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세 번째 정체성 - 서양문화(3)

by 시몬 베유

이 존중은 스스로 하기는 어려웠다. 무엇보다 자신의 생각으로 쌓아가는 철학은 한계가 있었다. 나에겐 ‘개인’을 더 잘 다룬, 시간의 풍화 작용 속에서도 살아남고, 나보다 똑똑한 수많은 사람들의 동의와 지지를 얻은 텍스트가 필요했으므로 이런 관점에서 내 학과의 공부는 도움이 됐다. 고대 ‘객관’을 발명한 플라톤부터 ‘나’라는 자아를 좀 더 굳건하게 세운 데카르트, 과연 ‘개인’이라는 존재는 세상을 어떻게 인식하고,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가를 잘 정립한 칸트에 더불어 이성에 대해 질문한 막스, 니체, 프로이트 그리고 이를 잘 활용해 구조와 구조 너머를 이야기해 준 현대철학자들 까지 모두 나에게 ‘개인’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줬다. 물론 2-3학년 당시에는 학문이 짧아 니체정도까지 간신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됐지만 당시 들었던 니체의 수업은 집단주의에 대한 증오를 꺼내면서도 내가 어떻게 방향을 잡고 살고,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도움을 줬다.


그렇게 다양한 욕망들을 바라보고, 무엇보다 니체 수업을 듣고 결론으로 내렸던 건 다름 아닌 도보여행이었다. 나를 옭아매던 결과나 학점등을 나름 포기하며 무슨 일어나는지 궁금했고, 다들 제주도 가면 호화로운 여행하고, 차 타고 다니고, 버스로 1시간이면 갈 거리를 꼬박 하루를 걸어 내 속도로 가면 무슨 일이 생길지 궁금했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만, 이곳저곳 이동하며 인증샷을 성취처럼 찍는 모습에서 약간 방향을 틀어 가장 나다운 ‘신체’라는 나만의 속도로 걸어 경험한 곳엔 무엇이 있을지 궁금했다. 남들이 다 하는 거, 다 정답이라고 하는 거, 가치 있다고 하는 거 안 하면 어떻게 되는지 궁금했다. 니체가 말한 ‘그럼에도 반항심을 가지고 꿋꿋이 걸어가는 사자’ 같은 사람이 되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궁금했다.


거기에 더해 나에게 사실 가장 큰 두려움은 의외로 계획이었는데, 이 두려움조차 답답했던 건지 당일날 걸으며 숙소를 잡고 걷고, 그 다음날 일어나면 숙소를 잡고 또 걷는 방식으로 여행을 진행했다. 이렇게 해봐도 죽지는 않을 거라며, 이 여행 또 언제 해보겠냐며, 정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든 대처는 하겠지-라며 상황과 속도와 나를 믿었다. 일부러 불안을 기어들어간 것 같기도 하고.


내 안의 집단주의는 (특히 경제나 효율과 얽혀버린 한국의 집단주의는) 나에게 ‘너 대학가서도 공부 안 하면 문제 생길 거야’라고 말했다. ‘너 계속 결과 안 내놓으면 문제 생길 거야’라고 말했다. 알바를 하고, 돈을 모으고, 스펙을 쌓아야 한다고 말했다. 인싸가 되어 한 줄이라도 적어야 한다고, 그래야 괜찮은 평균의 삶을 산다고 말했다. 더 나아가, 내 마음에서는 ‘너 지금까지 소멸되며 살았잖아. 너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한 경험 있잖아. 너 따돌림 안 당하려면 뭘 더 잘해야 하잖아. 생존과 결과물은 동일선상애 있잖아.’라고 말했다.


하지만 답답했다. 뭐든 해봐야 알았다. 애초에 고등학교는 졸업했기도 했고, 나는 카뮈가 열어젖힌, 좋은 대학 선생님들이 건넨 ‘나’ 혹은 ‘개인’에 대해 나아가봐야 알았다. 두려웠지만 카뮈의 지지가 있었고, 선생님들의 지지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떼었다. 때 봐야 바닥에 뭐가 있는지 알 수 있었으니까. 내가 두려워하는 것만큼 떨어질지, 아니면 바닥이 바로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있었을 테니까. 그렇게 슥하고 손을 떼었는데, 두려워하는 것만큼 바닥은 깊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볼 때, 나는 그 용기가 쌓이고 싸여 지금까지 나를 이끌었다고 생각한다. 우선 그 당시부터 결과를 말하자면 “진리의 실험대” 실험은 나름 성공이었다. 우선 그때 성적장학금을 받았다. 다행히 나와 잘 맞는 교수님들의 수업을 들었는데, 신기하게도 (통계적으로도) 잘 맞는 교수님들은 결석에 별 신경을 쓰지 않았으므로 나의 성적에는 큰 영향을 주진 않았다. 또한 그분들은 전체적인 맥락보단 자신이 좋아하고 꽂힌 수업이나 발표등으로 시험을 이끌어가길 좋아했기 때문에 한 번쯤 결석하더라도 맥락을 파악하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두 번째로 제주 역시 문제없이 끝났다. 1-2년 정도 지난 후, 비가 엄청 와서 정말 힘들었던 도보여행이나 절벽에서 소를 만나 ‘죽겠구나’ 싶었던 썰이 있던 여행과는 달리, 날씨도 화창하고 사람들도 좋고, 당시 방문했던 루트의 마을을 찾아 10년째 방문하고 추억을 쌓은 것도 이때가 시작이었다. 무엇보다 그 여행 이후로 일정이나 변수나 상황에 대해 많이 긴장하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이 여행이 가장 중요했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이후에 겪게 되는 프랑스에서 여권을 잃어버렸음에도 침착히 대처했다거나 비행기가 10시간 연착되어 뜬금없이 암스테르담에서 내렸을 때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더 즐겼던 데에는 이 여행이 도움이 되었음이 사실이다. 무엇보다 이후, 퇴사 후 취업 준비보단 여행과 글쓰기를 택했다던지, 가서 굶어 죽어도 좋으니 일단 유럽을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는다던지 하는 이 무모한 결정은 아무래도 이 여행에서 배운 ‘절벽에서 손가락을 떼는 용기’가 큰 초석이 되었음이 사실이었다.


물론 이렇게 낭만적인 이야기만 있던 건 아니었다. 자기 생각을 말하면 반항으로 여기는, 다른 생각을 그리 반기지 않는 교수의 경우가 있었고, 다른 생각을 적으로 여기는 친구… 라기엔 애매한 학우들이 있었다. 물론 그 당시 내 사회성에 약간의 문제가 있던 것도 사실이지만 친구가 없진 않던걸 보면 모두 내 사회성 탓으로 돌리기엔 애매한 일들이 있었다.


첫 번째는 학우에 대한 부분이다. 언젠가 공부를 정말 잘하는 친구에게 화가 났던 적이 있었는데, 나도 스트레스를 받았던 상태였었는지 대화하다 그 친구에게 가서는 “왜 자꾸 책의 이야기만 반복하는지 모르겠다. 교수님의 이야기는 너의 이야기가 아니다. 너의 이야기는 어디 있느냐”라고 화를 낸 적이 있다. 아직도 이 이야기는 친하게 지내는 동기에게 “그땐 그랬지-“하는 농담으로 소비되곤 하는데, 지금 돌아보면 그 친구 자체에 대한 분노였다기보단 그간 겪었던 집단주의에 대한 분노가 그 친구에게 쏠린 건 아니었나-하는 미안함이 남는다.


또한 각자마다 공부하는 스타일이 다르다는 것도 나에게는 그 당시 알지 못했던 사실이었다. 카뮈를 기반으로 철학자들의 자유로움과 생각을 존중하는 교수님들의 지지를 받은 나는 그 해방감이 꽤 구원처럼 여겨졌는데, 권위를 따르고 신뢰할만한 사람의 이야기를 따라갈 때 효율이 나온다거나 해방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나의 방법이 아니니 틀렸다-고만 생각한 것이다.


이런 성향을 알았는지 한 친구는 농담처럼 “너 그러다 미친개소리 듣는다” 는 이야기를 장난처럼 했는데, 다행히도 내가 분노했을 때 예상되는 상대방의 표정과 서양철학에서 배운 “너의 의지에 의한 행동이 모두에게 적용됐을 때도 괜찮은지 생각해 봐라(칸트)”라는 이야기는 나의 행동과 의지에 브레이크를 잘 걸어줬다. 그러므로 나에게 서양철학 혹은 서양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행위는 구원이자 동시에 정체성의 혼란과 집단주의가 강한 조직과 살아가는 에너지의 연속이었다.


두 번째는 졸업 이슈였다. 내가 좋아하는 그리고 나를 좋아하는 교수님이 누구인지 알고는 학점을 조금씩 쌓아갔지만 역시 필수로 들어야 하는 수업들은 도저히 피해 갈 수가 없었다. 졸업 직전 나는 과락할 뻔한 수업이 있었는데,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중간고사를 내가 원하는 대로 안 써서… 그는 과제 제출에 의의를 둔 성적만을 주었고, 나는 그로 인해 과락이 될 뻔했다.


차라리 정답이 있는 객관식 시험이었다면 나는 그 “내가 원하는 대로 안 썼다”라는 말을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주관식의 B4용지를 가득 채워야 하는, 앞의 1시간은 영화를 보고 뒤에 1시간은 시험문제를 주관식으로 내는 그 시험에서 나는 ‘학생 멋대로 답안지를 썼다-‘라는 평가를 받으며 최저 점수를 받았다. 나는 요약과 의견을 시험으로 냈는데, 너는 요약을 많이 쓰지 않았다며, 아마 영화를 제대로 보지 않았을 거라며 무시하는 그의 발언에 나는 ‘요약은 10줄 이상 썼고, 그 요약본을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핵심 내용은 모두 들어있었으며, 이후 제 주장을 이끌어 갈 때 대사 하나, 이야기한 줄 모두 넣었다’고 말했으나 그는 맘에 안 든다는 이유로, 내 의견을 잘라버렸다.


물론 내 잘못이 있었을 수도 있었겠다만 학생들 사이에선 ‘꼰대 교수’로 소문이 자자했던 교수였으므로 답답함에 극에 달했다. 다행히 기말고사를 어떻게든 아득바득 맞춰주긴 했지만 나는 나의 존재가 부정당하는 느낌이 꽤 컸는데, 그건 그 사람이 서양문화를 가진 척했으나 사실 집단주의를 대표하는 가장 대표적인 인물 같은 느낌을 줬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후에도 취업문제, 가정의 문제, 친구들의 문제들로 나는 꽤나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지만 사실 가장 힘들었던 건 매 순간 일어나는 일상적 대화에서의 혼란의 문제였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건, 일상적 대화를 하건 나는 매 번, 매 순간 예민한 에너지로 상대방을 탐색한다. 어쨌든 상대방에게 좋은 경험을 하게 해주고 싶고, 해방의 마음을 주고 싶고, 사랑을 나눠주고 싶은 건 나의 정체성 중 하나이자 어쩌면 인간적인 본능이었다. 하지만 이 사람이 내 무속적인 속성에 즐거움을 느끼는지, 새로움을 던지는 서양문화적인 속성에 즐거움을 느끼는지, 아니면 유교적인 ‘동일시’에서 즐거움을 느끼는지 나는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그리고 어쩌면 익숙한 상대일지라도 상대방의 상태가 달라질 때마다 스위치와 버전을 껐다가 켰다가, 섞었다가 나눴다가를 반복했다. 예민하게 탐색해 가며 말이다.


물론 한국 사회에서 가장 많이 쓰는 버전은 집단주의적인 대화 방식이었을 것 같고, 나에게 재밌는 대화는 서양문화권적인 ‘너는 어떻게 생각해?’에서 뻗쳐 나오는 다름에 대한 시너지나, 무속적이고 답답한 마음을 풀어내는 대화를 좋아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정체성의 혼란은 꽤 오래, 계속되었다. 그러나 의상, 제스처, 말투, 단어등에서 ‘같은 편임이 아님’을 직감한 집단주의는 나를 소진시키게 만들었다. 또 악의 없는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나 ‘어떻게 생각하세요’라는 질문은 간접적으로 인맥이나 직업, 연봉 등에서도 문제를 일으켰다.


거짓을 믿게 만들려면 진실이 꽤 섞여있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나는 동의한다. 사람들이 말하는 ‘이렇게 하면 이렇게 돼’ 라든가, ‘이때 이 거 안 하면 이렇게 돼’ 하는 주장들은 어느 정도 사실이 섞여있다고 생각한다. YOLO 하면 삶이 망한다는 주장은 과거를 보면 그럴 확률이 높았을 수 있고, 결혼 적령과 젊을 때 돈을 모아야 한다는 이야기들은 과거만 비춰본다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마찬가지로 교수의 말을 잘 들어야만 학점을 잘 딸 수 있고, 대표나 집단의 심기를 거스르면 손해를 볼 확률이 한국에선 높았다.


모든 게 해석일 수 있다고 하지만, 그 해석마저도 집단에서 이탈한 사람들이 손해 보는 비율은 사실 과거로보나 현재 한국으로 보나 높을 수밖에 없었다. 집단이 모여야 생존 확률이 올라간다는 건 그럴싸-가 아니라 정말 그럴 일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마치 내가 교수에게 소위 ‘개겼을’ 때 손해를 본 것처럼, 면접 때 ‘야근 잘하세요?’라는 질문에 ‘할 수 있습니다!’가 아니라 ‘자꾸 야근이 생기는 문제를 의식하고 줄이는 게 정답이라고 생각한다’라는 답변이 면접관의 심기를 거스른 것처럼 아직 집단주의는 우리에게 실제로 영향을 끼친고 생각한다. 특히 군대의 혁신병영부터 토스의 혁신적인 운영방침, 젊은 스타트업의 성공과 해외 지부들의 입점이 있어도 결국 한국의 경제는 단단하고도 수직적인 현대, 삼성, 한화 등의 기업들이 꽉 잡고 있으며, 특히 공기업이나 공무직 같은 경우에는 상명하복체계가 매우 강한 것이 사실이다. 거기에 ‘그래도 상명하복이 장점이 많다-‘ 던가, ‘해외 기업은 그래도 바로바로 자른다- 정이 없다-‘라며 해외 기업을 다른 편으로 만드는 생각들 까지 더해져 한국은 집단의 이야기를 따르지 않으면 손해를 보는 것이 어느 정도 맞다고 나는 생각한다.


더 쉽게 나아가 집단주의가 옳다고 믿는 문화가 혹은 그것이 익숙한 문화가 강성한 것은 사실이기에 나는 어렸을 때부터는 무속적인 입장으로부터, 성인이 되고 나서는 무속과 서양철학이 더해진 입장으로부터 큰 혼란을 겪어왔다. 그리고 무엇보다 집단주의의 장점도 본 입장이기에 더더욱 혼란을 겪어왔다. 그렇지만 역시 집단주의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건 가정인 법. 마지막으로 아빠의 이야기로 이 혼란 파트를 끝마치려고 한다.


그러니까 일은 한참 서양문화의 힘을 받아들이면서 발생했다. 대학교 1학년 1학기를 끝마치고 신세계를 맞이했던 시절, 나는 내 답답함과 생각의 교환 속에서 ‘너의 생각이 그렇구나’ 혹은 ‘너의 감정은 그렇구나’로 상대방에게 내 의견이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하며, 자유와 즐거움을 경험한다. 특히 이 시점은 고등학교. 집, 학원만 반복하던 일상과는 다르게 대학교에 들어가 새로운 친구들과 새로운 가치관을 받아들였는데, 언어로 설명은 못할지언정 방법은 찾았다는 확신이 들었다. 아빠를 바꿀 수 있다는, 아빠도 더 이상 답답하게 자신도, 남을 괴롭히며 살지 않아도 된다는 확신이 말이다.


곧 매 번 가져오는 행복을 모두 털어가는 반복되는 순환을 끊어낼 방법이자, 아빠는 더 이상 고통받아도 되지 않는 확신이 들었으므로 나는 모두를 살릴 수 있는 만병통치약을 발견한 소년처럼 아빠에게 그 확신을 들고나갔다. 아빠와 함께 나도 철학을 해가며 내 안의 고통과 타인에 대한 사랑을 다루는 방법을 가져가고, 아빠도 스스로의 감정과 힘듦을 해갈할 방법을 잘 정리해 싸들고 갔다. 나는 20년의, 아빠는 오랜 시간의 고통을 끝낼 수 있는 방법임을 느끼고 말을 걸었다.


“아빠. 철학에 대해 아세요? 철학을 만들어보시는 건 어떠세요?”


하지만 아빠는 나의 경험이나 감정을 몰랐을 터, “철학을 아냐. 만들어보라”라는 질문은 반항 혹은 무시로 들렸을 것이 뻔했다. 나의 발언은 역설적으로 집단주의와 트라우마를 둘 다 건드린 듯했고, 아빠는 나에 대한 비난과 분노를 더했다. 나에게 있어선 어떻게든 아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해결해 주려던 20년의 이야기가 단숨에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밖으로 뛰어내리려던 나를 붙잡던 엄마가 없었더라면 나는 이후 재밌게 본 나영석 PD의 예능부터 명작 영화들과 수많은 여행지들이 영혼이 되어서 낄낄되며 보았을지도 모른다. 아니, 사실 거긴 6층정도 되는 높이였으므로 죽을 정도는 아니어도 그 해 여름을 병실에서, 이후에는 운동을 못하며 보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돌아보면 내가 축구하면서 통과한 기쁨과 도보여행을 하며 통과한 즐거움들이 그 당시 사라질 뻔했지만, 다행히도 창문은 이중창이라 여는데 시간이 좀 걸렸던 바람에 이 혼란은 하나의 소동으로 남아버렸다.


지금 돌아보니 아빠는 철학적 맥락이 없었으므로, 차라리 “아빠는 믿을만한 사람이 못된다”라는 집단주의적 언어로 말하는 게 더 문제 해결에 빠르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게 나왔다면 아빠는 기분이 나빴긴 했겠지만 나에게 “개똥철학”이니, “네가 뭘 배웠느니”라며 내가 찾아낸 방식을 무시하진 않았을 것 같다. 그렇지만 이 경험으로 얻은 것이 있다면, 나는 정체성 혼란이라는 문제를 계속해서 가져갔다는 점이다. 이 일이 1학년 1학기 때 일어났으니, 만약 유교로 승부를 봤다면 나는 자연스럽게 ‘아 이 문화권은 그냥 임대 힘으로, 집단과 집단으로 싸워야 했구나’라고 생각하고, 계속해서 힘싸움 혹은 집단싸움으로 문제를 해결했을 것 같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감명을 얻고 방법으로 찾은, 아빠에게 ‘저는 이걸 이렇게 배웠어요’라고 개인의 입장에서 말하는 방법으로 부딪혔고 부서졌다. 그러므로 나는 유교로만 문제를 푸는 방식이 아닌, 개인과 개인으로 상황을 바라보는 방식으로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아간다는 불교의 말처럼, 아빠로부터 조각난 산산조각은 집단주의 방식의 ‘나의 옳고 틀림’이 아니었다. 내가 느낀 한계, 삶을 포기하고 싶었던 동력은 “지금의 나로서는 설득이 불가능한데, 계속 이 고통을 받는 건 희망이 없다-“라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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