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면서도 쓸 수 있는 행서

나는 앉아서 쓰기도 어렵던데

by 이미령

해서는 읽기는 쉬워도 쓰기 까다롭고, 초서는 쓰기보다 읽기가 상당히 어렵다. 상대적으로 행서는 읽고 쓰기 쉬워 개인 문서와 서신 등에 실용적으로 사용하여 행압서[(行押書) 교환문서]라고 했다.

결합 형태로 “해서+행서=해행서, 행서+초서=행초서”라 한다. 이 楷․行․草 삼체(三體)의 혼합은 형태보다 서법에서 엄청난 영역의 확대가 가능하다. 행서는 독창성 분야에서 스펙트럼이 넓은 서체로 서예대회 출품작에서 행서의 비율이 높은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추측할 수 있다.

당나라 장회관(張懷瓘)은 서단(書斷)에서 "행서는 후한(後漢)의 유덕승(劉德昇)이 창조한 글씨체로 해서를 조금 변형시켜 간편하고 쓰기 쉽게 하여 세간에 유행되었으니 이를 행서라고 한다."라 하였다.

그는 25인의 신품(神品)으로 서성 왕희지(書聖 王羲之), 종요(鍾繇), 왕헌지(王獻之), 장지(張芝) 당대(唐代) 구양순(歐陽詢), 우세남(虞世南), 저수량(褚遂良), 안진경(顔眞卿), 이옹(李邕) 등의 고수와 송대(宋代) 소식(蘇軾), 황정견(黃庭堅), 미원장(米元章), 채군모(蔡君謨) 등의 행서가 후세에 추종을 받고 있다고 했다.

삼체[행․해․초서]의 발생 시기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지만 행서는 해서보다 앞선 서체라는 것이 정설이다. 행서는 일반에 널리 사용되어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동진(東晉)의 왕희지에 이르러 그 틀이 완성되었다. 장회관은 왕희지는 행서, 해서의 진수를 완벽하게 얻었고, 왕헌지는 행초의 진수를 터득하였으며 아버지의 글씨는 가장 영화롭고 아들의 글씨는 가장 신준(神駿)하다고 했다. 행서의 처음과 끝에 왕희지․왕헌지 父子가 있다. 어쩌면 서예 전 시대를 통틀어서 신체(新體)를 만들어 낸 왕희지를 으뜸으로 평가한다. 특히 진적은 없지만 임모본인 풍승소의 글마저도 훌륭하다는 28행 324자의 난정서는 후세 서예인이라는 반드시 한 번은 써봐야 하는 글이다. 수많은 서적을 통해 언급된 이 글은 행서의 특징인 다양한 표현과 형태의 변화를 느낄 수 있는 최고의 작품으로 51세인 왕희지가 거나하게 술을 마신 뒤 단숨에 써 내려간 최고의 명작이다.

그러나 나의 시선을 끄는 것은 내가 접근하기 너무 높은 난정서보다 훨씬 짧고 간략한 왕헌지의 글로 전해지는 15자의 행초서 압두환첩(鴨頭丸帖)이다. 초(草)에 행서를 접목시킨 이 첩의 특징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필휘지로, 필획의 연결 유무에도 불구하고 결자와 포백의 기맥이 이어져 장법의 혈맥상련, 허실상생, 착락유치의 맛과 자유롭고 변화무쌍한 멋의 조화를 가졌다. 약 26.1㎝×24.5㎝ 크기의 아담하고 짧은 글이라 훨씬 편하게 볼 수 있어서 정이 더 가는지도 모르겠다.


서예를 배울 때 해서를 쓰다가 행서로 넘어오면 "자유"다. 처음에만... 마치 고등학교의 규칙 속에 살다가 대학에서 느끼는 자유 같은. 근데 점점 나의 선택과 결정이 많아지면서 그 자유가 오히려 힘들어졌다. ISTJ로 해서가 익숙한 나는 자유로운 행서의 영역이 어렵고 힘들었다.

행서는 글을 쓸 때마다 붓의 변화로 글맛이 확확 달라지는데, 그것이 오히려 기준을 세우기가 난해하여 내가 만든 틀에서 빠져나오기가 힘들었다. 힘을 빼야 강약, 후박, 대소, 생략, 완급, 호응, 전절, 포백, 실허...의 맛을 발휘할 수 있을 텐데 당최 가오[폼을 속되게 이르는 말)에 진심인 나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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