 것이었다. 60-70대에 호스텔에 온다면, 20-30대는 이분에게 흥미를 보일까. 아니면 눈길도 주지 않을까. 그렇지 않으면 비난할까. 비난과 눈길 사이의 의견 어딘가라고, 난 최소한 그렇다고 생각했다. 양양에는 노인과 장애인이 없고, 합정과 망원에 40-50대 등산복을 입은 분들이 없으며, 성수에는 40-50대의 비율이 적은 것이 떠올랐다. 부모님을 어떻게든 합정으로 모시고 가면 “그런데 왜 가” 같은 느낌이 옅게 있으면서도, 눈을 반짝이며 “요즘엔 이런 곳에 오는구나” 싶어 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내가 동반했으니 갈 수 있었던, 청년이 있어야만 갈 수 있었던 지역에 대한 금기사항이, 미국에선 깨졌다. 여사님은 혼자 호스텔에 오셨다.


LA 근처에 사시는 여사님은 카카오스토리에 여행 다니는 사진만 올리면 주변 남성 여성 할 것 없이, “그만 여행 다니고 이제 좀 평범한 삶을 살라”며 한국에서부터 잔소리가 오간다고 했다. 자발적으로 결혼하지 않은 그분에게 결혼은 언제 하냐느니, 남편을 소개해준다느니, 여자가 그러 나면 어쩌냐느니 소위 고나리질이 오간다고 했다. 고나리질은 장장 11,000km를 날아와서, 비행기로는 13시간이나 걸리는 거리를 날아와서 꽂혔다.


여기서도 이러는데 한국에 가면 어떨 거냐며, 자기 호스텔 눈치 보여서 웃던 그분의 웃음을 나는 기억한다. 시대에서 받은 압박에 의해 약간은 어색한 미소였지만 그럼에도 자신만의 자유를 찾은 그 웃음을 나는 기억한다. 이 자유 속에서 대화는 더 오갔다. 사실 약간 꼰대 같은 모습이 서려있었지만 그분의 자유와 고민은 그 세월조차 ‘꼰대’가 아니라 고난이나 갈등으로 보이게 해 줌이 사실이었다. 여사님은 세월보다 훨씬 늙지 않은 어른이었고, 더 자유로웠고, 순수한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이 분이 느꼈던 압박감 그리고 그 댓글을 단 사람들의 근거는 뭐였을까. 유교 파트에서 다루고 싶은 부분은 다름 아닌 이 부분이다. “이 때는 이래야 해. 저 때는 저래야 해. 그래야 튀지 않아. 공격받지 않아. 미움 사지 않아.” 60대엔 이래야 해. 70대엔 이래야 해.라고 말하는 분들의 이야기에 섞인 감정을 잘 살펴보면 사실 나는 큰 악감정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말들이 올바르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거기엔 약간의 패배주의와 오지랖이 깔려있다고 나는 느껴진다. 실제로 튀는 사람들 봤을 때 그들은 ‘다름’이 아니라 틀림으로 무리에서 배제되고, 끼지도 못하는 모습을 그들은 보았을 것이다. 낯섦을 흥미가 아닌 틀림으로, 낯섦과 낯섦을 맞춰가는 건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으므로 그들은 오지랖을 부렸을 것이다. 자기도 살아봤는데 상처를 받지 않았으면 하는 그런 묘한 사랑이 뒤섞여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혐오와 사랑 어딘가를 교차 지르는 말이 나는 더 어렵다. 얼굴을 붉히며 총을 들이대며 하는 혐오가 아니라, 흑인이나 아시아사람은 어떤 직종에서 배제되어야 한다!는 강한 어투의 혐오가 아니라, 굳이 굳이 서양으로 찾아 말하자면 뉴욕에서 무단횡단자들을 랜덤으로 잡아 벌금을 묻게 했는데, 그 비율이 우연찮게도 흑인과 히스패닉의 비율이 높아 곤란하다는 그런 묘한 혐오와 사랑이 섞여있는 것만 같다. 우연찮게 흑인과 히스패닉이 섞였지만 결국 무단횡단을 잡는 건 당연한 일이라는 그 묘함이 섞여있는 것만 같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정체성의 혼란을 명확하게 타깃해 비판하지 못했었다. 횡단보도엔 언제나 다인종이 있었으니까. 실제로도 이 배제는 직간접적으로 일어나기도 하니까.


이 혐오를 만드는 원인 중 하나를 나는 유교 혹은 집단주의로 정의한다. 굳이 믿음이나 서구적인 표현으로 하자면 이 나이에는, 이 집단에서는 우리가 문화적으로 정한 어떤 것을 해야 하며 , 여기서 벗어나면 페널티가 ‘꽤 클 거다’라는 믿음. 그냥 내 표현대로 하자면, 순리를 떠나고 집단의 질서 같은 것을 어기면 차별받는 게 맞다는 믿음. 대표가 된 사람은 나름 이유가 있을 거니까, 무리가 이렇게 된 것엔 이유가 있을 테니 일단 따르라는 믿음. 더 나아가 우리는 하나라는 믿음. 우리가 아니면 너는 적이니 다르게 대해도 이상하지 않다는 믿음. 혹은 그런 진실.


조금 어렵다면 서양과 비교를 해보고 싶다. 유교, 불교. 도교(도가) 등 그러니까 우리가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어떤 ‘동양적인 종교성’은 방향이나 목적이 뚜렷하진 않다. 굿을 요청할 때 ‘굿을 하면 주가가 15% 오르고, 기업에는 좋은 인력이 20명 정도 더 상승 예정이니 해봐야지’라고 하는 사람은 없다. 좋은 것이 좋은 것이니 따르자-라던가 당신의 마음을 좋게 만들면 편해진다는 게 동양의 바이브 같다. 심지어 굿을 하는 이유도 더 잘되기 위함보단 잘 살다가 답답하고 막히는 것이 있어서 하는 경우가 대다수니, 동양은 자족, 현재, 집단등의 바이브에 좀 더 초점이 있다. 그러나 서양문화나 철학은 다르다. 종교적인 측면에서 조차 신에게 기도하면-이뤄진다라던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방식 역시 인풋과 아웃풋을 따르는 구도다. 성경이나 그리스 로마의 서술조차 ‘나 지금 평안하게 살고 싶어요-‘ 하는 태평성대의 꿈을 가정하는 경우는 드물다. 무엇을 바꾸고, 무엇을 개선하고, 어떻게 나아가고-하는 게 그들의 서술과 방향이다.


마찬가지로 동양에서 삶을 대하는 태도나 운명을 대하는 태도 혹은 ‘그럴 팔자로 태어나서 그래요 뭐~’에서 오는 안도감이 오는 이유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내 생각에 동양은 자신의 마음을 마음껏 불태워 앞으로 나아가고, 삶과 상황을 혁신하고, 무언가를 열심히 바꾸려는 태도가 적다. 그렇다면 반론이 생긴다. 한국이 일으킨 한강의 기적과 촛불집회, 시민혁명등은 어떻게 해석할 수 있나.


나는 이 역시 “이건 아니지!” 혹은 “모두가 하니까”등의 집단주의적인 성격으로 해석한다. 아 너무 이야기가 진지해지는 거 같으니까, 조금 쉽게 말하면 이런 거다. ‘가족을 지켜야 하니까’ ‘나라를 지켜야 하니까’ ‘우리는 같은 공동체니까’ 같은 동기에서 우리의 많은 일들, 사건들, 이야기들이 일어난다. 개발 도상국이니 KPI를 설정하고, 동양을 모두 정복하여 동아시아의 모든 땅을 먹자는 강렬한 지배자 욕망은 한국에 크지 않다. 오히려 가족, 공동체, 집단이 하니 따르는 열망이 나는 더 크게 느껴진다. 곧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하자는 느낌이 더 강하다는 소리다.


내가 볼 때는 한국에서 만큼은 신파도, 설득도, 이야기도 대부분 이 감수성에 근거한다. 조금 극단적으로 말한 경향성이 없지 않지만, 우리를 울리고 웃기는 일들, 우리를 (좋게든 안 좋게든) 변혁시키는 일들, 6월 혁명과 광주, 탄핵부터 ‘아무튼 선진국이 되려면 우리 모두가 힘내야 마땅하다’는 일념아래 희생당한 수많은 전태일들까지 곧 우리의 깊은 감수성이 나는 집단주의 속에서 일어난다고 본다.


뻔한 레퍼런스지만 효녀 심청과 구국의 영웅 이순신을 보면 서양 사람들이 못 느끼는 어떤 묘한 감수성을 한국 혹은 동양은 느낄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국가와 가족을 위해, 대표도 하지 못하는 것을 말단 직원이 대표보다 더 큰 희생을 할 때 느끼는 그 쾌감이 그 예시다. 집단을 대표하는 아빠와 임금이 희생해야 하지만, 힘도 적을 거 같은 아래 직원이 모두를 위해 죽는 이 서사 역시 여러 의미로 K-스럽다고 난 생각한다.


그러므로 내가 남고에서 마크 로스코에게 느낀 감탄과 희열을 던졌을 때 누군가 공격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보호를 그다지 받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각 나라마다 약자가 어떻게 정의되고, 또 어떤 명분으로 공격되는지는 다르지만 최소한 나는 공격받는 게 당연했다. 네가 뭘 아냐며, 그림 좀 볼 줄 아냐며. 그림은 볼 줄 모르지만 ‘나는 이런 걸 느껴서 너무 좋았어-‘라고 해도 말이다.


앞서서 무속을 중심으로 유교의 집단주의를 말했다면, 이번엔 유교의 집단주의를 중심으로 내 무속적인 정체성 혼란(우선은 유교와 무속의 혼란)을 말해보고 싶다. 곧 ‘내가 이상한가?’라고 느꼈던 핀트들을 글자로 파해쳐본다. 이 밑에는 집단주의가 너무 강해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에 대한 사람들과 청소년들의 외모 강박, 어떤 아이템을 사지 않으면 무리에 껴주지 않는 모습과 최소한 사회에 나가려면, 연애를 하려면 ‘~~ 은 해야지’하는 감각과 맞닿아 있다.


또한 내 의견에 대해서는 사실 연구적으로 많은 의견이 존재할 수 있다. 1950년 이후 유교가 말살되었다-라는 의견부터 어떻게 유교와 집단주의를 같은 선상에 놓을 수 있냐는 의견까지 존재할 수 있을 것 같다. 고리타분하다기엔 너무 중요한 논의고, 재미있다고 하기엔 가볍지만은 않은 주제여서 나도 이 주제를 다루고 싶다. 그러나 서술하다시피 지금의 이야기는 내 개인적 경험을 근거로 말하는 정체성 혼란이므로 이해해주십사 한다. 너무 이론적이 되어버렸으니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첫 번째는 콜센터에서 느꼈던 경험이다.


내가 알기론 조선사 500년 역사 중 일부는 무속과 유교의 나름대로 밸런스를 찾아간 역사라고 알고 있다. 이를 짧게 공부한 내 눈에는 집단의 압박이 너무 강력하면 어쩔 수 없이 개인의 답답함이나 분노, 슬픔이 나오고 무당들은 또 집단의 변수를 제거하고 그들이 잘 적응하기 위해 이를 잘 풀어주고 다시 집단 속에 넣는… 그런 역사처럼 보였다. 무튼 이 이야기를 좇아가며 느낀 건 나의 정체성 혼란과 그 흐름이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나의 정체성 혼란은 언제나 밸런스를 찾아가는 일이었다. 스스로도, 주변에서도 묻는 질문은 이런 거였다. ‘그렇게 까지 해야 해?’. ‘그렇게 까지 타인을 챙겨야 해? 일단 너 일을 해’ 여기서 나오는 ‘그렇게 까지’에는 사람이 있었다.



타인의 마음이나 내 마음에 신경을 쓰면 언제나 문제는 일어났다. 특히 일할 때는 더더욱, 그것도 일터가 빡빡하고, 1인분을 해야 하고, 수직적이면 더 잘 드러났다. 이 일은 수직적이고, 하루에 처리할 업무량이 어느 정도 존재하고, 그럼에도 업무량을 달성하려면 열심히 해야 하는 장소 중 하나인 콜센터에서 일어난 일이다.


‘나 정도면 설득 잘하지’ 하며 들어간 콜센터는 거의 30분 만에 나에게 ‘설득 잘한다’라는 자의식을 앗아갔고, 상대방의 고통과 답답함에 수화기가 얼얼해지는 경험을 선사해 줬다. 사람은 자신이 답답하면 상대방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는 단 몇 통화만으로 배웠는데, 이것 말고도 콜센터는 하나의 갈등을 선사해 줬으니 그건 바로 고통집단 사이에서 의사선택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업무를 진행하며 내가 배운 건 분석은 여러 방향에서 하지만 의사결정은 항상 한 방향으로 해야 한다 사실이었는데, 이 경우가 특히 그랬다. 빨리 통화를 하고 할당된 1인분은 채우느냐 아니면 상대방의 답답함과 고통을 무시하지 않을 것인가-를 나는 매 통화마다 선택해야 했다. 하필 패딩과 등산옷을 판매하는 업체였던 그곳은 겨울이 성수기였는데, 내가 들어간 시간은 10월이었으니 성수기에 맞춰서 들어간 나의 의사결정은 평균 80통의 전화 이상으로 매일 선택의 연속이었으므로 나에게는 매일매일 고통이냐 집단이냐의 선택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로 인해 내가 콜센터에서 마음속으로 가장 많이 반복한 문장은 ‘아 이 말하면… 통화 백 프로 길어지는데…’였다. 저 말은 가끔은 입 속을, 가끔은 마음에서 반복되어 울렸다. 빗발치는 전화와 그래도 1인분은 해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나는 전화를 건 고객의 답답함을 저울질했다. 가끔은 길어짐을 감수하고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반면, 가끔은 냉철하게 내 할 말을 전했다. 이렇게 저렇게 해결하면 된다고. 저희는 여기까지 밖에 못 해드리고, 해결 못 해준다고. 나의 퇴근 시간과 어느 정도 할당된 콜수를 확인하면서 말이다.


다행히 콜센터의 룰은 콜 수를 채우지 못하면 퇴근을 못한다던가 아니면 특정 콜수를 채우지 못하면 월급에서 제외하는 방식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1인분은 해야 한다는 눈치와 그날 최대 콜 수를 채우면 월급을 더 주는 등의 성적은 여전히 존재했다. 경영적으로도 어느 정도 그게 맞다고 난 생각하지만, 그리고 성향상 1등과 인정을 꽤 좋아하지만 나에게 언제나 걸리는 건 상대방들의 고통이나 답답함이었다.


‘내가 이상한가?’는 여기서 발생했다. 매 번. 아무리 생각해도 저 사람은 억울하다는 생각 속에서 나는 빠르게 처리할 수 있는 문의는 빠르게 해결하고, 남는 시간으로 좀 더 억울하거나 답답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데 썼다.. 어떻게든 1인분을 지키면서도 내가 마음에 걸리는 죄책감을 해결하는 게 내가 찾을 수 있는 최선이었다. 물론 무속과 유교의 밸런스를 계속 재고 재던 조선 왕조 500년 사에 비하면 그 치열함은 적지만, 내 마음속에선 최소 5000번 이상의 선택이 이어졌으니 나름 치열한 시간과 싸움이 이어졌다.


물론 고객의 답답함이 마음속에 걸리는지 그리고 1인분을 하는 게 당연한데 왜 이 고민을 하는지 묻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 시선이 바로 나에게 ‘내가 이상한가?’라는 질문을 항상 낳게 해 준 시선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럼에도 답답함을 해결해 줬다는 감정이 나에겐 굳이 말하면 보상이자 행복이었다. 그래서 나는 빠르게 업무를 처리했고, 그다음 남는 시간을 잘 써 답답하고 억울한 고객의 마음을 풀어주는 데 사용했다. 즉, 빠르게 업무를 처리하고는 ‘1인분도 하는 것’이 비난을 돌파하는 방식이었다.


물론 착한 아이 콤플렉스인가- 고민한 적도 많았다. 오히려 하지만 화가 나는 상황에서는 나는 나를 잘 방어했던 것 같다. 상대도 내가 말을 잘한다고 생각했는지, 나에게는 비난이나 비아냥, 상처되는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리고 상대가 욕을 하면 나도 진지하게 대응하며, 그를 정신 차리게 만들었던 기억이 난다. “고객님 욕은 하면 안 되시고요” 라든가 “고객님 일단 진정하시고요” 등의 방어멘트를 치기도 했고, 때로는 고객과 정면으로 싸우기도 했다. 올바른 일에는 최대한 올바르게 말하는 것과 동시에, 나는 직업은 상대방에게 하대 당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요청을 해결해 주는 직업이었으므로 나는 하대당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므로 콜센터 노동자에 대한 하대가 많은 상황에 나는 내 마음을 굳건히 먹고 싸우는 적도 많았다.


또한 심리학적인 문제가 있는 건 아닌가 싶기도 했다. 남을 돕고, 상대를 이해하여 나의 자존감을 채우는 “경계성 성격장애”는 아닐까 의심하기도 했다. 물론 이 설명이 꽤 와닿아 관련 논문을 최대한 복사한 뒤 읽어본 적도 있었는데, 결국 마음을 완벽히 설명해 내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이 무수한 노력을 하고 나에게 와닿는 설명은 오히려 이런 표현이었다. ‘내 팔자가 이렇지’. 서양의 언어로 굳이 표현하자면 소명이라던가, 기질이란 단어가 나에겐 맞았고, 나를 이렇게 껴앉아주니 오히려 그제야 경제, 1인분, 전략등을 쌓아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정체성에 대한 혼란은 존재했다. 이는 단순 사무적이고, 업무적인 부분이었으므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장 주요한 주제, 사랑과 가족이 남아있었다. 먼저는 사랑 이야기였다.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서도 동정심 때문에 인생을 망쳤다고 생각하는 분이 계실까. 사실 나도 그렇… 다고 말할 순 없겠다. 왜냐면 망쳤다고 말하기엔, 나는 내 감정에 솔직했던 것 같다. 주변에서도, 스스로에게서도 물어봤던 그 질문이 있었다. ‘상대의 연민에 의해 힘들어하는 내가… 과연 이상한 걸까. 잘못된 걸까.’라는 질문이었다.


물론 그간 시간과 애정을 쏟은 이들에게 있어서 내가 ‘좋은 사람’ 이 되려는 욕망이 없었을까- 물어본다면 나는 있었다고 생각한다. 좀 더 심리학 용어를 써보자면 구원자 콤플렉스, 그러니까 상대방의 힘든 부분을 도와줘서 구원자만큼 좋은 사람이 되려는 마음이 없었을까-물어본다면 없지는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솔직히 말하건대 서양의 언어로 말하자면 조금은 구원자 콤플렉스에 조금은 경향성이 있고, 그 사람의 아픔이 밟혔을 수 있고, 내가 겪은 아픔이 그 사람에게 보였다고 말해도 나는 할 말이 많이 없었다. 어려운 말로 내 고통을 투사(projection) 했다고 해도 할 말이 없고.


하지만 동양적으로 볼 때, 특히 무속적으로 볼 때 나는 그게 편했다. 그게 팔자였고. 아픈 사람 보면 몸과 성이 나가고, 도와줘야 성이 풀리고, 몸을 날려야 했다. 오히려 상대에게 기우는 마음을 그런 마음을 컨트롤하지 못해 잔뜩 긴장해서 ‘불쌍한 사람이 나타나면 어떻게 하지’ 고민하거나, ‘나만의 철칙을 세워야겠어’라며 철학과 고민을 지속하는 그런 사람이 그게 나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그 사람이 나를 ‘구원자’보다는 친구로 봐주길 원했다는 점에서 구원자 콤플렉스와 꽤 거리가 멀었지만 그럼에도 사랑의 영역은 조금 독특한 형태로 흘러갔던 것 같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 중 한 명은 누가 봐도 괜찮은 사람, 전혀 문제가 없어 보이는 사람, 그렇지만 내 눈에는 상처와 아픔이 보이는 사람이었는데, 이로 인해 나에겐 나라도 알아줘야 할 것 같은 사람으로 보였다. 말끔한 그 사람의 모양이 나에겐 이지러져 보였으므로 나에게 사랑은 곧, 약함의 편에 서주는 일이었다.


나 스스로 내가 특별해지고 싶은가 혹은 내가 이 사람을 치유했다거나 약점을 알았다는 사실로 특별함을 채우는가- 물어봤던 적이 있다. 하지만 내가 반응하는 건 그 사람이 과거의 트라우마에서 해방될 때 표정이나 언어들이었음을 고백한다. 그 사람이 트라우마나 답답함이 풀어져 그제야 ‘나는 이렇게 생각해!’ 나 ‘나는 이렇게 느꼈어!’라고 말할 때, 자신을 괴롭히던 관계나 가족이나 과거들로부터 해방되어 곧이어 흐름 속에서 춤을 출 때 나는 언제나 행복했다. 그 해방감을 느끼고 되려 ‘아 얘는 이용가치가 없다’ 던가, 바로 집단주의에 귀속되어 ‘이제 난 격이 안 맞네’라고 느끼고는 그제야 나에게서 떠나가도 말이다.


누군가 나를 볼 때 ‘너를 이용한 거야’라고 말할 수도 있고, 나 역시 이용당했다고 느껴 상처로 마음이 힘들어할 때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 시간들이 어느 정도는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여기서도 ‘내가 이상한가?’싶은 부분들이 있었다. 그 친구들에게 애정과 사랑을 더할 때 주변에서도, 내 안에서도 ‘이제 이런 만남을 그만하고, 정상적인 사람을 만나 행복하게 결혼해야지.’ 라든가 ‘돈 모아서 결혼해야지’라는 이야기가 올라올 때 나는 나 스스로를 의심하고 혼란했던 것이 사실이다. 남을 도와주고, 마음이 힘든 사람을 사랑할 때 ‘나는 도대체 어디 쪽에 서 있지?’라는 질문이 항상 따라다녔다.


한국의, 인생에서 주어진 압박감, 곧 그래도 이땐 결혼해야지-라는 이야기나 정상적인 사람과 잘 연애하고 너도 고통 그만 받아야 한다는, 돈 열심히 벌어서 가정을 꾸려야 한다는 그런 말들이 나를 괴롭혔다. 말로 꺼내진 않지만 그런 평가들이 나에게도 엉겨 붙었다. 스스로 그리고 바깥에서. 마치 13시간을 내달려와 카카오스토리 댓글로 붙는 그 오지랖처럼 마음속에 댓글로 자리했다. 나는 내 감수성과 집단주의 속에서 선택해야만 했다. 고통받은 사람의 전화를 받았으나 너무나 바쁜 상황에 어찌할지 모르는 콜센터 직원처럼 말이다.


우선 이 혼란 속에서 내가 내린 결론을 말하자면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은 감당하지 않는다’가 결론이었다. 비유하자면, 무당들이 자신보다 더 큰 문제나 귀신을 보면 굿을 포기 않는 것과 같았는데, 쉽게 말하면 나 역시도 겸손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때는 몰랐었다. 지금이야 나는 어떻게 주고받아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지 어느 정도 알았지만 당시 나의 정체성은 혼란의 연속이었다. 콜센터 전화야 어떻게든 길어도 1시간이면 됐지만 그 사람이 꾸준히 쌓아온 고통은 보이고, 나는 약하고, 사랑은 주고 싶다는 그 마음속에서 나는 도대체 머리가 아팠다.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고통은 몇십 년간 누군가에 의해 반복되고 축적되어 쌓이고, 매 번 반복되고 있었으므로 아무리 내가 발버둥 쳐도 변화시킬 수 있는 건 한계가 있었다. 아무리 옆에서 지지하고 응원한다고 해도 본인의 노력과 의지가 없었다면 변하기란 쉽지 않았다. 본인이 해결할 수 있었다면 이미 해결했을 상황에서 한 사람의 도움으로 층층이 쌓인 아픔을 걷어내기란 쉽지 않았다.


물론 좋은 친구들도 얻었다. 사랑의 모양은 단순히 연애만 있던 건 아니었다. 어쩌다 보니 책모임의 장을 맡았던 적이 있었는데, 같이 글을 써서 돌려 읽고 평가해 주는 모임에서 타인의 답답함을 인지하고 푸는 능력은 빛을 발했다. 이건 이전의 상황과는 조금 달랐는데, 그건 다름 아닌 대표성을 띄기 때문이었다. 집단주의에서 대표가 되고, 문화를 만들 수 있는 힘을 가졌다는 건 콜센터와는 조금 다른 양상으로 이끌 수 있다는 사실을 뜻했다.


나는 책모임을 운영하며 써진 글 속에서 언어 속에 묻혀있는 진짜 하고 싶은 말을 찾아주고, “사실 00님은 이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닐까요?”라고 했을 때, 비로소 자신의 언어와 만나는 그 순간들이 있었다. 그 순간들이 모여서 자신과 화해를 이루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고, 그들은 표정이 밝아졌고, 마음이 종종 자유로워졌다. 신기할 정도로. 이들 중 몇 명은 나와 꽤 오랜 친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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