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세 번째 정체성 - 서양문화(2)

by 시몬 베유

서양철학은 쟤는 뭐지?(존재론), 쟤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지?(인식론), 쟤한테 어떻게 행동해야 하지?(윤리학)의 방식을 따른다. 이걸 자신으로 가져오면 나는 누구지?(존재론), 나를 어떻게 인식해야 하지?(인식론),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지?(윤리학)으로 바뀐다. 혹여 지금 글을 읽고 있는 분이 기독교인이시라면 이런 비유도 와닿을 수 있겠다. 예수는 누구지?(존재론), 예수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지?(인식론), 예수는 어떻게 행동했지? 혹은 예수를 따라 어떻게 행동해야 하지?(윤리학). 여기서 학자마다, 존재론에서 갈릴 수도 있고, 인식론에서 갈릴 수 있고, 윤리학에서 갈릴 수도 있다.


만약 “나는 쟤가 범죄자라는 거 까지 인정해. 근데 이해는 가-“라는 의견과 “나는 쟤가 범죄자라는 거 까지 인정해. 근데 이해도 안 가-“라는 의견이 갈린다면 두 사람은 범죄자라는 사실(존재론)은 동일하나 이해는 가/안가 (인식론) 은 갈리게 된다. 그리고 두 사람 다 범죄 자체가 잘못됐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윤리학까지 동의하는 것이므로,

존재와 윤리는 동일한 의견인데, 그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할 것인가는 의견이 갈린다.


나와 네가 다르다는 관점(교수님의 강의에 의하면 지중해에서 시작된) 그리고 너와 내가 다른 점이 한 영역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영역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는 점. 이 두 가지가 만나 서양에서 교육받은 친구들은 ‘너의 생각이 어때?’라는 존중과 대화가 진행되는 것 같다. 물론 너의 생각뿐만 아니라 나의 감정 역시 마찬가지다. ‘난 이걸 보고 이렇게 느꼈어’라는 표현을 통해 상대방의 감정과 교류하고, 맞는 것을 찾아 공유하고 공감한다. 더 정확한 방식에서 더 정확한 감수성으로.


이를 다루는 독일의 방법은 더 독특하다. 베를린 여행 중 만난 작가님께서는 독일의 교육의 인상적인 부분을 나에게 나눠주셨다. 독일은 어렸을 때부터 ‘우리’라는 단어를 조심히 쓴다고 한다. 그 이유는 히틀러의 프로파간다 때문이라고 하는데, 함부로 동의되지 않은 의견을 ‘우리’로 묶지 않는 조심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치권에서 ‘우리’라는 단어를 쓸 수 있을 때는 합의나 만장일치가 일어났을 때, 서로 의견을 확인하고 사용한다고 했다.


물론 이는 나치를 겪은 독일의 조심스러움이지만 사실 지중해를 근거로 한 이야기나 나치의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도 유럽과 서양의 역사를 보면 다름이 존중이 되기까지 수많은 전쟁과 갈등을 통과한 것도 사실이다. 단순 경제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유럽은 가문과 가문의 싸움, 지역과 지역의 싸움이 많았을 뿐 아니라 현재 설립된 미국조차도 이민, 인종, 이념의 문제로 싸우고, 갈라서고, 목숨을 걸고, 수많은 가족과 아들 딸을 잃었으니 너와 나를 존중하는 문화는 역사 속에서 자연스레 설립되었을 것 같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핀트는 이와 같다. 동양보다 서양의 친구들이 더 쉽게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이고, 조금 다르게 말하자면 자아(에고)를 잘 표출한다는 것이다. 내가 대화해 본 서양 친구들은 대체로 이런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마치 보스턴에서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라고 자연스럽게 말하듯, 타인의 생각을 묻고 타인의 감정을 물었다. 그리고 자신과 다른 의견이나 흥미로운 의견이 나오면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를 물었다. 그렇게 서로의 세계는 확장되고, 자연스럽게 늘어나는 대화들이 생겼다. 무엇보다 다름 속에서 같음을 찾을 때 희열은 덤이었고.


물론 서양인들이 모두 딱딱하다던가 자기 의견을 말하는가.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간이란 호의와 환대를 받고 싶어 하고, 공감과 하나 됨을 경험할 때 안정감과 열정이 두드러진다. 또한 국가마다 나라마다 일체감을 느끼는 정신이나 방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타인에 대한 존중이라는 부분은 큰 차이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공감과 같은 편이 목적인 한국의 대화 속에서는 리액션과 맞다 맞다-라고 하는 것이 좀 더 대화의 배려나 환대라고 느껴졌던 반면, 서양 친구와 대화 속에선 너와 나의 대화를 존중할 때는 상대의 말을 끝까지 듣고, 끊지 않고, 심지어 상대의 말이 끝났음에도 2-3초를 기다려주는 게 환대라고 느껴졌던 점이 그 예시다.


그러므로 다름에 대한 존중, 서로 의견을 낼 수 있는 문화, 각 영역별로 의견이 존재하는 세밀함등을 나는 ‘서양문화(서양철학)’이라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이게 왜 종교인가. 그건 바로 내가 동양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서양문화 혹은 서양철학이 문제를 해결한다-라는건 나의 입장에선 믿음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나는 서양에서 자라지 않았고, 어렸을 적부터 서구 문명을 흡수하지 않았다. 물론 책을 읽을 수 있는 환경에 조금은 다른 교육을 받고 자란 느낌이 있지만 나에게는 무속적인 특성과 집단주의의 압박이 더 강했다. 그러므로 나에게 서양철학의 방식이 더 좋다 혹은 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방식은 어느 정도 믿음에 속한다.


조금 와닿지 않는다면 다시 가정 이야기로 돌아가보고 싶다. 고3 여름방학에 읽은,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이야기다.


방학 때 어떤 책을 읽어야 하냐는 말에, 이방인, 죄와 벌, 좁은 문을 추천해 준 건 다름 아닌 학원의 논술 선생님이었다. 어린이집 교사였던 엄마는 항상 내가 학원에 등록하기 전, 학원 선생님을 미팅해서 학원을 보내곤 했다. 그 판단의 기준은 꽤 깐깐했는데 그저 입시만 하는 학원인 경우에는 보내지 않았던 엄마가 이 학원을 꽤 오래 다니게 하고, 심지어는 동생까지 다니게 한 데는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한다. 가정집을 개조하여 운영했던 학원의 첫 이미지는 태백산맥과 토지가 빼곡히 들어있는 서재였던 그곳에 다니며, 선생님은 고등학교 입시를 근거로(사실 핑계였던 것 같지만) 나에게 한국문학작품들을 거의 통으로 읽게 했다.


삼포 가는 길, 금시조, 운수 좋은 날, 삼대, 사랑손님과 어머니, 꺼삐딴 리, 광장등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나에게도 이 작품들은 충격이 아닐 수가 없었으나, 거기서 날아든 책은 다름 아닌 이방인이었다. 입시와도 상관없는, 그저 “방학 때 어떤 책을 읽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날아든 책.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책으로 인해 나는 철학 관련전공에 진학하게 됐다. 그간 하던 혼란스러운 입시를 고이 접어놓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에게 이방인은 내가 아빠한테 느끼는 분노와 동정은 옳은가-에 대한 해답이었다. 집단주의적 측면에서 나는 아빠에게 화를 느꼈고, 무당적인 감수성에서는 아빠에게 아픔과 슬픔을 느꼈다. 분노와 아픔을 돌아가며 나는 내 기력을 적잖이 소비했는데, 아빠에게 분노 가득한 마음을 유지해야 할지 아니면 슬픔을 어떻게든 풀어내게 끔 지금의 상태를 유지해야 할지 고민 속에 빠져있었다. 그리고 그 중간을 꿰뚫고 이방인의 문장이 벼락처럼 날아들었다. “어느 날 엄마가 죽었다. 어쩌면 어제.”라는 문장이 말이다.


나에게 있어서 이방인은, 특히 이 문장은 이렇게 읽힌다. 엄마의 죽음이라는, 모두가 ‘이럴 때 슬퍼해야 한다’라는 감정적인 암묵적 합의에 있어서 너는 다른 감정을 가질 수 있어’라고. 실제로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는 사람을 쏴서 죽인 죄보다, 엄마의 장례식에서 슬퍼하지 않았다-라는 문제로 기소되는 걸 보면 내 독법은 어느 정도 방향이 맞는 것 같다. 무튼간 내가 이 문장을 맞닿드렸을 때 나에게 드는 마음은 이와 같았다. “아. 아빠를, 아빠를 미워해도 된다. 그건 나쁜 일이 아니다.”


대학교 교정에 들어가 떨리는 마음으로 들어가 입학 축사를 들은 지도 근 10년이 흘렀음에도, 그 당시에는 아빠를 무시하거나 아빠의 행동을 비난하는 건 거의 윤리를 거스르는 행위에 가까웠다. 당시 아빠를 무시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전반적으로 꽤 큰 비난을 얻는 행위에 가까웠다. 이방인의 배경처럼 아빠(이방인에선 엄마)를 욕한 아들을 사형 집행에 처하게 할 만큼 비난하거나, 사형집행을 시키는 등의 격한 결과까진 아니었지만 최소한 그 격함이 누구 하나 죽일 만큼 큰 비난에 가까웠다. 키워준 아빠를 그렇게 생각하냐-라는 인터넷 댓글 여론뿐만 아니라 어른들의 말과 행동, 눈치등이 그랬다. ‘아무리 그래도 키워준 사람은 배반하면 안 된다’라는 말과 함께 말이다.


그렇지만 나는 계속된 ‘그래도 아빠인데’와 ‘아빠는 아픔이 너무 많아’ 속의 양극단의 소진 속에서 점점 시들어가고 있었다. 삶을 버틸만한 에너지라도 남아있었으면 아빠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이 그리 어렵진 않았을 것 같은데, 문제는 소진이었다. 행복이 쌓이지 않는, 오히려 내가 아빠에게 행복을 빚진 것만 같은 소진. 행복이라곤 느껴본 적 없는, 행복을 밖에서 벌어와도 아빠는 “너는 내 마음을 왜 몰라주니. 너만 행복하니”라고 하며 가져가니, 나는 너무 죽고 싶었다.


사실 죽고 싶었다고 이야기하지만 당시 상황은 조금 위험했는데, 실제로 (가볍겠지만) 죽을 계획을 짜거나 누군가 말려 실패한 적도 있었으므로 나의 상황은 위태로왔던 게 사실이었다. 대표(여기선 아빠)는 희생이 당연해지고, 죽으려는 마음마저 배은망덕으로 돌아가고 있으니, 야… 이건 정말 미칠 지경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구원자처럼 등장한 것이 카뮈, 정확히는 카뮈의 문장이었다.


물기 없이 엮어낸 그 문장은 나에게 정확히는 위로보다는 방향성으로 다가왔다. 당시 내가 어떤 구렁텅이에 빠져있는지, 어떤 순환 속에서 살고 있는지 사실 지금만큼 정확히는 알지 못했는데, 나는 그의 ‘너의 감정은 이상하지 않을 수 있어’라는 감각을 따라 처음으로 선택이란 것을 해나가기 시작했다. 문제는 그 첫 번째 선택이 대학 진학이라는 점이었는데, 나는 겁도 없이 그렇게 철학 관련 전공 진학을 생각하며 입시 원서를 쓰게 됐다. 당연히 주변의 참견과 간섭은 덤이었다. 60대 여성이 전 세계 여행을 하는 것보다 더 한 걱정들이 바로 옆에서 들리게 됐다. 차라리 안정적이게 기술을 배워라- 더 공부해 봐라- 뭐 해 먹고 살 거냐- 등등의 이야기들이 나의 옆을 떠돌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들 역시, 자신 안에 맺힌 아쉬움과 애정 어딘가를 내뱉고 있던 것 같기는 한데 당시에는 그 말들이 나에게 불안을 가져다 주… 지 않았다. 참으로 신기하게도 집단에 그렇게 예민했던 사람인데, 그 불안이나 답답함이 들어오지 않았다. 나의 선택, 나의 행복, 나의 방향성이 확실해지니 그들의 이야기가 나를 흔들리게 하지 않았다. 심지어 가끔 학교에서 따돌림당한 경험이 있었음에도.


학교에서의 따돌림은 집단에서 벗어나면 어떻게 되는지 몸소 체험시켜 주는 중요한 경험이긴 했다. 다행히 그 강도가 ‘더 글로리’ 정도는 아니었지만, 집단이 한 번 누군가를 마음먹고 놀릴 때 사람에게 어떤 모멸감이나 수치심을 주는지 나는 잘 알았다. 이유 없이 누군가를 조롱하거나 놀릴 때 혹은 작은 이유가 커져 모두가 날 싫어할 때의 그 수치심을 어느 정도, 아니 꽤 많이 알았다. 집단주의의 예민함과 섬세함. 폭력성을 그때 알기도 했다.


그럼에도 나는 그들의 오지랖과 편견, 아쉬움과 불 안 함 등에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마음이 마치 카메라가 줌-인을 하듯 더 잘 보였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근거가 있는, 왠지 이 삶을 헤쳐나가고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근거를 봤기 때문이었다. 조금 오만한 생각이었을지 몰라도 그때 그런 생각을 한 것 같다. ‘당신들은 당신들이 직접 선택하는 힘을 알지 못하는 것 같아-‘라고.


지금에 와서야 그들의 아쉬움뿐만 아니라, 내가 내 선택을 하려면 직접 선택할 수 있는 주변의 지지, 환경, 재정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걸 알지만 그때 나의 마음은 타인이 주는 불안에 대해 도도해질 정도로 꿋꿋했다. 다행히 부모님이 내 대학 진학을 존중해 준 덕에 (결국 학자금은 대부분 내가 갚고 있지만) 철학 관련 전공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렇게 진학 한 곳에 희망은 있었을까. 아니 더 큰 혼란이 있었다.


나는 지금도 누군가 대화를 할 때, 너 편이라는 공감을 해줘야 하는지 내 의견을 말해야 하는지, 아니면 그 사람의 답답함을 풀어줘야 하는지 고민한다. 곧 집단주의의 자아와 서양문화의 자아와 무당의 자아 중 어떤 것을 꺼내야 하는지 고민한다. 이건 일상에서 겪는 나의 정체성 혼란이자, 에너지가 많이 쓰이는 특성 중 하나다. 뉴욕 여행에서 느낀 건 “너 생각은 어때? 내 생각은 이래”라는 대화 방식의 편안함이었는데, 한국은 정말 누굴 만나든 뒤죽박죽 섞인 느낌이 든다. 심지어는 각각의 사람마다 각각의 모드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과 대화할 때도 이 다양한 감각을 쓰곤 하는데 그럴 때면 기가 정말 많이 빨리는 기분이 든다.


그리고 이 시작은 단연코 대학교를 가면서 시작이었다. 이전에는 집단주의와 무속적인 자아 중 하나만 선택하면 좋았던 반면, 대학에 가며 나에겐 ‘서양문화'라는 옵션이 더해졌다. 철학사 시간부터 다른 시간들까지 ‘내 생각을 쓰는’ 시간이 정말 많았다. 집단주의의 ‘아무튼 화나고 분해도 리더 혹은 집단의 합의를 따라야 한다’라는 의견과는 다른 시간들이 펼쳐졌고, 어색한 기류와 상황 아래 계속 서로의 의견은 부딪혔고, 감정이 격해지거나 토라지는 상황들도 있었다. 아무래도 정답을 찾는 정규 교육과정뿐만 아니라 일상 속에 스며든 ‘대표 혹은 집단의 말이 어떤 의미를 뜻하는가’를 찾는 익숙함이 깨지다 보니 우린 서투르고, 복잡했고, 상호 존중이 부족했다.


하지만 거기서 내가 느낀 건 상대방의 의견을 통해 성장하는 기쁨이었다. 나만 정답이 아니고 상대도 정답이 아닌, 서로가 서로에게 배우는 방식은 나에게 문제를 푸는 하나의 방식이자 신념이 됐다. 내가 정답이라고 생각한 것조차 타인에게는 정답이 아닐 뿐만 아니라 심지어 타인의 말이 정답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서로 정답은 아니지만 서로의 생각이 풀고자 하는 문제를 보완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공동’으로 그동안 생각하지 못하던 해답을 찾을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내가 느낀 학문의 즐거움이었다.


이는 대표 혹은 집단의 정답을 찾고 따라가는 것과는 다른 방법이었다. 교수의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교수라는 대표 혹은 교수라는 학점의 권력을 가진 사람의 말을 앵무새처럼 따라 하는 생각이 아니라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고, 때로는 교수님의 말에도 질문을 던지는 일에서 집단주의의 한계를 발견했던 것 같다. 뜬금없는 나의 질문에 대해 다른 길로 새려고 대답하는 교수의 비겁함이나 ‘어디 학부생 1, 2학년이-‘라고 하며 감정으로 꾸짖는 교수가 있었던 한 편, 나의 질문에 천천히 대답해 주는 것을 넘어 언제나 학생들을 ‘학우님’으로 부른다던가, 수업도 중요하지만 가끔 자연에서 배우고 와야 한다며 30분 정도 쉬는 시간을 가져도 괜찮다고 토닥이는 교수님이 있었다. 이 두 교수를 보며 나는 고민했다. 집단주의는 문제점을 해결하는데 어떤 한계를 갖는가. 혹은 어떤 문제를 낳는가-라고.


정말 미안하게도, 학점을 잘 받는 친구들에게 약간의 분노가 있었다. 이렇게 되다 보니 내 학점은 고분고분하게 이야기를 들어야만 하는 교수들에겐 좀 낮은 감이 있었고, 새로운 생각을 환영하는 선생님들에겐 좀 높은 감이 있었다. 그중 나 같은 경우 후자의 선생님께 많은 것들을 배웠다고 생각한다. 물론 다듬어지지 않은 내 혈기를 받아들여준 고마움도 있겠다만, 그분들은 대체로 내가 어느 정도 책을 읽고 열심을 다했다고 판단하면 독특한 생각을 하더라도 받아들여주거나 칭찬해 줬다. 그 지지와 자신감으로 나는 삶에서 이것저것 실험을 해보고 도전해 봤다.


생각나는 일탈 중 하나는 다름 아닌 도보여행이었다. 지금 바라보면 정말 작디작은 일탈이지만, 또 당시에는 엄청 큰 일탈이었음을 감안해주었으면 한다. 학부 3학년쯤 되었을까. 아직까지 학점과 집단의 눈치를 보고, 성향상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꽤 컸던 나는 ‘학점 관리’라는 문제와 ‘빨리 결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감을 벗어던지고 제주행 티켓을 구입하고 만다. 그것도 OT주가 아닌 수업 1주 차를 모두 비우고 말이다.


도전했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 “내 속도로 가도 괜찮다”와 “학점… 생각보다 중요하지 않다”라는 두 가지 근거 때문이었는데, 나는 당시 다른 사람의 속도로 움직이는 내가 답답했고, 부자연스러웠고, 어딘가 꽉 막힌 느낌이 들었다. 그러므로 OT를 듣다가 “아, 내 속도대로 가보자-“라는 결심이 올라왔다. 그리고 OT를 듣는 도중, 필기를 하지 않고 노트북을 켜 항공권을 검색했다. 그리고 제주행으로 날아올랐다.


참… 뒤돌아보면 돈도 없고, 용돈도 적어 머리도 못 자르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가서 굶기라도 하면서 가야 한다고 생각한 건 그만큼 자유가 소중했나 보다-싶다. 실제로 하루에 아끼고 아껴 근 3.5만 원 정도씩 썼으니, 5박 6일 비행기 값을 제외하고 20만 원 정도로 제주도를 다녀왔으므로 지금 생각해도 그만큼 간절했던 것 같다. 하지만 나에겐 그 여행이 자유였고, 방법이었다.


“인생을 삶의 실험대로 써라”라는 간디의 말처럼, 나에게 서양철학이 알려준 건 다름 아닌 자유였다. 우선 개인과 개인의 존중 속에서 이뤄지는 수많은 대화를 통과하고 배운 건 정답은 없을 수 있겠다는 어떤 확신이었다. 정말 많은 색이 짙은 친구들과 정말 많은 환경에서 자라온 사람들에게 나는 그들의 삶을 물었고, 가치관을 물었고, 생각을 물었다. 단순히 이는 대학 생활 자체를 넘어, 약속을 잡고, 관찰을 하고, 대화나 독서를 통해 이뤄지기도 했는데,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날수록 내가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삶은 생각보다 정답이 아니었음을 내 노력에 대비해 깨달았던 것 같다. 이는 다른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도 문제가 없다는 생각으로 연결됐다.


독서도 꽤 많이 도움이 됐다. 철학을 하며 배운 건 학자들에 대한 당위나 존경보다는 ‘그럴 수 있겠구나-‘하는 태도가 컸다. 각 철학자들이 말하는 정답을 들으며 나는 어느샌가 ‘각자의 삶이나 환경마다 생각하는 정답이 달라질 수 있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그러면서 철학자들의 삶과 욕망들을 들여다보게 됐는데, 상황과 삶마다 정답은 다를 수 있고, 곧 욕망도 다를 수 있겠다-라는 개개인들의 모습을 듣게 됐다.


그러므로 나는 그 당시, 소설과 에세이들을 다른 욕망을 곁눈질해보는 방식으로 읽게 됐다. 특히 기억나는 건 릴케와 김훈, 윤동주, 헤르만 헤세다. 이들은 내가 언어화되지 않은 감정들에 대해 정확하게 써주는 한 편, 자신만의 시각으로 자신을 표현해 줬다. 이로 인해 나는 언어와 감정의 해방감을 얻고 공감하면서도, 그들의 욕망을 곁눈질해보고 살펴보는 소중한 경험을 하게 됐다. 또한 그 곁눈질 속에서 이 욕망이 어떤지, 괜찮은지, 따를만한 건지도 보게 됐다.


수많은 작가들을 책으로 만났지만 나는 억만장자가 될 만큼 지식이 확장되거나 통찰을 얻었다고 말할 순 없었다. 다만 욕망의 다양성, 사람들의 다양성, 삶의 정답등에 대한 고민에 대한 실마리를 잡을 수 있었다. ‘이때에는 이렇게 해야 해’라는 말이 얼마나 작디작은 말인지, ‘이런 삶이 정답이야’라는 말은 얼마나 편협했는지- 그리고 여기에 더해 조금씩 권력에 대한 지식이나 시스템에 대한 인사이트도 쌓여가고 있었다.


여기서 중요했던 건 집단주의에 대한 반항심보다 내 삶에 대한 존중감이 앞서나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나는 서양 문화에 대한 믿음, 곧 다른 생각들이 충분히 존재하며 정답은 ‘나’ 스스로 찾아야 한다-는 마음이 더 크게 올라오기 시작했다. 집단이 아닌 나 개인과 대화하고, 내가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생각보다 정답에 가깝고, 행복에 가깝다는 점을 친구, 타인과의 대화 그리고 책의 무수한 사람들을 통해 접하게 됐다. 그렇게 내 중심에서는 단순히 반항해서 집단주의를 부수고, 아빠에게 반항하고, 세상을 엎어야 한다는 알량한 증오보다 나를 존중해 주자는 마음이 앞서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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