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MTD Apr 25. 2024

상실과 우울증

피식대학 혁이 형, 기생수: 더그레이

최근 유튜브에서 흥미로운 영상을 하나 보았다. 피식대학의 '05학번 is back' 시리즈였다. 콘텐츠 내에서 혁이형이라고 불리는 정재형 님의 유행어는 다음과 같다. 

"널 사랑해 그러나! 널 증오해 but! 널 흠모해 however! 널 미워해 nevertheless! 널 좋아해" 이런 식이다. 


이 영상은 매우 코믹하게 연출되었고 이를 보는 시청자 또한 웃긴 장면이라고 생각하며 봤을 것이다. 그런데 프로이트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 말이 단순한 유머로만 들리지 않을 것이다. 바로 프로이트가 말하는 애증병존, 양가감정이라고도 알려진 개념이 생각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일상에서 저렇게 표현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말이다.  



프로이트 전집 시리즈 중 [정신분석학의 근본개념]에 수록된 <슬픔과 우울증>이라는 글을 보면 무언가를 상실한 사람들이 겪는 우울증에 대해 상세히 설명을 하고 있다. 

먼저 슬픔과 우울증의 차이에 대해서 말한다. 슬픔은 무언가를 상실한 사람이 보이는 정상적인 반응이다. 연인과 이별한 사람이 보이는 반응일 수도 있지만, 이상, 조국 등 꼭 잃은 것이 사람이 아니더라도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은 슬픔이라는 감정을 느끼기 마련이다.


이에 반해 우울증이라고 볼 수 있는 사람은 조금 다른 차원의 증상이 있다.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의 상실, 자애심(自愛心)의 추락, 자기 처벌의 욕구, 자기 비하를 동반한 극심한 괴로움이 그것이다. 여기까지만 봤을 때는 슬픔과 우울증이 단순하게 경중의 차이라고 보여지는 듯하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이라는 분야가 과학의 한 분야로서 인정받기를 원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그렇듯이 프로이트는 철저한 분석과 논리를 통해 둘을 구분한다. 


자신의 임상과정을 통해 알아본 결과,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비난하고 욕하고 처벌해 주기를 원하는 표현을 하지만 그 말을 잘 들어보면 떠나간 대상에 대한 비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한다. 나는 여기에 "'대상 비난'과 '자기 비난'이 혼재되어 있다"라고 덧붙이고 싶다. 어떤 순간에는 대상을 욕하기도 하고 이후에는 그것에 대한 '취소'행위라도 하듯, 그런 비난을 한 자기 자신을 나무라기도 하는 것 같다. 어쨌든 대상과 내가 구분되지 않는 순간들이 있다는 것이 핵심이다. 




이런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애증병존, 즉 한 대상에 대해서 사랑과 증오가 공존한다는 개념을 이해해야 한다. 일반적으로는 납득하기 어렵고 직관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그런 것이 당연한데, 이 둘이 동시에 의식되는 감정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론적으로는 사랑이 의식되고 있는 순간에는 증오가 무의식에 있을 테고, 증오가 의식되고 있는 순간에는 사랑이 무의식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에 한 여자 아이돌 가수가 자신의 연애를 공개하는 일이 있었다. 아마 그분은 팬들에게 솔직하게 오픈하고 축하도 받으며 소통하길 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일부 극성팬의 반응이긴 했지만, 시위 트럭을 보내고 엄청난 공격성을 표출한 것이 사회적인 이슈가 되었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애증병존이라는 것은 이 예시로 설명이 될 수 있다. 아이돌 가수에게 엄청난 사랑과 에너지를 주었던 그 팬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깊은 배반감과 상실을 느끼게 했을 것이다. 그 순간 무의식 속에 있던 증오가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낸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대상을 상실했을 때 애증병존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작용하는 것일까? 이별을 잘 받아들이고, 그 사람 없이 잘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우울증에 걸리지 않는다. 그저 다시 그 사람이 없는 시절로 돌아간 것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 어찌 그런 이별만 있겠는가? 그 사람 없는 삶은 상상도 할 수 없고, 생각도 하기 싫은 대상이 우리 삶에 있기 마련이고 그를 떠나보내줘야만 하는 순간이 올 수도 있다. 그게 꼭 연인이 아니더라도 가족, 가까운 친구, 소중한 지인이 있을 것이다. 




'나의 삶의 굉장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을 상실했을 경우 우리는 괴로운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는 것인데,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또 한 가지 개념이 필요하다. 바로 '나르시시즘적 대상선택'인데, 이는 자기애적 대상선택이라고 말할 수 있다. 프로이트는 사랑에도 단계 혹은 수준이 있다고 보았다. '자가성애 - 자기애 - 동성애 - 이성애'가 그 순서다. 이 개념 자체로도 복잡하고 깊은 내용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쉽게 '나를 사랑하는 수준'이 있고 '대상을 사랑하는 수준'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자기애 수준의 사랑과 대상애 수준의 사랑은 질적인 차이가 있다. 아기가 엄마를 사랑하는 것과 성인이 결혼한 배우자를 사랑하는 것에 차이처럼 말이다. 갓난아이가 엄마를 사랑할 때 엄마의 어떠함(성격, 인성, 외모, 정치적 성향, 재산 수준 등)을 고려해서 사랑하고 말고 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필요(먹는 것, 입는 것, 자는 것 등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를 채워주고 나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기 때문에 본능에 가깝게 사랑하는 것이다. 즉 엄마의 존재 자체가 나의 생존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나의 일부로서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넷플릭스 인기 드라마 <기생수: 더 그레이>는 이 나르시시즘적 사랑을 설명하기에 적합하다. 사람 몸에 기생해서 생존하는 기생수 '하이디'는 다른 기생수보다 훨씬 강한데, 그 이유는 이렇다. 보통의 기생수는 자신이 기생하는 신체가 위험에 처하거나 상처를 입었을 때 스스로 신체를 절단하여 다른 건강한 몸으로 옮겨갈 수가 있다. 반면 하이디는 극 중 설정 때문에 다른 신체로의 이동이 불가능하다. 즉 자기가 기생하는 '수인이'의 위험은 자기의 위험이고 수인이의 죽음은 곧 자신의 죽음이기에 목숨을 걸고 지켜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더 강할 수밖에 없다. 몸의 주인인 정수인은 위기를 벗어날 때 하이디에게 고마움을 표현을 하지만 '내가 살기 위해 했을 뿐이야'라는 하이디의 냉정한 반응은 모든 기생수 시리즈(애니메이션 원작, 실사 영화)를 관통하는 명대사이다. 



정리해 보면,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한다. 언젠가 그 대상과 이별해야 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러나 나의 일부처럼 사랑했던 그 대상을 쉽게 포기할 수 없다. 물리적으로는 떨어졌어도 나의 마음에서는 그 사람을 떠내 보내는 '애도'를 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심리적으로 정신적으로 그 대상을 내 안으로 갖고 들어오는데, 이를 프로이트는 '대상의 그림자가 자아에 드리워졌다'라고 표현한다. 이것이 인상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심리적으로 건강하다고 볼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마음에서는 '대상 상실'이라는 현실을 부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대상을 내 속으로 끌고 들어왔을 경우 두 마음이 공존한다. 하나는 '그 사람은 떠나갔어 이제 너의 삶에는 없는 거야, 이제 그를 놓아주고 현실을 받아들여, 그게 네가 살 길이야'라고 하는 마음이다. 또 다른 마음은 '그는 떠나가지 않았어, 그는 나와 함께 할 거야, 계속해서 사랑할 거야'라는 마음이다. 역시 문제가 되는 것은 두 번째 마음이다. 대상을 포기하지 못했기 때문에 여전히 그 대상을 '사랑'하기도 하지만 이젠 배반(혹은 상실) 당했기 때문에 이제는 '증오'도 표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 우울증에 걸린 사람이 하는 자기 비난과 자기 처벌적 표현에 대한 의문이 풀렸다. 사실 그러한 비난과 징벌적 표현은 떠나간 대상에 대한 증오와 공격성 표출이었지만, 외부에서 제삼자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자기 자신을 괴롭게 하는 사람처럼 보이는 것일 뿐이다. 이별이란 참 괴로운 일이다. 이런 과정을 겪은 사람은 누군가를 또다시 사랑하기가 두려워질 것이다. 이 고통을 또 반복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로이트가 말했듯이 대상에 대한 리비도 집중(사랑)이 철회되지 않고 다시 다른 대상에게 리비도 집중(사랑)할 수 있다면 괴롭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사랑은 다른 사랑으로 잊혀간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이런 의문이 들 것이다. '결국 이별을 한 사람은 괴롭다는 건데, 너무 당연하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쉬운 얘기 아니야?' 맞다. 당연한 얘기다. 그러나 고통의 순간에 내 마음 안에서 벌어지는 과정을 상세하게 아는 것과 모르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큰 고통에 파묻혀 있을 때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이론과 지식은 우리를 경험과 감정으로부터 한 발자국 떨어질 수 있게 해 준다. 나를 제3의 시선에서 볼 수 있게 해 주며 현실을 바라보게 해 준다. 이를 '관찰 자아'라고 하기도 한다. 대상을 애도하기 위해서는 괴로움도 충분히 느끼긴 해야 하지만, 우리는 현생도 잘 살아내야만 하는 현대인이다. 


프로이트의 말에 기반하면, 두 가지 정도 도움이 될 만한 방법이 있다. 하나는 떠나간 대상을 충분히 욕하는 것이다. 물론 그런 욕을 해도 잘 받아줄 만한 안전하고 믿을 만한 대상에게 해야 한다. 떠나간 사람이 아무리 좋은 사람이었고, 소중한 사람이었어도 이제는 없다. 그 대상을 사랑했던 만큼 증오도 컸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내가 그 사람을 과연 증오했을까?'라고 생각된다면 욕할 거리를 찾아내서라도 더욱 욕해야 한다. 구석구석 털어서 비난하고 흠을 찾아내는 것이 좋다. 그렇지 않으면 그 공격성이 나를 향할 것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방법은, 포기할 수 없을 만큼 나의 일부였던 그 대상이 나의 어떤 부분을 채워주고 있었는지를 돌아보는 것이다. 첫 번째 방법보다는 확실히 어려운 작업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나의 민낯을 직면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장 간편하게는 글을 써보는 방법이 있다. 그러나 글을 쓰며 자기의 깊은 내면까지 들어가는 것은 상당한 수련이 필요하다. 또 가깝고 안전한 친구를 만나 이야기하는 것도 좋은 방법도 있다. 그러나 친구라고 해서 나의 밑바닥의 모든 것을 다 말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것 가능하다고 해서 좋은 관계인 것도 아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나와는 상담할 때만 만나고, 그 외에는 만날 일이 없는 심리상담사와 대화하는 것이다. 내가 한 이야기들이 어디로 새어나갈 일이 없으면서, 마음껏 나의 이야기를 해보는 경험은 내가 모르고 지냈던 내 이면의 모습을 볼 수 있게 해 준다.  


욕 하는 것, 글을 쓰는 것, 심리상담을 하는 것. 이 세 가지는 각각 다른 일 같지만, 사실은 '언어화'라는 하나의 활동이다. 프로이트는 사람이 가진 긴장을 방출하는 방법이 세 가지가 있다고 보았다. 다시 말하면 스트레스가 해소되는 방법은 세 가지라는 것이다. 말하는 것(언어화), 행동하는 것(행동화), 몸으로 표출되는 것(신체화)이 그것이다. 프로이트가 당시 많은 환자들을 보면서 느낀 것이 '이 사람들이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못 해서 몸에 병이 났구나'이다. 학술적으로 많은 축약이 있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심리상담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것의 중요성은 아무리 해도 끝이 없기에, 추후에 새로운 글에서 다뤄봐야 할 것이다. 



상실을 겪은 사람이 떠나간 사람에 대해서 말(언어화) 하지 못하면, 어떤 행동을 할지 모르고, 무슨 병에 걸릴지 모른다. 우울증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자살과 관련된다는 점이다. 프로이트의 관점에서 대상 상실을 겪은 사람의 자살은 진정한 의미로서 자살이 아니다. 내 안에 들어와 있는 그 대상에 대한 증오가 내가 살고자 하는 욕구보다 컸을 때, 그 대상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것이 자아 외부에서 봤을 때  스스로를 죽이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내가 이러한 글을 쓰는 이유 역시 큰 상실을 겪은 분들이 안타까운 선택을 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물론 이 짧은 글로 모든 우울증과 자살을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크고 작은 이별, 대상 상실을 겪는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힘이 되고, 어려운 시기를 잘 넘어가시는데 도움이 되길 바랄 뿐이다.  

 

작가의 이전글 오랜만에 다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