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삶의 예시들이 있으니 나는 무속 팔자대로 태어났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하긴 야, 7살 때쯤 장래 희망을 적은 기록을 보면, “몸이 아픈 사람들을 위해 기계를 만드는 공학박사가 되고 싶다”라고 적은 걸 보면 이 감수성은 어렸을 때부터 존재했었던 것 같다. 그럼 지금까지 집단주의와 무속의 혼란을 정리해 본다.
지금 나는 세 가지 케이스를 들었다.
1_ 문제 : 집단주의가 강할 때, 어떻게 나만의 무속적인(감수성) 정체성을 잘 맞춰갈 것인가.
=> 현실 : 콜센터에서 1인분은 필수인데 그럼에도 내 마음에 걸리는 사람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 결론 : 집단의 룰에 따라 1인분만 하고, 남는 시간이나 에너지로 마음에 걸리는 사람을 돕는다.
2_ 문제 : 마음에 걸리는 사람이 크거나 많을 경우 어떻게 할 것인가.
=> 현실 : 나보다 더 힘든 사람이나 상황은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 결론 :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은 어느 정도 겸손하게 대한다. 할 수 있는 만큼만.
3_ 문제 : 집단주의 ‘안’이 아닌, 대표의 위치에서 어떻게 답답함을 해결해 줄 것인가.
=> 현실 : 글쓰기 모임의 장은 사람들의 상처나 답답함을 볼 때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 결론 : 조심스럽게 그 사람의 마음을 꺼내고 답답함을 알아주고 해결해 준다.
개인적으로 맘에 들었던 건 서술하다시피 3번의 결론이다. 친구들을 얻고, 친구들을 얻지 않더라도 평등한 관계에서 피드백을 하고, 또 그 사람들도 행복해하는 결과들이 정말 많았다. 반대로 애매했던 건 1번이었다. 고객들은 행복해하고 기뻐했으나, 자칫 잘못하면 1인분을 할 수 없어 내가 페널티를 껴앉게 될 가능성도 있었다. 반대로 내가 진심과 최선을 다했다고 하더라도, 나 개인에게 덕이 되는 건 없었다. 물론 가장 나빴던 케이스는 2번이다. 마음에 걸리는 사람의 답답함이나 상처가 너무 크면 나까지 잡아먹혀버렸다.
이 중 1번, 그러니까 콜센터를 끝내고 했던 상상 중 하나는 이 것이었다. 내가 다녔던 콜센터 회사에서 타인에 대한 환대와 진심이 고평가 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라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얻은 결론은 대표의 방향이 올바르고 집단의 룰이 좋은 곳이라면 환대나 진심을 더하려는 사람들이 더 빛날 수도 있겠단 결론이었는데, 물론 경영이나 경제적인 논리에서 많은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꽤 나쁘지 않은 결과가 따라올 것 같았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직원들의 희생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친절과 서비스를 고평가 해주고 상을 주는 대표가 있다-는 상상을 해보면 그 기업은 못되진 않겠다-라는 추측 같은 것. 그러므로 난 어떤 조직에 있느냐가 생각보다 중요했다. 즉, 나의 희생과 진심을 알아줄 조직(대표)이나 친구를 두는 것이 중요했다. 하지만 가장 아쉽게도 가장 가까운 가정에서 집단주의 속 희생의 당연함과 마음에 걸리는 사람이 내 능력보다 큰 케이스가 만나버렸다. 아빠였다.
차라리 내가 신기를 타고나지 않았다면, 어떤 촉이라던가 트라우마를 보는 능력이 적었다고 한다면 아빠랑 대판 싸우고 화해하는 편이 아빠에게도 나에게도 나았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왜 그런 사람들이 있지 않나. 전날 대판 싸우고도 다음날 아빠와 같이 밥을 먹을 수 있는 사람들. 나는 그 사람들이 어지간히 부러웠다. 다음 날 같이 밥을 먹으면 차라리 맞고 틀리고를 간단하게 결정한 채, 내 일에 집중할 수 있었을지도 몰랐으니까. 물론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어떤 의미로든지 간에 아빠의 트라우마나 답답함이 결국 내 감수성에 영향을 끼쳐, 내 일에 집중은 할 수 없었다고 생각하지만 그 부러움의 핵심엔 언제나 아빠문제가 있었다.
아빠는 마음이 힘든 사람이었다. 어떤 연유로 그는 꽤 오랜 시간 동안 힘든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땐 그랬지-하며 원래 70-80년대는 그랬다는 마음으로 자신의 올라오는 부당함과 분노를 억누르곤 했지만, 아들의 눈을 속이기란 쉽지 않았다. 아들은 그 억눌린 감정을 인지하는 예민한 사람이었다.
애도작업이 제대로 되지 않는 마음은 언제나 삐죽삐죽 올라오는 법. 아쉽게도 그 방향은 나였다. 아빠는 술에 취해 돌아올 때마다 나를 앉혀놓고, (특히 내가 웃거나 행복해 보이면 더더욱) “왜 내 마음을 몰라주냐. 너라도 내 마음을 알아줘야지”라며 내 잠을 깨웠다. 나는 그때만큼은 꽤 지옥이었는데, 행복이 찾아오면 이 행복을 지속할 수 있을 거란 생각보단 분명 밤에 행복을 빼앗길 거란 생각에 행복을 유지할 수 없는 상태가 됐다. 마치 통장에 돈이 들어올 때마다 0원이 되는 게 아니라, - 10000원, -20000원이 찍히면 노동의욕을 잃는 사람처럼 나의 행복은 언제나 쌓이지 못했고, 웃음이 있는 날마다 박탈당했다. 그렇게 나는 나의 행복을 선택하고 받아들일 선택권을 잃어버렸다.
언젠가 친구… 라기엔 조금 못된 아이가 나에게 아빠와의 이 이야기를 듣고선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결국… 너 용기가 없어서 아빠를 못 죽인 거 아냐? 용기가 없어서 막말도 못하고 그런 거잖아”라는 꽤 신기한 말을 던진 적이 있었다. 난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분노보단 ’ 얜 어떤 맥락에서 이런 이야기를 할까?’라는 순수한 호기심이 더 컸는데, 다름 아닌 그 친구에게 이와 같은 말을 삼켰기 때문이었다. ‘난 용기를 냈다면 진작 냈을 거 같아. 그런데 아빠의 고통을 무시는 할 수 없었어’
항상 내 탓을 하는 아빠 앞에서, 나는 지금 돌이켜보면 아빠가 부끄럽지 않았다. 이겨내지 못했다고 비난하고 싶지도 않았다. 물론 내 마음이 무너져 내리고, 결국 그의 아픔이 내 인생 전반을 어느 정도 망가뜨린 건 밉지만, 그가 가장으로서 약해 보인다거나 작아 보이진 않았다. 오히려, 오히려 나에게 보였던 건 그가 술을 먹었을 때만 보이던 마치 화가 프란시스 베이컨이 그린 그림에서나 볼 수 있었던 고통에 일그러진 표정과 아픔이었다.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아왔길래 저 자는, 저 고통을 감당하고서 저렇게 버틸 수 있나. 남 탓을 해야만 살아갈 수 있나- 싶은 그런 아픔이 나에게 맞닿았다. 그러므로 나는 “네가 나에 대해 뭘 아니. 네가 내 마음을 알아줄 수 있겠니.”라는 약 20년간의 술주정을 주 2-3회 들을 때마다, 매 순간 내 안에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라는 마음이 일었다. 하지만 이 말을 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도저히 어린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상처도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견딘 상처나 아픔을 견딜 수 없었다. 그건 이미 7-8살 때부터 알던 사실이었다. 하긴 야 20-30년간 쌓아온 한 사람의 상처를 7-8살 먹은 아이가 견딜 수 있다는 게 말이 되는가- 싶기도 한데, 그땐 더 몸으로, 삶으로 느껴졌던 것 같다. 여기서 내가 이 사람의 상처를 안다고 한다면 더 큰 아픔을 난 마주해야 한다고, 아니 난 그 정도의 살풀이 능력이나 위로의 역량이 없다고, 그러나 언젠가 이 문제를 꼭 해결해 보고 싶다고, 이건 아빠여서가 아니라 한 사람의 상처를 치유해보고 싶은 내 마음이라고- 이런 마음이 생겼던 것 같다.
지금 돌이켜보면 철학을 열심히 배운 이유 중 하나도, 심리학이나 정신분석을 배웠던 이유 중 하나도 아빠를 빼놓을 수 없다고 나는 인정한다. 그러므로 나는 꾸준히 상처를 받았음에도, 기회가 되면 아빠와 어떻게든 화해하려고 시도하고 노력했다. 오히려 나에게 이상하고 답답했던 말은 엄마가 해줬던 ‘아빠니까 이해해 줘’였다. 난 아빠니까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한 사람으로서 이해하고 싶었다.
이 사례를 드는 이유가 다름 아닌, ‘집단주의’가 강하게 영향을 끼치는 집단은 가정이기 때문이다. 무속과 유교 혹은 집단주의의 가장 큰 충돌은 여기서 일어나기도 했다. 집단주의는 집단의 대표를 존중하고, 구성원의 희생을 당연시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를 가정으로 옮기면 “아빠니까 곧 아들이 이해하고 넘어가는 것”으로 변했다. 여기서 아빠(대표)는 여기 큰 죄책감을 느끼진 않는 것이 당연했는데 즉, 대표(집단)의 방향성이 나의 감수성을 당연시 여기는 케이스가 여기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감당해야 할, 마음에 걸리는 사람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아픔보다 훨씬 큰 사람이 바로 가까이 있었다는 점이었다. 나의 가장 큰 혼란 중 하나는 이 지점이었다. 아빠니까 이해해야 하는 집단의 영역, 아빠를 존중하지 않는 패륜의 영역(지금은 많이 인식이 개선됐지만)이 집단주의의 편에 있었으나 감수성(무속)적인 영역에선 나는 아빠로 써가 아니라 사람으로서 이해하고 싶은 부분이 있었다. 그렇게 나는 가장 집단주의의 힘이 강력한, 개인에게도 힘이 강력한 영역에서 이 두 가지 정체성이 충돌을 일으켰다.
사실 여기서 해답을 찾아준 건 이후 등장할 서양철학 그리고 약간의 경제논리였지만 그전까지 나는 계속해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어야만 했다. 아빠로서의 도의와 감수성의 문제는 꽤 혼란을 주기 충분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엄마 역시, “아빠니까 참아-“가 아니라 “마음에 아픈 거 이해해 보자-“라고 말한 것 같지만 당시 나에게 그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으므로 나는 엄마와 충돌도 겪고, 내 마음의 충돌도 겪으며 초, 중, 고등학교 심지어 대학교 생활도 보냈다.
물론 내가 왜 그렇게 이해하려고 했는지를 생각해 보면 “아빠였기 때문이다-“라는 집단주의적인 부분이 없진 않은 것 같다. 그럼에도 가정을 먹여 살리고, 책임감을 가지고 가정을 이끈다는 건 쉽지 않은 일임을 나는 알았다. 그리고 어쨌든 간, 밥을 굶는다던가, 옷이 찢어진다는 등의 유년시절을 보내지 않았단 것에 대한 감사가 있기도 했었다. 뿐만 아니라 고3이 끝났을 때 일본 여행을 갈 정도의 어느 정도의 돈, 항상 돈이 없다고 하면서도 주던 용돈등은 무시할 수 없던 부분이었다.
아빠 역시 아빠로 존중받기를 원했다. 정확히는 본인도 사회에서 그게 맞다-고 교육을 받은 것 같았다. 하지만 트라우마와 맞지 않은 언어는 그를 엮고 있었고, 그로 인해 자신의 답답함을 알아달라는 마음 혹은 아빠로 무시당했다고 버튼이 눌리면 술을 먹지 않아도 그는 분노했다. 내가 먹여 살렸으니 나의 말을 들어주고, 너의 희생은 당연하다는 집단주의 그리고 역설적으로 거기서 발생하는 먹여 살려야 한다는 책임감과 중압감, 그 사이에서 그는 계속 길을 찾았다가 잃기를 반복했다. 혼란을 겪은 건 그뿐만 아니었다. 혼란 속에서 희생되는 건 언제나 약자, 특히 감수성이 예민한 약자였으므로 나는 그 혼란 속에서 같이 흔들렸다.
차라리 아빠가 “나 너무 힘들어. 과거가 너무 힘들었어. 지금도 너무 힘들어.”라고 말했다면, 엄마와 나는 열과 성을 다해 아빠를 위로해 줬을 것 같다. 트라우마를 정면으로 받아내는 건 어렵지만, 그가 소분해서 주면 나도 위로하는 방법을 자연스레 길렀을 것이고, 엄마도 잘 받아줬으리라고 생각한다. 또한 군자는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더라도 성내지 않는 법(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혹은 군자의 복수는 10년이 걸려도 늦지 않는 법(君子報仇 十年不晩)이라는 말이 있듯이, 큰 답답함을 조금씩 잘라서 이해한다거나- 자신의 감정을 잘 다스리고 함께 그리고 천천히 갔다면 조금 방향이 달랐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