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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MTD May 16. 2024

현대인이 겪는 것에 대해서

갓생과 욜로 그 사이

프로이트의 주요 저작 중 <문명 속의 불만>이라는 글이 있다. 이는 현대인들이 겪는 신경증의 발생 메커니즘을 설명하면서 충동과 억압, 사랑과 공격성, 삶 충동과 죽음 충동, 죄책감의 발생 등 주요 개념들이 적립된 중요한 텍스트이다.


신경증이란 본능(충동)과 억압 사이에서 갈등할 때 나오는 증상을 말한다. 영어로는 뉴로시스neurosis, 독일어로는 노이로제Neurose라고 표현하는데, '신경증이 뭐지?' 싶었던 사람들도 아마 노이로제라는 말에서 어떤 느낌이 왔을 것이다. 일상 속에서 '이러다가 정신병 걸릴 것 같아'라고 호소하는 순간으로 설명될 수도 있다. 구체적으로는  강박증, 히스테리(신체화), 공포, 불안 등의 증상을 말한다. 이런 증상들을 보면서 그 원인을 신경세포, 즉 뉴런neuron에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당시 신경증 환자들, 특히 여자 히스테리 환자를 만나면서 이들에게 강력한 심리적 억압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고, 거기서부터 무의식의 실체를 밝혀나가기 시작했다. 증상의 원인이 몸(뉴런)이 아니라 정신(마음, 심리)에 있다고 초점을 옮긴 것이다. 이 내용에 대해서는 <히스테리 연구>에 아주 상세히 보고되어 있다.




프로이트의 글은 100년 전에 쓰여졌고, 그가 '현대인'이라고 했을 때의 느낌과 지금 2024년을 살고 있는 우리가 생각하는 '현대인'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을 것이다. 사회가 더욱 복잡해졌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당시 프로이트가 주목한 성에 대한 억압에도 차이가 있을 것이다.  히스테리 환자의 경우에는 가장 큰 억압이 성 충동에 대한 억압이었다. 단순히 육체적 욕구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그와 관련된 생각, 관념에 대한 억압이다. 그런데 요즘에는 그 당시보다는 자신의 성 충동을 표출하는 것에 있어서 자유로운 것 같다. 예를 들면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  이상형에 대해 말하는 것, 더 나아가서는 자신의 성적 취향에 대해서 밝히는 것도 서슴지 않는 사람도 볼 수 있다. 물론 이런 흐름과는 다르게 유교걸, 유교보이라는 자조적인 표현도 있기는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시대라고 해서 우리의 모든 욕구와 충동이 자유로워진 것은 아니다. 우리 정신의 심급 중에서 쾌감의 획득과 불쾌의 회피만 추구하는 이드ID가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이드의 욕구와 법과 질서를 담당하는 초자아SUPER EGO의 허락 사이에서 갈등하는 자아EGO이다. 늦잠을 자고 싶지만 출근을 해야 하고, 밥을 양껏 먹고 싶지만 체중 관리를 위해 적당히 먹어야 하고, 연애를 하고 싶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가 다반사다. 어떤 곳에 가든지 거기만의 규칙과 질서가 있다. 그것에 따라 내 본능은 잠시 눌러놔야만 하고 그들의 룰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존재한다. 우리는 그들을 범법자, 위반자라고 부른다.  


도둑질, 성범죄, 폭력, 사기 등 모두 자신의 공격성과 성욕을 사회가 용인하는 형태로 표출하지 못했기 때문에 법의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다(사회가 용인하는 형태로 잘 표출하는 것을 방어기제 중 '승화'라고 부른다). 이렇게 초자아가 부실한 사람들은 사회적 제도가 그 한계를 그어준다. 그러나 초자아가 너무 강력한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 그들은 평범한 사람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마음속에서는 매 순간 충동과 법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초자아는 단순히 사회적인 도덕규범만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것을 포함해서 문화적 이상, 가치관, 고귀한 목표가 포함될 수 있다. 이 말은 우리가 같은 사회를 살아가고 있지만, 개개인의 내면에서 작동하는 초자아의 요구수준은 다르다는 것이다.


내면에서는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욕구가 올라오고, 외부에서는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법과 질서, 사회적 요구가 강요되고, 그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나. 이것이 프로이트가 말한 '문명 속의 불만'이다. 혼자 자연 속으로 들어가 버리지 않는 이상, 우리 모두는 이 불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세상에는 진정한 문명인보다는 문화적 위선자가 훨씬 많다고 한다. 이 말은 문명사회에서 요구하는 것들을 잘 수용하고 맞춰서 잘 살아가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고, 대체로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살고 싶진 않지만 어쩔 수 없이 맞춰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근래에 등장한 두 단어가 있다. 갓생과 욜로이다. 갓생은 이상적인 삶을 말한다. 각자 생각이 다르겠지만 내 머릿속의 갓생이란 다음과 같은 것들이 떠오른다. 미라클 모닝하기, 한 달에 한 권 책 읽기, 영양제 챙겨 먹기, 퇴근 후 헬스장 가기, 주변 사람들에게 연락 잘하기, 원데이 클래스 등 자기 계발하기, 주식 및 부동산을 공부해서 자산관리 및 노후준비하기 등 사회적 이상은 계속해서 나열할 수 있다.


반면에 욜로라는 단어는 욜로족이라고 활용되는데, YOLO는 You Only Live Once의 약어이다. '당신의 삶은 한 번뿐이다. 현재를 즐기며 살아라'는 움직임이었다. 어차피 저축해 봐야 집도 못 사고, 사회에서 요구하는 것은 너무 많으니 그냥 현재 누릴 수 있는 것을 하겠다는 생각인 것 같다. 소위 말하는 'n포 세대'가 흑화 하여 최종 진화한 버전이라고 볼 수 있다.


정신분석을 공부하는 분들의 시선을 느끼며 한 가지 추가하자면, 욜로족의 행동 근원이 이드가 아니라 초자아의 목소리로 볼 수도 있다. 특히 라캉을 말하는 슬라보예 지젝이 자주 언급하는 '즐겨라'라고 말하는 초자아의 목소리와 연결되는 지점이 있다. 초자아가 억압만 하는 것이 아니라 '법을 넘어서라', '즐겨라'라고 말하는 외설적 초자아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드와 함께 칸트를>이라는 라캉의 철학적 관점의 글이 있지만, 필자의 능력 부족으로 간단히 언급만 해야겠다.




우리의 삶에서 사회적 요구를 잘 수용하면서 사는 것이 중요할까? 아니면 내 욕구를 채우면서 사는 것이 중요할까? 당연히 둘 다이고 많은 사람들이 형태는 다르지만 이를 목표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이 대목이 바로 프로이트가 말한 '현실원칙'과 관련된다. 자아는 사실 변형된 이드라는 것인데, 간단히 말하면 현실을 잘 살아가는 것이 곧 이드의 욕구는 충족시키는 길이라는 것이다. 유치한 예시를 들어보자면, 열심히 일해서 돈을 많이 벌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많이 할 수 있다. 여기서부터는 물질만능주의,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 등 머리 아픈 논의로 이어질 수 있지만, 그것은 논지를 벗어나기 때문에 멈춰야겠다.


프로이트 시대 때는 성에 대한 억압이 강력했다. 한 세기 정도가 지나니까 성에 대한 억압에 대해서는 좀 자유로운 세상이 왔다. 아마 또 한 세기 정도가 지나면 어떤 부분은 지금 우리가 받는 압박보다는 숨좀 쉴 수 있는 세상이 되어있지 않을까 하는 가벼운 기대만 가져볼 수 있을 뿐이다. 여기서 프로이트의 글로 마무리하는 게 좋을 것 같다.


"행성이 자신의 축을 중심으로 자전하면서 동시에 중심이 되는 천체 주위를 공전하는 것처럼, 인간도 자신의 독자적인 인생길을 걸어가면서 동시에 인류 전체의 발전 과정에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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