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련소에서 처음 전화 시간을 부여받은 친구들의 반응속도를 안다. “00분대 전화 시작”이라고 방송이 나오자 우사인볼트처럼 뛰어 나가는 사람들. 1분 1초를 아끼려 누구보다 빠르게 뛰어나가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체벌과 긴장은 사람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자유와 연결되는 기분은 얼마나 사람을 상시 키는가를 떠올리게 한다. 그 간절한 시간이 나 역시도 이 상황을 해결할 빛처럼 느껴졌다. 열심히 뛰어가서 전화를 건 것은 다름 아닌 아는 형이었다. 엄마보다, 아빠보다 친구보다 나는 임상심리학 대학원생 친구에게 어떻게든 전화를 연결시키려고 노력했다.
친한 형에게 전화번호를 받은 나는 친구에게 건 첫 번째 전화를 실패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두 번째 전화 시간을 부여받았고, 전화기의 신호음이 4번 정도 지났고, 주변은 고요했고, 이윽고 통화가 연결됐다. 가장 긴장된 상황에서 가장 침착해지는 나의 마음이 하나씩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지금 나와 같이 생활하는 사람은 이러이러한 증상을 가졌는데, 왠지 아스퍼거 증상을 가진 친구 같고, 잘 대해주고 싶다고.
심리학 대학원을 다니는 그 친구와 전화를 못할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그 친구 나름대로 당황했을 거라 생각한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를 받았더니 군대였고, 군대에 간 친구가 상황설명을 하는데 부탁하는 건 아스퍼거의 증상을 가지는 친구를 어떻게 대해줘야 할지-라니. 정말 다행이었던 건 그 친구도 아스퍼거에 대한 관심이 있어 공부를 어느 정도 진행한 상태였다는 사실이다. 짧다면 짧은 5분의 시간 동안 열심히 그 친구의 이야기들을 메모로 받아 적었다. 그렇게 5분이 끝났고, 아쉬움을 남긴 채로 전화를 끝냈다.
그 통화를 하고 나서 5년이 지났음에도 아직도 내 몸에 남아있는 건 두 가지 말이다. 하나는 “너도 잘 대해주겠지만…”이라는 신뢰의 단어. 그 친구는 나에게 뭘 믿고 그런 말을 남겼을까. 지나가는 말로 했다기엔, 그 친구도 B친구의 증상의 심각성이나 고통을 전달받은 상태였으므로 나에게 두터운 신뢰를 준 것이 사실이었다. 아직 아스퍼거 친구를 대하는 방식에 대한 지식을 설명해 주기 전에 ‘잘 대해주겠다-‘라고 믿음을 보내는 마음. 그 마음은 나의 마음에도 정확히 꽂혀 약 5년이 지난 지금도 마음에 생생히 들린다.
두 번째는 이론에 관련된 말이었다. “그들도 표현을 안 할 뿐. 상처를 받고, 심지어 상처를 더 잘 느끼기도 해.” 그 이야기는 나에게 두 가지 의미로 다가왔다. 첫 번째, 내가 직감적으로 느꼈던 그 친구의 서운한 표정과 자신도 답답한 표정이 맞았다는 것. 두 번째, 더 적게 상처받을 수 있도록 상황을 바꿔야겠다는 것. 무게 중심이 집단도 아니고, 그 사람의 답답한 감수성도 아니니 목표가 좀 더 확실해지는 방법이었다.
이는 집단 중 한 명, 곧 약자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깍두기’나 회색인간으로 대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그저 그 사람의 약함이나 답답함 등 감정의 차원으로만 접근하는 것이 아닌 제3의 방법이었다. 사람들이 그간 아스퍼거인 사람들을 대한 경험을 기반으로 그 사람을 정의하고(정확히는 이해하고),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듣고, 정확히 대해주는 방법이 내가 선택한 제3의 방법이었다. 그리고 그 정확히 방법은 다른 부분보다 ‘혐오받지 않게 만드는 것’을 향하고 있었다.
만약 나에게 돌아온 정보가 “이 증상을 가진 사람들은 혐오를 잘 느끼지 못해. 대신 화를 내서 정확하게 해야 할 바를 전달해 주는 게 중요해”라고 했다면, 나는 방향을 틀어 모두에게 ‘정확하게 말해줍시다’라고 말했을 것 같다. 만약 나에게 돌아온 정보가 “이 증상을 가진 사람들은 세심한 챙김과 행복한 표정, 사랑의 전달이 필요해.”라고 한다면 나는 그대로 행했을 것 같다.
여전히 상황이 크게 변하진 않았을 수 있겠지만 B친구를 가장 효율적으로 대해줄 수 있었다. 최소한 나와 주변 친구들은 답답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B친구를 대하는 방식은 이런 거다. 이 친구가 말을 못 하고 좀 답답할 수 있어도, 우리가 잘 대해주면 따라올 수 있다’라고 설득할 수 있었다. 또 반응이 좋다면 그들의 스트레스도 줄어들고, 집단주의 속 우리 조직도 무사히 훈련을 끝낼 수 있으며, 무엇보다 B친구가 겪어야 할 스트레스나 혐오는 크게 줄 수 있었다.
그런 면에서 상황은 사실 크게 변했다. 특히 B친구의 입장에 생각해 봤을 때 더더욱. B친구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는 방식을 나는 심리학과 대학원생 친구를 통해 대신 전해 들었다. B친구는 자기표현에 서툰 친구며, 표현이 어렵다는 사실을 나는 인식해야 했고, 그러면서도 상대방의 표정이나 감정에 잘 반응한다는 사실을 알았으므로 난 그 친구를 최대한 혐오감 없이 대하기를 노력했다. B친구의 훈련소에서의 시간은 (이 사람이 군대에 왔어야 했는가. 오지 말았어야 했는가-는 논외로 한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조금 더 나아졌을 가능성이 높았다. B친구의 입장에선 사람에 대한 신뢰나 반응들이 달라졌을 가능성이 높고.
집단주의와 나의 무당적인 감수성이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돌파하는 제3의 돌파구가 나에겐 서양철학 혹은 서양의 방식이었다. 통화를 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나대로 B친구의 표정이 내 마음속에 쌓였을 것 같다. B친구 스스로도 답답하지만 상황을 어찌할 수 없는, 그러나 상처받은 어떤 표정들. 반대로 나 역시도 답답했을 것 같다. 집단주의와 B친구에 대한 감수성 아래 나는 갈팡질팡하다 내 기력을 소진했을 것이고, 그리하여 나와 내 주변 친구들에 대한 미안함 역시 앉은 채로 훈련을 마쳤을 것이다.
그렇다고 서양적인 측면 그러니까 근거가 타당하다면 주장할 수 있다는 신념을 앞세워, “지금 이 친구는 아스퍼거 장애를 가지고 있고, 훈련에 참여하기엔 무리입니다. 평등하지 못합니다.”라고 주장해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므로 나에겐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게 만들어준 건 심리학이었다고 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럼 이쯤 돼서 내가 정의하는 서양철학의 정의를 말해보고 싶다. 어떤 맥락으로 쓰는지 말이다.
서양철학-이라고 단어는 썼지만 정확히는 서양적인 인식과 사고 체계를 말한다. 꽤 오래 마음속에 남아있는 비유는 어떤 강의에서 들었던 서양의 세계 인식과 동양의 세계 인식이다. 이 역시 많은 논쟁이 있을 수 있고, 사람들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으며, 모두를 포괄할 수 있진 않지만 나에게 와닿았던 비유라 그 이야기로 설명을 시작해 본다.
강의를 진행하는 교수님께선 “서양 특히 지중해 문명은 무역으로 발달했고, 동아시아 문명은 중앙집권으로 발달했기 때문에 인식하는 방식이 다르다”라고 했다. 그분의 근거는 ‘무역’이라고 함은 형평성이 깨졌을 경우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너와 나의 다름을 전제로 가져가야 하는 반면, 동아시아 문명은 집단과 집단의 싸움 및 중앙집권이 중요했기 때문에 너와 나의 편이나 서열이 중요했다-고 비유했다.
여기서 내가 마음에 들었던 건 ‘너와 나의 다름’이라는 부분이었는데, 앞서 밝혔듯 내가 만났던 서양에서 공부하고 자란 친구들과 동양에서 나고 자란 친구들의 특징이 있다면 바로 “너의 생각은 어때?”라는 질문의 차이였다. 대화를 진행할 때 서로의 다름을 물어보고, 어떤 이슈에 대해 상대방의 의견을 물어보는 서양 친구들과 달리, 동양 친구들과의 대화는 “맞아. 맞아” 혹은 공감 위주의 대화가 주를 차지했다.
조금 더 나아가보자면 회사의 대화들을 예시로 들 수 있다. 우리가 회사에서 사적 대화 혹은 회의가 따분하다던가 조금 답답한 이유를 살펴보면 나는 이 서열문화나 집단문화가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싶다. 상사가 말한 주장이나 이야기에 반박하면 ‘갑분싸’가 되고, “저는 좀 다르게 생각해요”라고 했을 때 은근한 눈치를 보는 문화에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못 하고, 상사의 이야기를 맞다고 손뼉 쳐줘야만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그런데 어느 누가 자신의 이야기를 참고 상사의 이야기를 반복하는 걸 재밌어할까. 즉각적인 보상이 있다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대화는 어느샌가 상사가 ‘나는 옳아’를 반복하는 방식으로 흘러가고, 개인의 의견은 죽고, 그러므로 재미는 없어지는 상황이 발생한다.
강의를 해주신 교수의 말대로 나는 동양은 좀 더 편, 서열등의 집단주의가 강한 반면, 서양은 ‘너와 나의 다름’ 혹은 ‘차이’가 세상을 보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를 내가 경험했던 대화의 차이에서 발견했다. 그런데 여기서 한 발자국만 더 나가보자. 굳이 서양’주의’가 아니라 서양’문화’이란 단어를 선택했을까.
사실 이건 내 애정도 조금 섞여있고, 서양’ 주의’라고 말하기 애매한 부분도 있는 탓에 서양문화라는 단어 쓰기도 했지만, 가장 중요한 건 의견과 사람을 분리하는 방식 때문이다. 조금 어려울 수 있지만 잘 따라와 달라. 내가 느꼈을 때, 동양은 의견과 행동과 ‘편’이 붙어있다고 느낀다. 예를 들어, 극악무도한 범죄가 일어났을 때 내가 “나는 범죄자의 마음이 이해는 가”라고 했을 때, 친구들의 반응 혹은 SNS의 반응은 다음과 같다. “왜? 범죄자 편들어?” 그런데 서양에서 (물론 당연 100%는 아니겠지만) “나는 범죄자의 마음이 이해는 가”라고 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그렇게 격해지지 않는다. 곧 의견 = 편 = 행동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나는 해석한다.
이 차이는 나는 ‘다름에 대한 존중’에서 온다고 본다. 비록 네가 이 사람의 마음은 이해하나 행동을 존중하진 않는구나.라는 행동과 생각에 대한 분리가, 좀 더 디테일하게 말하자면 ‘너는 여기까지는 나와 의견이 같지만, 저기까진 의견이 다르구나’라는 분리가 강하게 일어나는 것 같다. 하지만 ‘편’과 ‘공감’, ‘집단’에 대한 판단이 더 빨라야 하는 한국문화는 반응이 좀 다르다. ‘아 이 사람 결국 범죄자를 이해하니, 다른 편이네’라는 빠른 판단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한국 혹은 동아시아는 이렇게 반응한다. “너의 가족이 당했다면” 혹은 “너의 친구가 당했다면”이라고 바로 집단으로 반격한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이에 대해 장단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대해 설명하려는 건 다름 아닌 인식차이다. 그런데 내 입장에선 이 차이를 좀 더 명확히 만들어주는 건 서양문화의 근간이 되는 서양철학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미안하게도 서양 철학에 대해 조금만 짚고 넘어가 보자. 다름 아니라 ‘여기까지는 동의하지만, 여기까지는 동의하지 못해’ 혹은 ‘마음은 이해는 가지만 행동은 이해가 안 가’라고 좀 더 명확히 나누는 방식은 서양철학에서 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